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율이 Dec 28. 2021

대학병원 인턴 기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 이야기.

의사가 평생 못 잊는 환자.


외과 근무를 할 때였다.

외과는 병동 일이 많은데 수술장도 왔다갔다 해야 하기 때문에 힘든 편에 속한다.

인턴은 여유가 있으면 한없이 친절할 수 있지만, 바빠서 환자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하기도 한다.

그저 해야 할 일들을 빠르게 처리하고 지나갈 뿐이다.

그렇게 해도 제 시간에 일을 다 끝내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당직이 있던 날이었다.

정규 업무를 꾸역꾸역 끝내자마자 당직 콜이 왔다.

"인턴 선생님, 52병동인데요. O병실 O번 환자 ABGA좀 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ABGA는 동맥에서 피를 뽑는 술기다.

건강검진이나 신체검사 등에서 피를 뽑는 것은 정맥을 통해서다.

대개 정맥혈 채혈은 팔의 위쪽에 고무끈을 묶어 피가 고이게 한 후 탱탱하게 부푼 정맥을 만지거나 눈으로 보고 찌른다.

반면 동맥은 손목에서 맥박을 만져 찌른다.

동맥이 정맥보다 깊이에 있기도 하고, 팔보다는 손목이 통감에 예민하기 때문에 동맥혈 채혈은 정맥에 비해 아프다.

아니, 인턴이 하는 술기 중 가장 아픈 술기에 속한다.

그리고 웬만큼 숙련되기 전까지는 ABGA를 한 번에 성공시키기가 어렵다.

피부를 뚫을 때가 가장 아프기 때문에 한 번 찔러서 실패하면 바늘을 피부 바로 밑까지 뺐다가 방향을 바꿔가며 다시 찌른다.


고통을 주는 술기이고 실패할 경우 여러 번 해야 하는 술기이기 때문에, 인턴 초반에는 ABGA가 무섭다.

ABGA와 관련해서는 수많은 일화들이 있다.

따끔해요, 하고 손목을 찔렀는데 찌르자마자 환자에게 머리를 뚜드려 맞았다는 이야기,

찌르고 차마 글로 쓸 수 없는 심한 욕을 들었다는 이야기,

의식이 떨어지는 환자가 손톱으로 인턴의 팔을 그었다는 이야기 등.

나 역시 ABGA를 하면서 맞은 적도, 욕을 먹은 적도 있다.


외과 근무를 하던 때는 초반이었기 때문에 아직은 ABGA가 익숙하지 않았다.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ABGA 키트를 세 개 정도 챙겨서 병실로 들어갔다.

환자는 사십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환자였다.

병동 대부분의 환자들보다 풍채가 크고 건장했다.

선이 굵은 얼굴이었다. 적당히 그을린 피부에 짙은 눈썹과 뚜렷한 눈매.

단단해 보였다.

옆의 보호자 침대에는 가녀린 환자의 아내가 앉아 있었다.

병원 침대


환자가 침대에 앉아 테이블을 꺼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대로 진행했다.

한 번에 성공시킬 자신이 없었고,

미리 죄송스러운 마음에 환자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티가 났나보다.


"선생님, 한 번에 해 주셔야돼요."


안돼!

경험상 이런 말을 들으면 긴장해서 실패한다.

망했다.

기가 확 죽어버렸다.

해보지도 않았는데 이미 주눅이 들었다.


그래도 환자가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긴장을 풀어보려고 농담을 던졌다.

"한 번에.. 저 키트 세 개나 가져왔어요."


적절하지 못한 농담이었다.

환자 표정이 굳었다.

단단한 얼굴이 굳으니 더 무서웠다.

아차차, 얼른 환자의 눈을 피했다.

하. 글렀군. 뭐하냐 임하윤.


ABGA 키트


키트 하나를 열었다.

다행히 맥박은 잘 만져지는 편이었다.

신중하게 맥박이 만져지는 부위를 표시했다.

찌를 부위를 알코올 솜으로 소독했다.

제발.

푹,

찔렀다!


역시, 혈액은 나오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피부 밑까지 바늘을 이동시켰다가 방향을 바꿔 다시 찔렀다.

환자의 손이 고통스럽게 오므라들었다.

하.

여전히 나오지 않는다.


식은땀이 등을 적시기 시작한다.

환자의 일그러진 얼굴을 마주치기가 두렵다.


"아프시죠.. 죄송해요.. 제가 한 번만 더 해보고 안 되면 다른 선생님 불러드릴게요.."

고개를 푹 숙여 손목에 눈을 고정시킨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이제 욕이든 호통이든 비난이든 미숙함에 대한 벌을 받을 차례다.

눈을 질끈 감는다.

"어차피 피부 뚫을 때만 아프고 그 다음부터는 안 아파요. 그냥 끝까지 선생님이 하세요."

단호한 목소리.


어, 이 환자 피부 뚫을 때 제일 아프다는 걸 아는 것을 보니 병원에 오래 다닌 환자다.

그간 인턴들을 얼마나 많이 대면했을까.

망했다.

처음부터 내 미숙함이 만천하에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어라,

근데 어딘가 이상하다.

분명 자상한 말투였다.

위화감에 환자 얼굴을 올려다 봤다.

분명 얼굴은 고통에 잔뜩 찡그린 채로 손목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말투는 자상하고 단호하다.

초보 인턴들을 단호한 목소리로 격려해 줄 수 있게 되기까지 어떤 가시밭길을 걸어왔던 것일까.


옆에 앉아 있던 보호자가 "그래도 아프잖아. 적게 아픈게 낫지, 이 사람은." 한다.

보호자는 당연하게도 환자의 고통을 걱정했다.

하지만 나를 배려한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말투였다.


끝까지 내가 하라고?

이렇게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이 내 미숙함으로 인해 고통 받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다.

아니, 그 어떤 사람이라도 내 미숙함으로 인해 고통 받게 되는 일은 괴롭다.


인턴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즈음 깨달은 사실이다.

내가 미숙하면 누군가가 고통받는 것. 그게 이 직업의 본질이다.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끝까지 내가 하라고 하니까 어떻게든 성공시켜야 한다.

근데 더 이상 고통을 주기는 죽어도 싫다.

순간, 다른 인턴을 부를까, 생각했다가 곧 지워버렸다.

환자의 마음을 무시하고 싶지 않다.


그래. 너가 해야 돼, 하윤아.

그럼 이 주눅든 마음부터 어떻게 하자.

도망갈 생각 하지 마.

자신 없으면 안 돼.

무조건 성공시킨다.



정신을 가다듬고 단호하게 동맥 방향으로 바늘을 찔렀다.

하.

드디어 나온다.

새빨간 동맥혈이 키트를 가득 채웠다.


"되잖아요. 다음부터는 자신감 갖고 하세요."

환자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다정한 얼굴이었다.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띈, 단단하고 다정한 얼굴.


환자의 커다란 마음씨에 순간,

매순간 노심초사하는 어리숙한 사회초년생 임하윤이 튀어나올 뻔했다.

평소에는 하얀 의사 가운 속에 꼭꼭 숨겨 놓는.


잔뜩 긴장했다가 긴장이 풀려서인지.

환자에게서 바늘을 빼다가 그 바늘에 그대로 손가락을 찔려 버렸다.

환자는 B형 간염을 앓고 있었고, B형 간염은 혈액을 통해 전파된다.

만성 B형 간염은 간암으로 이어질 수 있다.

즉, 환자를 찌른 바늘로 나를 찌르면, B형 간염이 전염되어 결국 간암까지 이어질 수 있다.


"아!"

예상치 못한 통증에 놀라 외마디 비명이 새어나왔다.

에이, 별 문제 안 생기겠지, 생각하려는데,

환자가 갑자기 당황한다.

다정했던 환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는다.

"어! 안되는데? 선생님! 빨리 가서 도움 청하세요! 지금 빨리 가세요! 그거 그냥 놓고 가세요!"

다급하게 내 손에서 키트를 빼앗는다.


B형 간염에 대한 걱정은 저 멀리, 대신 마음이 뭉클하게 벅차올랐다.

잔뜩 차오른 따뜻한 것이 입 밖으로 넘쳐나와 웃음이 터졌다.

"헤헤."

환자가 뭐야, 왜웃어, 하는 눈으로 쳐다본다.

환자도 보호자도 어이 없어하며 웃음을 터뜨린다.

"아니, 빨리 가세요, 선생님."

"네. 안녕히계세요. 감사해요 안강역님(가명)."


병실을 빠져나가 환자의 라벨(환자의 고유식별번호와 이름이 적혀 있음)을 챙겨 감염관리실에 전화를 했다.

환자의 이름과 번호를 말해주고 주사바늘에 찔렸음을 알렸다.

감염관리실은 환자 정보를 조회해 보더니,

인턴 시작하기 전에 했던 검사 상 B형 간염 항체가 충분해서 괜찮다고 했다.


새하얀 의사 가운 속에 감춰진 어리숙한 나를 바라봐준 안강역 환자를 생각하며 반성을 많이 했다

사이즈도 잘 맞지 않아 후줄근한, 병원 이름이 수없이 박힌 똑같은 환자복들 그 속에,

각자 병마와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겁에 질린 환자들을

나는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 나는 이번 달에 한 번이라도 환자의 눈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있는가.


한동안 안강역 환자의 라벨을 핸드폰 케이스 안에 부적처럼 넣고 다녔다.

라벨은 핸드폰 케이스를 바꾸면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지만,

안강역 환자의 이름 석 자와 그 날의 많은 감정들은 고스란히 남아

어느 날은 하루를 버티는 힘이 되기도, 어느 날은 스스로를 다그치는 채찍이 되기도 한다.


감사한 일이다.



제 글을 좀 더 가볍게 웹툰처럼 읽고 싶으신 분들!

인스타에도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아이디는 baby_doctor_ha입니다.

https://www.instagram.com/baby_doctor_ha 

많이 놀러와 주세요!

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응급실에서 의사의 하루는 또 이렇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