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원서, 무엇을 읽을 것인가?
다른 얘기를 한참 했으니 이제 정말 영어 독서를 시작해 보자. 가장 먼저 할 일은 읽을 영어책을 고르는 것이다.
일단 기뻐해 보자. 책을 고르기 시작한다는 건 우리 앞에 상다리 휘어지도록 차려진 뷔페에서 음식을 고르기 시작하는 것과 비슷하다. 몹시 설레고 즐거운 일이다. 세상에는 재밌는 책이 너무나도 많다. 영어로 적힌 것들까지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러나 막상 읽을 책을 고르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아마 가장 큰 어려움은, '읽고 싶은 책'과 '읽을 수 있는 책'이 일치하지 않을 때 생길 것이다. 수준에 맞는 책과 흥미를 끄는 책이 다를 때, 어떤 책을 골라야 할까?
모국어인 한국어는 연령과 함께 발달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외국어인 영어는 그렇지 않다. 몸과 마음은 성인인데 영어 실력은 초등학생 원어민 정도의 수준일 수도 있다. 언어 수준에 맞게 책을 고르면 재미가 없거나 유치하고, 나이나 흥미에 맞는 책을 읽자니 말이 어려울까 봐 걱정되는 것이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웬만하면 후자, 그러니까 수준보다는 흥미에 맞는 책을 고르길 권한다. 어휘나 문장이 다소 어렵더라도 내가 더 궁금한 이야기를 골라 보는 것이다.
이유가 있다. 앞에도 적었지만, 영어 독서에 있어서는 인간의 의지나 시스템보다는 ‘좋아하는 마음’이 좀더 믿음직하다. 과정 자체가 즐거워야 오래 할 수 있다. 책이 잘 읽히긴 하는데 정작 내용이 하나도 재미가 없다면, 안 그래도 바쁜 마당에 영어 독서를 지속하기가 너무 어려워진다.
게다가 쉬워 보이는 책을 골랐다고 해서 모르는 단어가 없으리라는 법도 없다. 재미없는 책을 골랐는데 막히기까지 한다면 정말로 멈추고 싶어질 것이다. 안 그런 게 이상하다. 의지로 밀고 나갈 문제가 아니다.
읽고 싶은 마음,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마음이 먼저 있으면, 읽던 중 난관을 만나더라도 계속 읽어나갈 힘을 내기가 더 쉽다. 내가 꼭 읽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면 결국 언어는 따라와준다. 언어는 (전공자가 아니라면) 어디까지나 수단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처음부터 어려움을 예상하고 재밌어 보이는 책을 읽어보는 것이 낫다.
또한 책을 고를 때 주의할 점이 있다.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할 것 같은 책'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 <총, 균, 쇠>,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도파민네이션> 같은 책을 원서로 읽는 상상은 몹시 매력적이다. 유명하고, 두껍고, 어렵지만 유익할 것 같은 책들이다.
물론 그 내용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면 시도해 봐도 좋다. 그러나 혹시 '한번쯤은 읽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한다면 어느 순간 흥미보다는 오기에 기대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솔직히 오기란, 조금 지치는 감정이다.
주로 추천하는 것은 몰입감이 좋은 소설들이다. 고르기 어렵다면 번역본을 기준으로 책의 줄거리를 찾아보거나, 굿리즈(Goodreads) 같은 유명 책리뷰 사이트에서 주제와 평점을 확인하고 골라도 좋다. 5점 만점인 굿리즈 평점이 4점을 넘는다면 어느 정도 대중적인 재미가 보장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중에서 표지나 키워드가 마음에 드는 것을 시도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어려운 책은 힘들지 않을까?' 싶을 것이다. 내 생각에 취미의 범주 안에서 영어 독서를 도전해볼 만한 책의 적정 수준은 '어휘의 50-70%를 아는 경우'다.
경험상, 어휘의 70% 정도를 안다면 나머지 30%는 맥락으로부터 충분히 유추하며 읽을 수 있다. 이 '유추하는 습관'이야말로 영어 독서를 통해 영어 실력을 늘리는 과정의 핵심이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어휘를 이런 방식으로 획득하면, 기계적으로 의미를 암기했을 때에 비해 훨씬 풍부하고 오래가는 어휘력을 얻게 된다.
물론 어휘와 표현 중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절반에 못 미친다면, 모르는 내용을 유추할 근거도 너무 적다. 아무리 관심 있는 내용이라도 모든 페이지의 모든 문단을 추론하며 읽어야 한다면 조금 지치기 쉽다. 주제가 충분히 흥미롭다는 전제 하에, 최소 절반 정도는 알아듣는 상태에서 시작해야 무리가 덜할 것이다.
80%나 100% 아는 어휘로만 구성된 책을 고르면 안 되냐고? 안 되는 건 없다. 모르는 어휘가 별로 없는 책을 읽는다면 어떤 방해도 없이 내용에만 집중할 수 있고, 그것으로도 즐거운 시간이 될 테니 충분히 좋은 선택이다. 영어를 성장시키는 맛은 좀 덜할 수 있지만, 당연히 된다.
반대로 아는 어휘가 거의 없는 책을 읽으면 안 되는 걸까? 물론 이것도 안 될 것 없다. 영어 독서는 각자의 여정이다. 해보고 싶은 도전이 있다면 얼마든지 해봐야 마땅하다. 그런 시도를 했는데 성공적이었다면 알려주시기 바란다. 그럼 나도 용기를 얻어 대학 때 한 학기 배운 프랑스어나 배워본 적 없는 독일어로 책을 읽는 데에 도전해보겠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모든 것은 '흥미가 가는 책'임을 전제했을 때의 이야기다. 우리는 많은 순간 의무에 떠밀려 우리의 흥미를 홀대한다. 그러나 기억하자. 당신의 흥미는 중요하다. 좋아하는 마음, 궁금해하는 마음, 더 읽고 알고 누리고 싶은 마음은, 의무감이나 불안감보다 힘이 크다. 무엇보다 어려운 와중에도 즐거움을 누리게 해 준다.
그러니 읽을 영어책을 고를 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혹은 읽어야 할 것 같은 아무 책이나 집어들지 말고, 내가 읽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먼저 고민해보자. 거기에 강하고 지속가능한 출발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