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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윤 Mar 13. 2022

(10) 옷이 그려낸 세계의 모습

하윤의 Resolution

스타일이란, 말하지 않고서도 내가 누구인지 드러내는 방법이다.

-   레이첼 조



의,식,주


인간 생활의 3요소로 말하곤 하는 의,식,주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인간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의복을 입는다는 것이다. (논쟁이 있지만) 장거리 이동이나 기생충 전염을 막기 위하여 타 동물들과 달리 두툼한 털 층을 잃어버린, 게다가 가죽도 두껍지 않은 호모 사피엔스는 보온과 보호를 위해 무언가를 입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¹.  정확한 기원은 아무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사냥 후 사냥감의 가죽을 벗겨 깔거나 덮는 식으로 가죽을 이용하다가 이것이 옷으로 변화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에 관련하여, 인류의 의복 문화가 언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연구한 인류학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몸에 사는 이(몸니, body lice) 를 추적했다. 인체에 기생하는 몸니는 머리카락 사이에서 사는 머릿니에서 분화하였는데, 이들은 옷감에 살고 알을 낳으며 살아가기 때문에 몸니가 분화되어 나온 시간을 진화적으로 추적한다면 인간이 일상적으로 의복을 입으며 살기 시작한 시간을 추론할 수 있는 것(그림 1).


그림 1. 인간의 머릿니와 몸니의 분화 과정을 나타낸 그래프(M. Toups et al., Mol Bio Evol, 2011)


상기한 진화분류학적 추론 결과에 따르면, 인간의 의복 문화는 17만 년 전~8만 년 전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시기는 또한 인류가 진화한 따뜻한 아프리카에서 벗어나 더 추운 곳들로 팽창하던 시기이므로, 정황적인 뒷받침이 되어준다. 한, 최근 모로코에서는 12만 년~9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 석기와 뼈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석기들과 동물 뼈에서는 가죽을 벗겨낸 흔적들이 관찰됨으로써, 가죽을 이용한 의복 문화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다(E. Hallett et al., iScience, 2021, 그림 2).


그림 2. 모로코에서 발견된 가죽 공예용 석기. 가죽 자체는 빠르게 썩어 보존되지 않으므로, 석기에 남겨진 흔적을 이용해 추론해야 한다.



의복의 발달


아마도 초기에는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풀, 나뭇잎 혹은 동물 가죽 등을 걸쳐 입었겠지만, 인류의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의복의 구성과 조성 또한 변화하게 되었다. 단순한 동물 가죽에서 벗어난 인간들은 주변의 천연 섬유를 이용해 실을 뽑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고, 이내 이 실을 이용해 어떻게 2차원의 직물을 만드는지 깨닫게 되었다. 이후, 2차원의 직물에서 바느질을 통해 옷을 만드는 것은 이미 가죽을 재단해 옷을 만들 줄 알았던 인류에게 훨씬 간단한 일이었을 것이다(실을 만드는 방적, 실로 천을 짜는 직조, 천을 자르고 꿰메 옷을 만드는 재단/봉제는 지금도 옷을 만드는 기본적인 절차이다).


위의 이야기들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을 살펴보자면, 약 3만 5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바느질을 했던 원시적 바늘이 발견되며, 비슷한 시기인 3만 년 전에는 일부 고고학적 유적지에서 야생 아마²로 원단을 직조해 입었을 것이라는 증거가 발견되었다(그림 3). 이미 아주 오래 전 옛날부터 야생 섬유(양털이나 식물의 섬유 등)을 꼬아 일차원적 섬유를 만들어 왔었고³, 이런 일차원의 섬유를 2차원 직물로 빠르게 짜낼 수 있는 베틀은 약 6천 5백 년 전부터 발견된다.


그림 3. 고대 이집트의 벽화. 린넨을 만들기 위한 아마를 수확하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몇 가지 예시를 들었지만, 전 세계의 다양한 문명권에서 자신들에게 가용한 다양한 천연 재료들을 이용하여 실을 뽑고, 옷감을 짜고, 이것으로 의복을 제작해 입었다. 양을 키우는 문화권은 양모를, 아마를 구하기 쉬운 곳에서는 아마로, 목화가 자라는 인도에서는 목화로, 우연히 누에고치에서 견섬유를 발견한 중국에서는 견섬유를 이용해서 자신들만의 의복 문화를 만들어 나갔다.



옷이 남긴 세계사


 흥미롭게도, 의복은 인류의 역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기곤 했다. 서양과 동양을 연결하고 문화의 교류를 촉진한 중요한 통로는 로마-중국의 비단 무역에 큰 힘을 입어 거대한 ‘실크 로드’ 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고, 18세기 인류의 생활 패러다임을 180도 바꿔 놓은 산업 혁명은 면직물을 쉽고 빠르게 만들기 위해 기기를 자동화하고 개량하며 시작되었다.


이 이야기를 조금 자세히 살펴보자. 비단을 만드는 견섬유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천연 섬유는 짧은 가닥들이 늘어진 단섬유다. 단섬유를 하나의 길다란 실로 뽑아내기 위해서는 짧은 섬유 가닥들이 서로 견고하게 얽혀서 하나로 꼬이도록 뽑아내는 것이 필요한데, 이것이 방적 과정이다. 흔히 사용되는 원자재인 목화는 씨에 섬유가 붙어 있는데, 이 섬유는 마치 민들레처럼 바람에 의해 날아가는 것을 돕는, 식물에 있어 번식의 역할을 담당했지만 이것을 눈여겨 본 인간들은 섬유를 만드는 데 사용해 왔다(그림 4, 5).


그림 4. 목화의 열매. 흔히 저 흰 솜털을 염색하여 목화꽃이라고 꽃집에서 판매하지만, 엄밀히는 씨앗을 감싸고 있는 열매로 보아야 한다.


그림 5. 목화는 인도 원산으로, 서양권에 면화가 수입되기 시작한 때에는 마치 '새끼 양이 자라는 나무' 가 인도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곤 했다.


 전통적인 공정을 살펴보면, 면에서 실을 자아 내기 위해서는 먼저 목화 속에 들어 있는 씨앗을 빼내야 했고, 롤러로 씨앗을 빼낸 후에는 섬유질이 잘 풀어지도록 빗과 같은 것으로 문질러 섬유의 방향을 일치시켜야 한다(솜타기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것을 뭉쳐 솜덩이로 만들고, 물레에 걸어 물레를 돌려가며 실을 뽑았는데, 일정하고 균일한 두께의 실을 얻기 위해서는 상당한 숙련도가 필요했다. 고전적인 방법으로는 사람이 하루 종일 실을 뽑아 열흘간 뽑아야 한 필의 베를 짤 만한 실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하니, 엄청난 노동집약적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노동집약적 과정을 줄이고자 다양한 혁신이 이루어졌는데, 예컨대 영국에서는 존 케이가 발명한 플라잉 셔틀에 힘입어 면직물의 직조 속도가 빨라지니 실을 빨리 뽑을 필요가 생겼고, 이에 많은 발명가들이 아크라이트 방적기, 뮬 방적기와 같은 기계를 이용해 실을 뽑는 방법을 고안했으며, 이는 당시 시작된 증기 기관과 맞물려 대규모 공장 체계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와 같이 경쟁과 상호 상승 작용을 통해 기존의 가내수공업 패러다임을 벗어난 공산품들이 생겨나며 도시화와 산업화가 급속도로 전개되었고 이것이 현대 사회로 이어지게 되었다(그림 6).


그림 6. 리처드 아크라이트의 아크라이트 방적기.


또한, 미국의 노예제도 정착에도 목화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열대성 기후에서만 자라는 목화를 얻기 위해 영국은 미국에서 대규모의 목화를 키우고 또 수입했다(한때는 목화 수출이 미국 전체 무역 수입의 절반을 차지한 때도 있었다). 엄청난 규모로 커진 목화 플랜테이션에서 목화를 수확하고 씨앗을 골라내는 것(초반에는 손으로, 이후에는 조면기로)은 순전히 노예들의 몫이었고, 이에 따라 수많은 노예선들이 미국을 들락날락거렸다. 이 시기 60~70년 사이동안 목화 생산량이 천 배가 넘게 증가하였으며, 이에 필요한 노동력이 늘어나고 노예들의 노동 조건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는 이후 미국의 남북전쟁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위의 사례들은 의복이라는 요소가 인간의 문명사를 얼마나 뒤바꾸었는지에 대한 좋은 사례들이 된다.



미주 Endnote



1. 현대 인류의 진화사를 일컬어 누군가는 생체물을 도구로 대체한 과정이라고 한다. 털과 가죽 대신 의복을, 튼튼한 근육 대신 지렛대를, 날카로운 손톱과 억센 턱 대신 석기로 대체되며 인간의 ‘본체’ 는 점점 연약하고 작아지게 되었다.


2.  아마의 줄기에서 나는 섬유로 아마포, 혹은 린넨이라고 부르는 원단을 짠다. 수메르 지역에서 이런 아마포 옷을 다수 입었으며, 이집트 문명은 노예들을 이용한 대규모 린넨 공장 단지를 운영했다. 로마 또한 군복에 사용하기 위해 아마포를 다량 생산했다. 히 보이는 미라를 감싸고 있는 천 또한 전통적으로 아마포를 이용했다.


3.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가락바퀴가 이런 섬유를 꼬는 도구다. 돌로 된 무거운 바퀴를 돌리고, 돌아가는 힘이 섬유를 뽑으며 꼬아서 짧은 섬유 조각들을 뭉쳐 길쭉한 실 형태로 만들어주는 원리이다. 이 가락바퀴는 신석기시대부터 발견되며, 이후 물레로 계승된다.


4. 비단은 그 광택과 부드러움에서 오는 고품스러움으로 인하여 선망의 대상이었고, 제한적으로 공급되므로 사치품이었다. 중국에서는 최소 5천 년 전부터 비단을 이용했고 이후 비싼 값에 독점적으로 수출하여 큰 이득을 얻었으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싸고 귀한 물건들은 늘 그렇듯이 비단의 생산 비법 또한 밀수 대상이었다. 결국은 기밀로 유지되었던 누에 양식법이 널리 퍼져나가게 되었다. 이러한 양잠(누에 양식)은 아직도 우리에게 익숙한 지명을 남겼는데, 서울에서 누에를 치던 두 장소인 잠실과 잠원이다. 잠실의 마스코트는 무엇일까? 누에다.


5. 당시 로마는 중국을 세리카Serica 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그리스어로 비단이라는 뜻에서 온 라틴어다. 이것을 보면 중국에서 오는 비단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다. 비슷하게, 페니키아라는 명칭을 보면 로마 제국이 페니키아에서 오는 보랏빛 염료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페니키아는 ‘보라색’ 이라는 뜻에서 왔다. 뿔고둥의 점액을 채취해서 보랏빛으로 염색했는데, 1g 의 안료를 위해 고둥 1만 마리가 필요해 엄청난 사치품이었다. 로마 귀족과 황제의 옷이 보라색이었던 것이 여기서 유래한다. 아직도 이 염료를 만들던 해안 일부에서는 뿔고둥 껍데기가 굴러다닌다고 한다).


6. 이렇게 노동집약적이고 얻기 힘든, 귀중한 자원이었던 옷감은 그래서 납세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우리 나라를 예를 들어 보면, 삼국시대 고구려에서도 곡식과 노동력에 더불어 옷감을 세금으로 거둔 기록이 있으며, 조선 후기까지도 삼베를 짜 세금으로 납세하였.


7. 직조 과정 본질적으로 로로 놓인 실(씨실)과 세로로 놓인 실(날실)을 서로 위아래로 교차시켜 가며 평면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예전에는 일일히 손으로 하나하나 엮었지만, 인류는 베틀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날실을 교차로 움직이게 하고, 이 사이에 씨실을 옮긴 후 날실을 다시 교차하는 방식으로 효율성을 높였다. 이 때 씨실을 묶어서 날실 사이로 '왔다갔다' 하는 것을 영어로는 셔틀shuttle, 우리말로는 북이라고 부른다. 런 직조물을 textile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짜다' 라는 어원에서 왔다. 재미있게도, 여기서 text라는 말도 왔다. 무언가 적힌 것은 생각과 이야기를 조화롭게 '짜 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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