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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나 Sep 11. 2024

이번에는 정신없이 계단을 올랐다.

R은 나의 일정이 있는 곳으로 오겠다고 말했다. 시간 차를 여유있게 뒀어야 했는데, 헤어질 때까지 시간이 많지 않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앞선 일정을 소화하자마자 식당으로 달려갔는데, 1층에 있는 입구를 보지 못하고 윗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낯선 사무실 뿐이었다.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나는 아침 일찍 집에서 나왔기 때문에 우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점심 때의 날씨는 조금씩 개이고 있었다. 산만하게 접었던 우산을 다시 털면서 건물 밖으로 나왔다. 우산의 끈을 둘러 단정하게 정리하고 싶었지만 이미 약속시간에 늦은 터였다. 1층 현관을 둘러보니 화려한 색으로 칠해진 문이 R과 만나기로 했던 식당의 입구였다. 문을 열자 끝자리에 앉아있는 R이 보였다. 나는 마른 입을 손으로 한번 쓸고 안으로 들어갔다.


목소리에 힘을 주고 그를 불렀다.

"R, 오랜만이야."

R은 짐짓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 바람에 R 앞에 놓여있던 젓가락 중 하나가 식탁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우산을 바닥에 털썩 내려놓으며 새로운 젓가락을 가져다 줄 직원을 찾았다. 새로운 젓가락과 메뉴판을 전달 받은 우리는 뜨거운 국물이 있는 쌀국수를 주문했다. 그런 뒤에, 우리가 보지 않았던 수년 간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전공을 살려 강의를 시작했다. 나는 세 번의 이직과 그보다 좀 더 많은 이사를 경험했다. 그 생각이 나자 R에게도 물었다.

"아직 그 동네 살아?"

"응, 여전히. 한때는 좀 질렸었는데, 지금은 좋아."

그 뒤로도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던 수년 간의 공백이 이명처럼 다가와 도저히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자신의 최근에 대해 열띤 표정으로 말하는 R을 공들여 보는 수 뿐이었다.


많이 씹지 않고도 충분히 먹을 수 있는 메뉴를 고른 것이 참 잘한 일이었다. 창문에 맺혀있던 빗방울이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더 이상 바깥에 비가 오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R에게 말했다.

"카페 갈까?"

R은 그러자고 했고, 내가 바닥에 철푸덕 놓인 우산을 집어들고 겉옷을 챙겨입는 동안 카운터로 가서 계산했다. 나는 여유있는 걸음으로 뒤따라갔다.

"이따 정산해줘. 카페까지 한 번에 보내도 돼?"

R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먼저 나섰다. 내가 찾아 둔 카페로 안내하겠다며 지도 어플을 켜는 사이 그는 내 팔에 자신의 팔을 끼워넣고 걷기 시작했다. 한 블럭을 걸은 뒤 코너를 돌고 또 다시 두 블럭을 걸었다. 해사한 볕이 카페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빛의 그림자를 따라 밟듯 공간으로 들어갔다.


"뭐 좀 더 먹을래?"

내가 물었다.

"너 먹고 싶은거."

R이 답했다.

서성이던 우리는 앙버터를 하나 집어들었다.

두사람 모두 빵을 먹지 않았다.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진 것을 내가 먼저 집어들었고, R이 여전히 커피만 홀짝이는 것을 보며 가능한 열심히 씹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진짜 오랜만이잖아."

"그러게, 몇 년 만이지?"

"4년. 나 첫직장 다닐 때가 마지막이니까."

"벌써? ...그러네. 시간이 그렇게 지났구나."

R은 자신에게 시간 감각이 잘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우리가 현재에 있다는 것을 감각하려고 애썼다.


"있잖아. 우리는 싸운 것도 아니고, 그렇게 친했는데 왜 헤어지게 된 걸까?"

나는 조심하며 물었다. 그러자 R은 쾌청하게 답햇다.

"그러니까!"

정말로 아무런 일이 없었던 듯이, 시간이 하나도 흐르지 않은 듯이. 전처럼 지낼 수도 있을 것만 같게 만드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나는 우리에게 지표가 될 만한 중요한 사건들을 몇 짚어냈다. 수년을 보내는 서로의 마음이 어땠는지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때문에 모든 일을 다 따져묻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런 일은 이후에 해도 되는 것이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그리움을 늘 지니고 사는 것 같다. 우리가 같이 겪은 20대 초반이 너무 아름다워서. 이제는 그런 시절을 맞이하지 못할 것만 같아."

말하는 순간에 알게 되었다. 잃어버린 것 같던 조각 중 많은 것이 R의 존재에 파편처럼 붙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뭇 우습고 애석했다.


R은 몸을 앞쪽으로 기울여 답했다.

"나도. 언젠가부터는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친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 충분히 잘 지내는 데도 말이지."

예정했던 시간보다 늦게 자리에서 일허았다. 머지 않은 때에 다시 보자고 말하며 인사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노을이 지는 풍경을 봤다. 스무살 무렵 들은 R의 이야기가 스쳐 지나갔다.

"난 노을을 보면 슬퍼. 외로웠던 기억이 떠올라서."

우리가 함께 살던 집의 화단에 앉아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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