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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싸움은 칼로 불베기

칼을 들고 있는 사람은 화상주의

by 하영

오늘도 전쟁이다. 분주한 아침에, 엄마가 챙기라고 일러뒀던 물건을 아빠가 놓고 나온 게 화근이다. 정말 사소한 일로 전쟁은 시작된다. 나와 동생은 20년 가까이 이 상황을 목격했다. 아무렇지 않게 캠핑 장비를 챙기고, 언성이 격해질 때쯤 워워- 추임새 한 번씩 넣어주면 사그라든다. 막 타오른 불씨에 물티슈를 살짝 끼얹는 수준이랄까. 그래도 잠잠해진다.


사람은 대게 음식을 앞에 두고 싸우진 못하기 때문에, 점심시간 직전/저녁시간 직전만 잘 넘기면 금방 멈출 수 있다. 중요한 건 배부르고 등따술때 갑자기 들어오는 시비다. 시비는 항상 참고 있던 사람이 우겨넣었던 감정을 표출하면서 시작된다. 우리집에서는 꺼진 불씨를 다시 채워넣는 사람이 아빠다. 냉전 상황에서는 코만 골아도 그 자체가 시비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생리현상만으로도 잔소리를 많이 들을 수 밖에 없는 아빠의 처지가 안타깝지만 뭐, 별 수 없다. 온 몸의 구멍을 모두 막을 수는 없으니까.


부부싸움이 일어나면 아마 싸우는 당사자들보다 보는 사람의 감정이 더 동요될 것이라고 자부한다. 아마 두 분은 세상에서 제일 심각한 표정으로, 어떻게 하면 더 스크래치를 낼 수 있을까 고민하며 헐뜯겠지만 보는 사람은 그 분위기만으로 치명타를 입는다. 두 분 사이에 감도는 미세한 기류가 마치 면접 직전에 아랫배가 조이는 그런 긴장감을 만든다. 특히 싸움이 연장전으로 식사시간까지 이어지면, 밥을 편하게 먹기는 글렀다고 볼 수 있다. 목구멍에 음식을 물마시듯 쏟아붓고 저작운동을 하는 데 의의를 두어야 한다. 무언가 맛을 느끼기에는 불편한 감정이 나를 압도해 미각을 상실시켜 버린다.


아마 부부싸움이 잦은 가정의 대부분 자녀들은 이런 생활을 하면서 자랐을 것이다. 우리 동생은 남자이기 때문에 더욱 무덤덤한 제스쳐를 취하지만, 오히려 남자이기 때문에 엄마의 헬프미 눈초리를 더욱 많이 받는다. 나는 어릴 적부터 험상궃은 표정 자체가 무서워 도망쳤고, 나중에 두 분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역할을 했다. 어찌됐든 동생이나 나나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같이 휘몰아치는 신세다.


누가 부부싸움을 칼로 물베기라고 했는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 말을 만든 사람은 아마 굉장히 화목하고 호화로운 집에서 자랐을 것이다. 만약 내가 지금보다 조금 더 중산층의 여유롭고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지금보다는 서글서글한 눈으로 부모님을 말리고, 웃으면서 레스토랑에 데려가 두 분의 심신을 안정시켰으리라. 고급 와인과 스테이크 한 점 대접하면서 아주 우아한 미소로 이렇게 말했으리라. " 에이, 별것도 아닌 일로 왜 그러세요~ 두 분만큼 천생연분이 어디있다고 그래요~ "

물론 지금도 그런 말을 할 수는 있지만, 조금 더 진심을 담아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세상의 만병통치약은 음식이고, 또 두 분이 좋아하시는 물건을 사드리며 사치를 부리면 조금 더 쉽게 화를 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나의 망상이다. 칼로 물베기라고 하는 점에 살짝 동의하는 부분도 있긴 하다. 바로 아빠에 한해서 만이다. 아빠는 자고 나면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심지어 감정조차도 소거돼버린다. 마치 키보드의 delete를 누른 느낌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감정은 쌍방, 아니 그 주변 모두에게도 영향을 끼쳐 다른 사람만 고통스러울 뿐이다.


부부싸움은 언제나 불같고, 불같은 싸움을 칼로 벴다간 칼을 들고 있던 사람만 다친다. 불타오른 싸움은 시원한 물을 끼얹어줘야 끝이 날 것이다. 나와 동생은 여전히 그 불을 끄기 보다는 불멍을 지향하는 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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