마치 꿈을 꾼 것처럼
처음으로 나를 포함해 6명이나 되는 대인원이 함께 이동했다. 성별, 고향, 직업, 나이, 취향 모든 것들이 다른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함께 인도에 가겠다는 이유 하나로 모였다. 룸비니에서 바라나시로 넘어갈 때는 소나울리 국경을 이용했는데 이곳의 혼잡함은 가이드북과 먼저 이곳을 지나갔던 사람들의 경험담에서 익히 들어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6명이 함께 이동하게 되어 걱정이 반으로 줄었다가, 막상 소나울리 국경에 다다르니 말로만 듣던 그 소란스러움과 혼잡함에 정신을 몽땅 뺏겨버리고 말았다.
나는 언젠가부터 육로로 넘는 국경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그것은 국경이라는 단어에 대한 것이기도 했고, 실제 국경 그 자체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인도에 오기 전 유럽여행을 할 때 기차와 버스를 타고 몇몇 국경을 넘었고 그때마다 검사원들이 차에 올라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곤 했었다. 태국을 여행할 때는 미얀마로 넘어가지도 않을 거면서 미얀마 국경 앞까지 가보겠다고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100km가 넘는 거리를 달려간 적도 있다. 포카라로 갈 때 넘었던 까까르비타 국경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혼잡했지만 나는 그 혼잡함이 어쩐지 싫지 않았다. 하지만 소나울리에서는 정말로 정신을 빼앗긴 것 같다. 그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인도에서 돌아온 지금, 5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를 돌이켜보면 그 날의 그 소란함이 또다시 그립다. 기억의 왜곡이 정말 웃기지 않은가.
바라나시로 넘어가는 데에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룸비니에서 바이와라까지 버스로 약 1시간, 바이와라에서 소나울리 국경까지 다시 약 10분, 출입국 심사, 기차를 타기로 한 우리는 소나울리에서 고락뿌르역까지 약 3시간, 그리고 밤 11시경 기차를 타고 새벽 6시경 바라나시 정션 도착, 바라나시 정션에서 가트까지 다시 오토릭샤 이동.
복잡하고 길었던 여정을 끝내고 갠지스강의 메인 가트에 도착한 우리는 운 좋게 일출을 볼 수 있었다. 사실 일출을 보았다고 썼지만 이 일출에 대해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아마 그날 그 순간부터 나는 인도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 같다는 사실뿐이다.
모든 질문이나 답에는 설명할 수 있는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조금 미적지근했던 나의 인도가 마치 봉사활동을 하러 처음 첸나이 공항에 내렸을 때의 그 밤처럼 다시 뜨거워진 것에는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그날 아침, 사실은 해가 정말로 보이긴 했었는지 조차 분명하지 않고, 오직 일출이라는 단어로만 기억에 남아 있는 그 일출 이후 나는 11일을 바라나시에서 보냈고 인도라는 나라를 사랑하게 되었다.
아주 사소한 것, 작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순간
나를 둘러싼 주변의 공기가 바뀌었다.
다샤스와메드 가트에서의 그날 아침이 그랬다
모든 사랑의 시작은 그렇게 사소했다. 중학교 1학년, 첫사랑의 기억도 그랬다. 2 분단 첫째줄, 교탁 앞 맨 앞자리에 앉은 남자아이를 좋아했었다. 처음에는 또래에 비해 긴 머리와 어른스러워 보이는 눈빛이 독특한 데다가 그냥 맨 앞줄에 앉아 있어서 선생님을 볼 때마다 눈에 자꾸 걸리다 보니 계속 보았던 것뿐인데 언제부턴가 나는 그 아이를 좋아하고 있었다.
물건이나 공간, 도시에 대한 사랑도 사람에 대한 사랑과 마찬가지였다. 사랑은 언제나 거창한 이유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아주 사소한 것, 작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순간 나를 둘러싼 주변의 공기가 바뀌었다. 다샤스와메드 가트에서의 그날 아침이 그랬다. 나를 제외한 5명의 일행들은 어떤 기분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 사람들에게 그 날 아침은 날이 흐려 일출이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고, 지난밤의 여정이 피곤해 숙소를 찾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누군가는 나와 마찬가지로 인도와 사랑에 빠져버렸는지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