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원서 읽기와 달리기의 공통점

단순하고 확실한 성취감 적립하기

by 하영

이쯤에서 독서 얘기를 잠깐 멈추고, 달리기 얘기를 해 보자. 갑자기 웬 달리기 타령이냐고? 러닝과 영어 독서 사이에 비슷한 점이 무척 많기 때문이다.


Miguel A Amutio @Unsplash


첫째, 페이스의 중요성.


나도 평생을 코리안으로 살다 보니 뭔가를 할 때 ‘내 한계를 뛰어넘는 것’, ‘죽을힘을 다하는 것’이 오랫동안 기본적인 태도로 장착되어 있었다. 근데 계속 죽을힘을 다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죽는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생명력을 소진하고 죽음과 가까워진다.


달리기를 시작하니 ‘페이스’에 대한 개념이 생겼다. 보통 페이스라고 하면 일 킬로미터를 달리는 데에 드는 시간을 말한다. 숫자가 작을수록 속력이 빠른 것이다.


연습을 계획하든 대회를 준비하든, 목표를 세우기 위해서는 내 현주소를 알아야 한다. 페이스는 나의 지금을 가늠할 대표적인 지표다.


내가 편안하게 달릴 수 있는 속도는 몇 분 페이스, 나에게 조금 도전적인 속도는 몇 분 페이스. 이건 경험과 관찰을 통해 차근차근 알아내야 하는 사실들이다. 그러려면 ’어떻게 뛰어야 하는가‘보다 ’나는 어떻게 뛰는가’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었다.


영어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내 지금이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지 않고 ‘뭘 해야 할 것 같은지’만 가져다 스스로에게 강요하면 반드시 탈이 난다.


영어 독서에 있어서 나의 현재를 확인하는 지표는 어휘력이나 문법 지식만이 아니다. 내가 관심 있는 주제와 분야, 내가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는 서사, 내 마음을 끄는 인물상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나와 맞지 않는 이야기, 내가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수준의 어휘로 쓰인 이야기를 억지로 읽으면, 재미가 없고 속도가 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영어 독서를 싫어하게 될 수 있다.


비교는 독이다. 남과 비교하기 시작하는 순간 내가 이미 가진 것을 누리는 방법을 잊어버리게 된다. 나의 속도, 나의 방향, 내가 만들고 있는 나의 세상에 집중하면, 매 순간이 주는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


몸이 보내는 신호들을 무시하지 않고, 나 자신의 느낌과 생김새를 연구하며, 내가 좋고 편안한 속도와 형태를 찾아 취하는 것. 영어 독서든 러닝이든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취미로 오랫동안 즐기려면 늘 품어야 할 마음이었다.




둘째, 실력이 계단처럼 성장한다.


‘내 페이스대로 가야 한다’는 말과 상충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때의 성장 역시 각자의 페이스를 전제한다. 나의 지금 페이스를 기준으로, 욕심내 볼 만한 수준에 도전해 보는 것이다.


지나가다 본 영상에서 운동선수 출신 방송인 김동현씨가 말했다.


4km를 쉽게 뛰는 방법이 있어요.
일단 10km를 뛰는 거예요.
그럼 4km는 쉬워져요.


예전이라면 과정을 너무 단순화한 말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직접 10km를 뛰어 보고 나니 저 말이 너무나도 와닿았다.


나는 내 첫 10km를 대회에서 뛰었다. 기록에 상관없이 일단 완주만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혼자 달릴 땐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거리를, 축제 같은 분위기와 완주 메달, 주변에서 응원해 주는 목소리들에 힘입어 달성했다.


한 번 10km를 뛰고 나니 전에는 힘겹게 느꼈던 5km, 7km 같은 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히 달라졌다. 물론 내 몸에도 어느 정도의 변화가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두려움이 사라졌다.


두렵지 않으니 더 쉽게 나갈 수 있었다. 멀리 있는 목표를 바라보며 힘겹게 달리기보다, 내가 ‘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며 자신감 있게 달릴 수 있게 됐다.


영어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15년 전 처음으로 트와일라잇을 읽기 전까지, 내가 읽어 본 가장 두꺼운 영어책은 <매직 트리하우스> 같은 챕터북이 전부였다. 속도도 빠르지 않고 문장에 대한 능숙함도 부족하니 더 두꺼운 책은 일단 부담스러웠다. ‘읽고 싶은 것‘보다는 ‘읽을 수 있는 것’이라는 제한된 폭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두께가 있는 책들을 한두 권 읽고 나니, 내가 읽을 수 있겠다고 느끼는 책의 범위가 폭발적으로 커졌다. 읽을 수 있는지가 아니라 읽고 싶은지를 기준으로 책을 선택할 수 있게 되면 정말로 신이 난다. 그리고 뭔가를 지속적으로 하고자 할 때 신바람은 아주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셋째, 성취는 과정을 따라올 뿐이다.


러닝 경험이 쌓일수록, 마음을 쏟을 대상은 성취가 아닌 과정이라는 생각이 커진다. 과정에 집중하다 보면 성취나 성장 같은 것은 따라오는 부산물에 불과해진다.


기록에만 목을 매기엔 러닝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이 너무 다양하다. 단단하게 나아가는 안정감, 환경의 변화, 건강해지는 기분, 몸에 와 닿는 상쾌한 공기 같은 것. 크고 작은 기쁨을 꼭꼭 눌러 느끼며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에 맞춰 호흡하다 보면 어느새 목표 거리에 닿아 있다. 그런 시간들이 반복되며 기록은 서서히 좋아졌다.


영어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어휘력이나 독해력, 정확한 해석 능력 같은 것에 집착하다 보면 이야기의 흐름과 재미를 놓치기 쉽다. 읽는 궁극적 이유는 더 잘 읽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야기를 누리기 위해서인데, 그걸 놓치는 건 주객전도가 아닐 수 없다.


재밌는 이야기를 골라서 그 흐름에 몰입하고, 시간의 흐름을 잊을 정도로 푹 빠져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읽는 속도는 나도 모르게 빨라지고 이해하는 표현도 많아진다. 그 문장들이 쓰인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도 넓어지고 유머나 은유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건 정말이지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다. 성취는 과정을 따라올 뿐이다.




넷째, 성취감을 수집하게 해 준다.


성취는 부산물이지만, 또한 꽤나 중요한 부산물이기도 하다. 쌓아온 시간을 가늠하게 해 주고 더 나아갈 힘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나는 작은 성취에 기뻐하는 방법을 모르고 살았다. 이 사회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만족하기 시작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구는 경향이 있다. 만족을 방해하고 부족한 것에 집중하게 만든다. 안주하지 말라고 닦달하며 자신을 더 채찍질하라고 한다.


그러나 나아가기 위해서는 열심만 필요한 게 아니다. 지나온 길에 대한 자부심, 선택에 대한 확신, 스스로에 대한 자랑스러움 같은 연료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직접 얻어낸 성취감은 그런 연료들의 실체적인 근간이 된다.


성취감은 나의 크고 작은 성취들을 대접해줄 때 생긴다. 서두에도 적었지만 마라톤은 완주만 해도 메달을 받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스포츠다. 더 빠르지 않아도, 다른 누군가를 이기지 않아도 된다. 꼭 대회까지 나갈 필요도 없다. 나이키 러닝 클럽, 런데이 같은 어플을 사용하면 매일의 기록을 남겨 스스로의 성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크든 작든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성취감이라는 굉장한 선물이 찾아온다. 첫 10km를 뛰고 온 날, 나는 남자친구 앞에서 “나 너무 대단한 것 같아”라는 말을 백 번쯤 했다. 그는 내 호들갑에 지치지도 않고 맞장구를 쳐 줬다. 달리기로 이룬 성취는 단순하고 증거도 분명하다. 나는 러닝을 시작하면서 나의 작지만 분명한 성취들을 더 대접해주게 됐다.


영어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한 권을 읽어내는 것은 온전한 하나의 성취다. 그만큼의 새로운 영어 문장들을 경험했고, 표현들을 눈에 담아보았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을 상상해봤다. 그렇게 누적된 경험치는 삶의 견고한 일부가 된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어떤 영어책이라도, 한 권을 마쳤다면 충분히 뿌듯해해야 마땅하다. 글로 기록을 남겨도 좋고, SNS에 인증샷을 남겨도 좋고, 책장에 예쁘게 진열해놔도 좋다. 작은 완성에 머물러 스스로를 충분히 축하하는 것이다. 그런 호들갑이 모여 쉽게 흔들리지 않는 자아상을 만들어 준다.




마지막으로, 첫 완주는 끝이 아니라, 다른 무수한 가능성들의 시작이다.


난 처음 러닝을 한 뒤로 4년 정도가 지났지만, 정말로 달리기를 좋아하게 된 건 첫 마라톤 대회를 완주하고부터였다. 소박한 기록으로라도 10km를 뛰고 보니 모든 10km 대회가 나의 세상에 펼쳐졌다. 머지않아 하프에도 도전해 보고 싶어졌고, 언젠가 세계 7대 마라톤에도 하나씩 참가해 보고 싶어졌다.


영어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첫 책을 덮고 나면 이제 읽을 수 있게 된 수많은 책이 내 세상 안에 들어온다. 읽다 보면 써보게 될 수도 있고, 읽어 놓은 힘으로 듣거나 말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읽고 쓰고 듣고 말할 수 있으니 다른 세상에 뛰어들어 보기도 쉬워진다. 그 모든 것이, 처음으로 읽어낸 영어책 한 권에서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러닝과 영어 독서에는 이렇게나 비슷한 점이 많다. 이런 것들은 삶을 즐겁고 풍요롭게 해 준다. 내 페이스를 존중하고, 때로는 용감히 도전해 성장하고, 과정을 즐기고, 스스로의 성취를 충분히 알아봐주며, 작지만 분명한 완성으로 다음을 꿈꾸게 하는 일들.


그럼 이 마음가짐을 갖고, 구체적인 읽기로 넘어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