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고.
월요일이었다. 출근길 버스에서 졸지 않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피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저 눈꺼풀의 무게가 견딜만 했을 뿐이다.
나는 멍한 기분으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버스가 신호에 걸려 멈춰서고 승용차 한 대도 속도를 줄이며 옆으로 멈춰섰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한쪽 손은 핸들 위에 얹은 채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들더니 익숙한 손놀림으로 화면을 훑었다. 그에게서 시선을 조금 올리자 그 차 너머로 거리 위를 걷는 사람들이 보였다. 열려있는 커피 전문점으로 바삐 들어가는 사람, 가게 문을 나서는 사람, 정류장에 서서 거리 저쪽을 바라보는 사람, 지하철 역내로 바삐 들어가는 사람,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걷는 사람. 뻔한 색깔의 아침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나는 어떤 강렬한 생소함이 나를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풍경이 급격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일상의 풍경처럼 보이지만 이상하게 뒤틀린 세상. 아는 것들이 알고 있던 것으로 바뀌어갔다. 이곳이 내가 바로 어제까지, 아니 방금까지 살았던 세계가 맞나? 대체 난 어디에 있었던걸까.
나는 일상을 상실했었다. 관계의 상실은 일상의 상실 또한 몰고 왔다. 이어오던 관계가 끊어졌고 그것은 공허를 불러왔다. 공허는 내 일상을 무너뜨리고 나는 일상을 잃어버렸다. 낯설고 갑갑한 감정 속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떠올렸다. 하루키 씨가 상실을 어떻게 묘사했었더라. 그 문장이 그리워서 책을 다시 폈다.
<상실의 시대>는 약 2년 전 내가 처음으로 접한 하루키 씨 소설이다. 지금은 그의 소설을 단편부터 장편까지, 그리고 에세이까지 죄다 읽어버린 나이지만, 처음으로 읽은 '하루키'는 소화하는데 역시 오래걸렸다.
<상실의 시대>를 처음으로 읽을 땐 그저 책을 끝까지 보는 데 의의를 뒀다. 그러다가 수많은 다른 작품을 찾아 읽고, 하루키 씨와 '클릭' —딱 연결—하는 순간을 겪고 나니 그의 문학은 내가 의지하고 안정을 찾는 안식처, 세이프헤이븐이 됐다. 그의 문장들은 내게 위로를 주고 그의 단어들은 막연히 떠다니는 내 감정을 한 데 묶어 정리해줬다. 그의 글은 내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해줬다. 그건 여러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이 몰려오는 순간에 그 파도를 가라앉히고 내가 물에 발을 하나씩 차근차근 담글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최근, 상실에 대한 그의 고찰과 그의 충고가 필요했고 하루키가 해석한 상실을 듣고 싶었다. 필요에 의해 <상실의 시대>를 찾아 읽고서야 비로소, 하루키 씨와 나의 첫만남이었던 이 책을 소화시켰다. 성인이 된 내가 내 나름의 진정한 상실을 겪고 난 후였다.
책에는 '나' (와타나베), 나오코, 레이코 씨, 미도리, 기즈키, 나가사와, 그리고 하쓰미가 나온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나름의 상실을 겪는 인물들이다. 기즈키는 삶에 대한 의지를 잃었다. 나오코는 기즈키를 잃었다. '나'는 나오코를 잃었다. 미도리는 가족을 잃었고 레이코는 가정을 잃었다. 나가사와는 사랑하려는 의지를 잃었고 그런 나가사와를 사랑한 하쓰미는 나가사와를 잃었다.
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상실의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에게서 우리를 본다.
성인이 되면서 우리는 상실의 시대를 맞는다. <상실의 시대> 주인공이 막 열아홉, 스무살이 된 성인이라는 것은 우연한 설정이 아닐 것이다. 진정한 삶을 시작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무언갈 잃어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 상실은 우리를 죽일수도, 우리를 성장하게 할 수도 있지만 결과가 무엇이든 개인이 뚫고 지나가야하는 것은 절망이다.
가장 많은 사람을 덮치는 상실은 관계에서의 상실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 관계에서 단념할 것들이 생긴다. 나의 상당 부분을 포기하고 내려놓는다. <상실의 시대>의 '나', 와타나베는 나오코와의 관계에서 바로 이것을 겪는다.
나오코는 고등학교 시절 기즈키의 여자친구였다. 기즈키는 와타나베와 가장 친한 친구사이였다. 셋은 자연스럽게 자주 만나서 같이 어울렸다. 세 사람의 관계를 이어주는 중심에는 기즈키가 있었지만 그들 셋 모두 그 관계에 흥미와 호감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기즈키가 죽는다. 자살이었다. 세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종결되었다. 그리고 기즈키의 죽음 이후 1년여만에 나오코와 와타나베는 전철에서 우연히 재회한다. 그 우연은 지속적인 만남으로 이어졌고, 둘은 서로에게 자연스러운 호감의 감정을 품기 시작했다. 와타나베는 나오코와 있을 때 안정을 느꼈고, 그것을 사랑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기즈키의 죽음으로 나오코의 내면에는 와타나베가 결코 채울 수 없는 결락이 생겨버렸다. 와타나베 자신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갈구하는 것은 내 팔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팔이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나의 온기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온기이다. 내가 나라는 이유로 뭔지 모를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타나베는 나오코와의 관계에 몰두했다. 나오코를 돕고자 했고 그녀와 미래를 함께 살아나가길 원했다. 그녀가 그에게 위로가 되었듯 그도 그녀에게 위로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나오코에게 위로가 될 수 없었다. 나오코의 스무살 생일에 벌어진 일로 와타나베는 그것을 깨닫는다.
그 후 나오코와의 관계에서 그는 지속적인 갈증과 타들어가는 듯한 그리움을 느낄 뿐이었다. 그는 그 자신을 상실해갔다. 와타나베가 억지로 나오코에게 그들의 미래를 얘기할때, 나오코는 이미 끝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오코는 자신을 어딘가 뒤틀린 사람으로 여겼다. 그런 그녀는 자신을 보통 사람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죽음에 가까워지는 일 뿐이라고 믿었다.
결국 관계는 종결되었다. 나오코는 와타나베와의 관계를 놓았고 그 후 그의 삶은 상실감과 괴로움으로 점철되었다. 나오코가 살아있을때도 느꼈던 공허였지만 나오코가 살아있음으로 그나마 연명되던 삶이 그녀가 사라지자 완전히 일그러져버렸고 와타나베는 갈 곳을 잃는다.
<상실의 시대>는 와타나베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된 소설이다. 그가 지독하게 겪는 우울감과 상실감은 그의 시점에서 보는 풍경에 절절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그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은 —신기하게도—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와타나베가 느끼는 절망과 원인은 달라도 그 결과는 같다.
나 또한 상실을 겪었을때 그 상실에만 몰두했다. 끊어진 관계와 그 때문에 내가 잃은 것만을 생각했다. 내 안에서 사라져가는 것, 나를 떠나가는 것, 끊임없이 내 내면의 한 뭉텅이씩을 떼어가는 것, 그것만 바라봤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길을 잃었다. 내 안의 많은 부분이 사라졌다.
예상하건대 맨 처음으로 내게서 떠나간 것은 행복이었던 것 같다. 내 안에서 붙잡을 의지가 사라지니 그도 매정하게 훌훌 떠났다. 행복이 떠나자 미래에 대한 기대 또한 떠났다. 기다리는 것이 사라져버린 삶은 살아가기가 버거워졌다. 그 후 파괴된 것은 잠이었다. 수면시간이 계속해서 줄었는데, 잠에 드는 시간은 일정했지만 깨는 시간이 빨라졌다. 처음에는 다섯시 반, 그 다음엔 네시 반, 세시 반, 두시 반까지 내려오면서 새벽은 점점 길어졌다.
긴 새벽엔 어떤 면으로는 평화로운 고요가 있지만 어떤 면으로는 다가오는 아침을 두려워하게 되는 잔인한 적막이 있다. 어떻게 흘러가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새벽시간이 끝나고 나면 원래의 기상시간에 맞춰 울리는 알람과 함께 피곤 가득한 하루의 시작이 찾아온다. 피로함에 눈이 붓고, 몸은 느려지고, 어지럼증은 심해졌다.
극도의 피곤함으로 내 감정과 육체가 고통으로 동화되자 나는 내 자신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일상이 생소하게 느껴진 건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위의 풍경은 그저 지나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시간을 보내면서 와타나베가 느낀 '마음속의 공동' 이 이해됐다.
"나는 그 애달픈 마음을 어떤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릴 수도, 마음속 어떤 장소에 간직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내 몸을 스쳐가는 바람처럼 아무런 윤곽도 없고 무게도 없었다. 나는 그것을 몸에 두를 수조차 없었다. 풍경이 내 눈앞을 천천히 지나쳤다. 그들이 하는 말은 내 귀에 닿지 않았다."
고독과 자기연민에 빠져 살았다. 한번 맛본 자기연민은 상당히 중독성이 있었다. 그것은 나를 고립시키고 내가 만든 세계 속에서만 살아가게 했다.
글 속에서 나오코는 치료를 받기 위해 어떤 병원 혹은 요양소로 들어간다. 그 곳은 자연 속에 고립되어있고 공동체와 자급자족의 생활이 유지되는 곳이다. 평생 단 한번의 입장과 단 한번의 퇴장만 허락된다. 한 번 들어가면 얼마든지 머물러도 되지만 나오면 다시는 들어가지 못한다. 웬만한 음식은 농사를 지어서 먹고 옷이 필요하면 카탈로그로 주문하고 한 달에 한 번씩 미용사도 온다. 친구나 가족 등의 외부인 방문은 허용된다. 하지만 급한 용무가 아닌 이상 '환자'는 나가지 않는다. 그 안에서 머무는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의 완전한 고립을 현실 감각과 교환한다. 영원히 그곳에서 영원히 그렇게 있을 수 있을거란 환상에 둘러싸인다.
와타나베는 나오코를 만나기 위해 그곳을 외부인으로서 며칠간 방문한다. 그리고 그곳을 나와 다시 마주한 현실은 그에게 엄청난 위화감을 안겨준다.
"중력이 다른 행성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래, 이게 바로 바깥 세계인거야, 하는 생각과 함꼐 슬픔이 밀려왔다."
와타나베가 슬픔을 느낀 이유는 나오코가 머무는 그곳이 환상의 세계임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이 영원하다는 착각을 주는 도피처일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는 결국 현실로 돌아와야 함을, 그것이 —얼만큼 받아들이기 거북할지라도— 사실임을 아는 것이다.
내가 자기연민으로 만든 세계는 바로 위의 요양소 같은 것이었다. 나는 현실을 거부하고 나의 우울로 만든 세계에 나를 가뒀다. 줄어든 잠에 육체적인 고통을 느끼고, 마음에 생긴 공허로 감정적인 절망을 느끼면서 그 누구도 내 이런 마음을 알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나를 고립시켰다.
극도의 피곤함이 누적된 몸은 내 감정의 힘듦을 가시화했다. 고통은 정당하게 밖으로 드러났고 내 자신에게 내 고통을 설득시켰다. 끊임없이 자해했다. 고통은 진짜였다. 하지만 그것이 외부를 차단하는 명분이 되어버리자 그것은 그 어떤 것보다 위해한 독이 되었다.
나오코와 레이코 씨가 머무는 그 공간은 사람들을 부지불식간에 현실을 거부하는 독에 중독시킨다. 치료는 현실 속에서, 현실을 직면하면서 이뤄져야 한다. 현실을 완전히 차단한 치료는 있을 수 없다.
나오코는 '치료' 도중 갑작스레 호전된 모습을 보인다. 깜짝 놀랄 정도로. 와타나베는 그런 나오코의 모습에 희망을 품고 다시 미래를 꿈꾼다. 하지만 사실 나오코는 그 어느 때보다 부서지는 중이었다.
나오코는 얼마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상실의 시대>를 읽으며 위로를 느낀 한편, 반대편에선 지독한 두려움을 느꼈다. 아끼는 사람을 죽음으로 잃는 것이 두려워졌다. 기즈키도, 나오코도 죽음을 선택했다. 하쓰미도 스스로 손목을 그었다. 한 순간 사이에 삶에서 죽음으로 옮겨갔다. 책을 읽다가 마주하게 된 인물들의 죽음은 현실의 내게도 불안을 안겼다. 내 주변인이 이런 식으로 사라져버리면 어떡하지.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이 이 세상에 없음을 마주하게 된다면 어떡하지. 그들은 언제까지나 같은 나이로 남아버린다면, 나 홀로 세월을 견디게 된다면 어떡해야 하나.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그 같은 결론에 이르렀는지 제 3자는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 택한 죽음이 그들의 죽음 이후 남겨진 사람에게 견딜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이유는, 남은 사람을 무너뜨리고 산산조각 낼만한 상실을 남기는 이유는, 그들의 죽음이 내가 그들에게 충분한 위로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의 위로가 충분하지 않았음을 받아들여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오코에 대한 기억이 내 속에서 희미해질수록 나는 더 깊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왜 나에게 "나를 잊지마."라고 말했는지, 지금은 그 이유를 안다. 물론 나오코는 알았다. 내 속에서 그녀에 대한 기억이 언젠가는 희미해져 가리라는 것을. 그랬기에 그녀는 나에게 호소해야만 했다. "언제까지고 나를 잊지 마.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기억해 줘." 하고.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견딜 수 없이 슬프다. 왜냐하면, 나오코는 나를 사랑하지조차 않았던 것이다."
위의 인용구는 <상실의 시대> 첫 번째 장에서 나온다. 이때 와타나베는 마흔 중반으로, 간간이 그를 사로잡는, 하지만 점차 희미해져가는 나오코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슬픈 진실을 받아들인다.
'나오코는 나를 사랑하지조차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이 말이 이해가 힘들어 몇번씩 읽었다. 왜 잊지말라는 말이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 것인가, 하여. 그리고 갑작스럽게, 잊은 것조차 잊었던 기억이 갑자기 되돌아오듯이, 퍼뜩 깨달았다.
나오코의 잊지 말라는 부탁이 서글픈 이유는 그녀가 와타나베와 함께 있을 때에도 이미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을 생각했다는 것은 와타나베는 그녀에게 살 이유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감히 그 사람을 두고 먼저 떠나가리란 생각을 품을 수 없다. 와타나베는 나오코에게 충분한 위로가 되지 못했다. 나오코는 결국 와타나베를 사랑하지 못했다. 이것은 잔인하고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주는 진실이다.
이것을 이해하자 나도 서글펐다. 그리고 주변사람을 자살로 잃게 되는 것이 더 두려워졌다. 아무리 죽지말라 이야기해도 결국 죽어버릴까 두렵다. 내가 무겁게 떠나보낸 그 위로의 말과 응원의 말이 그 사람 내부 어디에도 남지 못하고, 깃털과 같은 무게로 스쳐지나갈까봐 그것이 두렵다. 정작 나는 죽음을 생각하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죽어야한다면 그들보다 내가 먼저 죽기를, 그러기를 바란다.
그러나.
역시 살았으면 좋겠다. 같이, 꼭 같이 살아나갔으면 좋겠다. 죽을 고비를 같이 넘겼으면 좋겠다. 삶을 택했으면 좋겠다.
등장인물 중 아직 언급하지 않은 인물이 있다. 미도리라는 인물로, 와타나베와 같은 대학교에 재학 중이고 와타나베와 같은 수업을 듣는 여학생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엄청난 생명력을 뿜어내는 인물이었다.
"지금 내 앞에 앉은 그녀는 마치 봄을 맞이해 막 세상으로 튀어나온 작은 동물처럼 신선한 생명력을 힘차게 뿜어내는 존재였다. 그 눈동자는 독립된 생명체처럼 기쁨으로 약동하면서 웃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체념하기도 하고 낙담하기도 했다. 나는 생명력 가득한 이런 표정을 얼마 만에 본 건지 잠시 감동에 젖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와타나베는 결국 이 생명력에서 그의 구원을 찾는다.
"이윽고 미도리가 입을 열었다. "너, 지금 어디야?"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들고 공중전화 부스 주변을 휙 눌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러나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 ...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애타게 미도리를 불렀다."
레이코는 나오코와 같은 시설에서 머물며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이자 나오코가 모든 것을 털어놓는 동반자였다. 와타나베가 나오코를 방문했을 때 와타나베는 그녀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품었고, 나오코, 레이코, 와타나베 셋은 즐거운 조합이었다. 나오코의 죽음 이후 레이코 또한 그 시설을 나오기로 결정한다. 레이코는 가정을 잃었고 직업을 갖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인데다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하지만 레이코는 현실세계로 돌아와서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와타나베는 그런 레이코를 역에서 배웅한다. 나오코는 죽음을 향해 떠났고 레이코는 현실로 떠났다. 와타나베 본인은 그 역에서 오갈데없이 방황한다. 그리고 그 방황 중에 그가 떠올리는 것은 미도리다. 그 생명력이다.
상실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한쪽에는 상실감을 다른 한쪽에는 같은 무게의 생명력을 메고 인생이라는 길을 걸어야한다. 상실은 인생을 시작하는 대가다. 몸에서 떼낼 수 없는 무게다. 하지만 어깨가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생명력을 반대쪽 어깨에 지고 가야한다. 생명력 또한 —안타깝게도—무게가 있다. 반대의 것의 무게를 덜어주는 무언가가 아니다. 양쪽 다 우리의 어깨를 얼마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균형을 맞추는 것, 그것이다. 와타나베는 한쪽에는 나오코라는 상실감을,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미도리라는 생명력을 얹고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상실의 시대>를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침대에서, 길 위에 서서, 또 주저앉아서 읽고 또 읽었다. 이 책을 끊임없이 읽었던 이유는 이 책이 상실의 감정에 몰입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었다. 할 수 있다면 이 책 속에서 말하는 감정에 한없이 빠져서 살고 싶었다. 내 감정을 정확하게 묘사해주는 책 속의 세계에서 나는 오롯한 만족감을 느꼈고, 현실감을 잃은 그 세계에서 영원히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이 책이 결국 나에게 주는 깨달음은, 우리는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양쪽 어깨 무겁게하고 걸어가는 것이 삶이다. 그리고 살아남는다는 것은 양쪽 어깨의 균형을 맞추고 사는 바로 그것이다. 상실의 시대를 살며 끊임없는 절망을 겪는 우리가, 우리가 겪는 무게감이 사라질거란 헛된 희망 속에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혹은 스스로 만들어 낸 환상의 세계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서로의 손을 잡고 어깨의 무게는 오롯이 느끼며 서로서로 균형을 맞춰주며 그렇게 같이 살아나갔으면 좋겠다.
본문의 인용구는 모두 <상실의 시대>에서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