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는 모르겠고, 에드워드가 좋았을 뿐

덕질은 진실로 최고의 공부

by 하영

시작은 중학교 1학년 무렵의 <트와일라잇>이었다. 사백 쪽이 조금 넘는 영어책이었다. 기세 좋게 집어들었지만 사실 반쯤은 못 알아들었다. '방금 에드워드가 뱀파이어인 걸 벨라에게 밝힌 것인지'가 헷갈려서 똑같은 대화를 대여섯 번 읽기도 했다.


그러나 멈추기엔 당시 내 상상 속 에드워드가 너무 잘생겼었다. 이 반짝반짝한 남자가 다음에는 어떤 스윗한 행동을 하며 나타날지 궁금해서 멈추기가 힘들었다. 벨라는 공감하기 쉬운 캐릭터였고 조금 외로웠던 십 대의 나는 환상 속 로맨스에 마음을 빼앗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려운 말은 의미를 추측하면서 계속해서 읽어 나갔다.


당시 등교 시간이 8시 20분쯤이었는데 아침에 몇 페이지라도 읽으려고 잠자리 옆에 책을 두고 자고, 눈을 뜨자마자 읽기 시작해서 아침을 먹기 직전까지 읽었다. 그러곤 학교에 가져가 쉬는시간부터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붙들고 있었다.


<트와일라잇>을 끝내고 나서는 후속편 <뉴 문>을, 그 다음엔 <이클립스>와 <브레이킹 던>을 뒤이어 읽었다. 점차 속도가 붙었다. 이해되는 것도 많아졌다. 400쪽 정도 되는 <트와일라잇>은 한 달에 걸쳐 읽었는데 700쪽이 훌쩍 넘는 <브레이킹 던>은 3-4일 만에 끝이 났다.


책 다음엔 영화를 봤다. 실사로 구체화된 에드워드는 어딘가 실망스러운 면도 있었지만 아직 그 세계 속에서 헤엄치고 싶었던 나에겐 충분한 선택지였다. 관련된 소식들을 더 빨리 알아보고 싶어서, 이때쯤 한국에서 거의 쓰는 사람이 없었던 인스타그램 계정도 만들었다.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세계관의 종결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유튜브를 찾았다. 메이킹 영상과 배우 인터뷰를 있는 대로 찾아봤다. 그때만 해도 국내에서 유튜브의 존재감이 지금처럼 크지 않았다. 영어로 된 인터뷰 영상에 한글 자막이 없어 어떻게든 직접 알아들어야 했다. 같은 영상을 수십 번씩 돌려 봤다.


이렇게 트와일라잇을 어느 정도 소화하고 나자 더 많은 서사, 더 많은 인물들을 보고 싶었다. 선두주자가 대박을 쳐서인지 마침 그와 비슷한 영어덜트 소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헝거 게임>, <추락천사>,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등. 바야흐로 영어덜트의 황금기였다.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책들은 비싼 돈을 주고 사거나 오디오북을 구해 들었다.


당시 읽던 책들 몇 권을 찍어둔 사진


어느 날은 이야기를 읽는 것으로 성에 차지 않아 비슷한 결의 인물들을 만들어 직접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에게 그 세계는 영어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내가 글을 쓸 때도 영어로 쓰게 되었다. 문장력이야 허접했겠지만 나름대로 원작 작가의 문장을 닮은 글들을 뽑아냈다.


그렇게 일 년 정도를 영어덜트 판타지 로맨스 책들에 푹 빠져 지냈다. 계속해서 영어로 읽고 쓰면서도 영어를 '공부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영어가 목적도 아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영어로 적힌 이야기가 해석의 과정 없이 머릿속에 들어와 그려졌다. 반대로 생각하는 모든 것을 영어로 표현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생각을 영어로 하거나 꿈을 영어로 꾸기도 했다.


좋아하는 것을 향해 달려드는데 허들이 있으면 넘어야 하니까, 달려가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영어라는 허들을 넘어 버린 것 같았다. 어휘도, 문장력도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이 시기 이후로 나는 영어를 두려워하거나 부담스럽게 느낀 적이 없다.


그 뒤로 나는 무언가를 새롭게 배워야 할 때마다 그 앞에서 생각한다. 배움의 가장 좋은 원천은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내가 먼저 열렬하게 좋아해야 그 대상도 나에게 곁을 내어주는 법이라고. 진실로 최고의 공부는 덕질이라고 말이다.


그 시절 사두었던 트와일라잇 굿즈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