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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을 앞둔 동생에게 보낸 문자

배고플 땐 꺼내 먹고, 힘이 들땐 꺼내 읽기

by 하영

문득 달력에서 11월이라는 글자를 보니, 수능이 코 앞으로 다가온 느낌이었다.

'얘는 17일밖에 안 남았는데 제대로 살고 있는건가?'


사실 수시로 이미 희한하게 합격한 대학이 있었지만, 학비도 비싸고 전망도 뚜렷하지 않은 과였다. 그래서 괜시리 나머지 가족들은 동생이 수능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랬다. 정시로 지원하거나 혹은 수시로 상향 지원한 과들이 수능 최저등급을 맞춰 희망이라도 가졌으면 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기가 너무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마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절실히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19의 여파인지, 올해 여름 자가격리도 한 탓에 동생은 더욱 열과 성을 다해 놀고 있었다.


용한 기운을 저항하는 손짓

동생을 위해 다같이 용하다는 절에 가서 백팔배도 하고, 시주도 하고, 학업운이 대성하기를 빌었으나 동생은 영 관심이 없었다. 그 기운 덕분에 학교 하나는 붙었을지 모르지만. 동생이 일단 욕심이 없으니 용한 스님들은 오히려 세속적인 가족들의 소원보다 동생의 해탈한 자세에 칭찬을 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나의 5년 전 k 고딩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는 학구열과 경쟁심이 아주 불타는 여고여서 1분 1초가 아까운 하루를 보냈다. 살면서 그렇게 치열할 수가 없었다. 다시는 겪지 못할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를 사는 느낌이었다. 누가 뒤에서 채찍질을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힘들게 또 한편으로는 최선을 다해 고등학교를 다녔을까 싶지만, 그때의 나 자신조차 불태워버릴 것 같던 열정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덕분에 올해 겨울 무사히 마무리한 임용고시도 잘 견뎌냈으리랴. 끊임없이 스스로를 동기부여하고, 나를 자극시키는 문구들을 찾아읽고, 각종 공부 관련 영상들도 시청하며 자기계발을 위한 하루하루를 살았다. 지금도 물론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 중이다.


동생은 그렇다면, 이왕 K 고딩으로 살게 된 이상 오히려 인생에 더 없는 '열심히'의 기회로 삼으면 좋지 않을까? 물론 온전히 나만의 생각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당장 카톡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장문의 조언 메시지를 보냈다.


하고싶은 말이 너무 많아 구구절절 적다보니 너무 길어졌지만, 동생은 곧바로 답장을 해줬다. 내 생각엔 거의 안 읽고 보낸게 분명하다. "괜찮네" 라니.


어이없는 답장에 기가 찼지만 늘 넷플릭스를 달고 사는 고삼 수험생에게 많은 기대를 걸 수 없었다. 답장을 해준 것 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 사실 건강하게 잘 살아주는 것만으로 고맙다. ㅎㅎ


조언 메세지는 많은 우리나라 수험생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는게 너무 지치고 힘들 때 초콜릿처럼 꺼내 읽으려고 적어놓은 글이기도 하다.



우리가 인생을 어떤 원동력으로 살아가는 줄 아니?

아주 힘들었던 시절에, 악착같이 살아서 이겨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하루하루를 살아나간단다.

우리는 그 이겨내는 과정을 젊은 시절에 거쳐야만 나중에 수많은 시련이 찾아와도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어.

아니면 넘어지고 또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순간들이 점점 많아져. 네가 내일의 나에게 힘을 보태주려면, 사실 그보다 오늘의 나에게 살아갈 힘을 주려면, 오늘의 내가 하기 싫은 일들을 열심히 해나가야 한단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해야만 아는 일에서 해도 별 손해 없는 일, 사실 하니까 나에게 좋은 일, 하니까 재밌는 일로 바뀌게 되지. 생각의 전환은 이토록 쉽게 이루어져. 네가 하루하루 좀 더 의지를 가지면, 그 의지는 양분이 되어 좋은 싹을 피워내고, 결국 너의 인생에 전성기를 만들 꽃을 피워낼거야. 모든 꽃이 봄에 피진 않듯이 여름에 수국처럼 만개할 수도 있고, 가을 끝자락에 코스모스로 피어날 수 있거든. 시기가 늦어져도 결국 의지만 충분히 가진다면 넌 달콤한 인생의 순간들을 맛볼 수 있을거야. 나 역시 내 앞에 놓여진 시련에 끊임없이 흔들리고 방황하고 있지만 적어도 앞으로 나아갈 힘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예전에 내가 힘듦을 이겨냈던 '경험'이 있어서야. 너도 그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귀중하고 열정적인 시간을 꼭 가지길 바래. 그런 기회가 있을 때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학교생활이 지금은 너무 힘들겠지만 남은 시간을 후회없는 나날로 보내길 응원할게! 항상 지금까지 웃는 얼굴로 편안하게, 건강하게 있어줘서 고맙고 내일도 행복한 얼굴로 볼 수 있길 바래!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고삼 수험생과 그 옆에 행복한 고양이 한 마리

여전히 동생은 캄캄한 방에서 여가를 즐기고 있지만, 자기 인생이니 어느정도 내버려둬야할 것 같다. 나아중에 나이가 들어서 내 얘기를 조금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주는 날이 오지 않을까. 적어도 인생에 중요한 문제들을 포기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쓰는 말이니까) 지금처럼 행복하게 웃으면서 능글능글하게 무엇 하나라도 한다면, 지나간 후에 그때 참 즐거웠어. 라는 말이라도 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수험생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을 11월 첫날, 운명의 순간은 이미 지나간 시간들일지 모른다. 하지만 현재를 충실히 하라, 그리고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지금만큼 내가 어떤 상태인지 자각해야 하는 시기는 없다고 본다. 현재 상황에 맞추어 할 수 있는데 까지 해보고, 수능날만큼은 나를 종교로 삼아 독실하게 스스로를 믿어준다면 그 믿음에 '나교'의 창시자인 '내'가 기대에 부응해주는 노력을 할 것이다. 그렇게 노력을 여한없이 해버리기 위해서는, 남은 17일을 인생에 나침반이 될 소중한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때 쌓은 경험은 북극성처럼 반짝반짝 빛나서 어두운 밤을 헤멜 때 길을 밝혀줄 것이다. 특히 우리 동생이 정말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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