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재단되는 삶을 채우는 사랑 이야기
원서읽기에 대해 글을 쓰면서 구체적인 책을 추천하는 글을 쓸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목록을 추리자니 예상 독자나 기준을 상정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그래도 책 얘기를 하자면 결국 구체적인 책 얘기를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앞으로 원서읽기에 대해 글을 계속 쓴다면 더 많은 책을 소개할 기회가 있겠지만, 오늘은 한 권에 대해서만 얘기해 보려고 한다. 지난 세월을 통틀어 단 한 권을 고르라고 하면 고를, 십수 년째 갱신되지 않고 있는 나의 인생책이다.
2012년 1월 10일에 출간되었으니 이제 만 열세 살하고도 반년이 넘은 작품이다. 나는 이 책을 당시 다니던 영어학원에서 원어민 선생님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이 책을 읽고, 모두가 이 책을 알게 만들어야겠다는 욕망과 누구도 이 책을 알지 못하게 하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극심한 딜레마에 빠졌다.
내가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 사이 이 책은 부지런히 입소문을 타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도 소개되었고, 2014년에는 <안녕, 헤이즐>이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당시 원서로 영어덜트 소설을 읽는 맛을 갓 알게 되었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한줄한줄 미치게 하는 말맛을 품은 주옥같은 서술들과 대사들을 읽으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 감격을 누군가에게 토로하고 싶은데 얘기할 사람이 없어서 추천해준 선생님한테만 매일 달려가서 울부짖었다.
마침내 번역본이 국내에 나왔을 때 나는 실망할 것을 알면서도 서점에 달려가서 책을 샀다. 이 책과 관련해서 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가 나왔을 때 영화도 봤다. 마찬가지로 실망할 것을 알면서도 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번역서도 영화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2차 창작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이 책은 유독, 저자의 글로 적힌 원래의 그 형태 그 자체가 너무나 완벽하여 그 상태로 음미되어야만 하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가공도 이 책을 원래보다 더 낫게 만들 수는 없었다. 완벽한 그 원형에서 멀어지게만 할 뿐.
한국에서 이 책은 청소년 소설 치고는 어느 정도 반응을 얻기는 한 것 같으나 미국 본토에서만큼은 아니었던 듯하고, 내가 받았던 감동만큼도 아니었기 때문에 난 많이 아쉬웠다.
언젠가 이 책에 대해서 글을 쓰든 어딘가에 소개를 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도무지 건드릴 수가 없었다. 솔직히 소개하기 너무 어렵기도 했다. 줄거리가 자극적인 것도 아니고 대단한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모든 문장이 너무나 깊고 위트있고 온전하다. 직접 읽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위대한 책은 어떤 얘기냐 하면, 열여섯 살 Hazel Grace Lancaster가 암 생존자 모임에서 한 살 많은 소년 Augustus Waters를 만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Augustus는 Hazel이 가장 좋아하는 책의 작가를 만나게 해 줄 계획을 세우고, 어려움 끝에 그들은 암스테르담으로 향한다. 그러나 작가와의 만남은 기대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미국으로 돌아온 둘은 한정된 시간 속에서 둘만의 영원을 만들어간다.
필연적으로 이들 삶의 많은 부분은 암의 영향 아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자칫 처절하거나 신파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에서 모든 부당한 특이성과 신파를 걷어낸다. 오히려 이 책의 인물들은 '암', '투병', '생존자' 같은 단어들이 암시하는 무력감, 비장함, 심지어 숭고함 같은 이미지로 규정되기를 거부한다. 암환자라는 특성으로 이들의 삶을 쉽게 재단하는 시선에 가운데손가락을 날린다.
서로를 알아가고 삶을 나눠 가는 과정 속에 이들은 서로에게 대체할 수 없이 소중한 존재가 되고, 그 결과인 기쁨과 슬픔을 온몸으로 맞이한다. 그리고 그 감정선은 너무나도 섬세하고 풍성하고 정확하게 독자에게 옮아 온다.
처음 읽을 당시 나는 십 대였다. 그때 이 책에서 배운 것을 아직도 마음에 품고 있다. 누군가의 알려진 특성 한두 가지가 그의 삶을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얘기지만, 지금보다 훨씬 좁은 세계에서 살던 십대의 나에게는 꽤나 충격적인 배움이었다. '저 아이는 암 환자이니 암과 용감하게 싸우는 중일 거야' 같은 시선이 당사자의 삶을 얼마나 축소하고 납작하게 만드는지, 그 삶의 평범함과 입체성과 다채로움을 외면하게 하는지를 당사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한다.
저자 John Green은 학생이었을 때 암 병동에서 종교 실습생(?)으로 일한 적이 있고, 그 경험을 토대로 책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그 안에서 이어지는 수많은 평범한 삶에 대해서. 이전에도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지만 이 책은 그의 역작이 되었다. 실제로 The Fault in Our Stars의 대성공 이후 그는 '그만한 책을 쓰지 못할까 봐' 두려움에 휩싸여 몇 년 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고 한다. 글쓰기로부터 도망쳐 자신의 마음을 돌본 다음 이전처럼 순수히 즐거움을 위해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써 놨지만 솔직히 이 글이 벌써 마음에 안 든다. 어떻게 해도 이 책의 진가를 몇 자 안에 담아낼 수는 없다. 사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문장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제대로 적지 못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설명으로는 도저히 대체할 수 없는 소설 속 대사나 구절 몇 개를 따로 뽑아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훗날 북클럽 같은 것을 운영하게 된다면 반드시 고를 책이다. 한줄한줄 곱씹으며 그 아름다움을 공유할 것이다. 미치게 하는 재치와 말맛, 쉽게 재단되는 삶을 채우는 사랑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