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가 더 좋은 주인이 되고 싶게 해 - 02
개춘기가 한참 심하던 때였다. 강아지의 이런저런 문제들을 상담하던 훈련사는 나의 반려견 하쿠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말을 듣는 척할 뿐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 내 지시를 근본적으로 따르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꼬질한 어린 강아지를 강아지 꼴 갖추게 하는 데 급급했던 지난 1년의 콩깍지가 다 빠지지 않은 나는 물었다. 하지만 저희가 손을 드는 척만 해도 겁에 질려서 파르르 떠는걸요? 그는 대답했다.
“다 연기하는 겁니다.”
그 날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갔다. 영악하다, 라는 말은, 모범생으로만 살아와 이렇다할 일탈이 손에 꼽을 정도였던 나로서는 돌이킬 수 없는 낙인 같았다. 보더콜리는 똑똑해서 주인 머리 위에서 논다더니 그게 이런 말이었을까?
너무 사랑해준 게 문제라는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과 별개로 당시 하쿠의 행실은 꽤나 골칫거리였기 때문에 나는 보다 엄한 주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예뻐하는 것도 최소화하고 말을 조금이라도 듣지 않으면 냉정하게 모른체 했다. 그렇지만 하쿠와 내 표정 모두 어두워지는 이 길이 맞나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개에게는 소위 서열을 잡아야 한다거나 주인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방향으로 훈련이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지만, 하쿠 같은 강아지를 잠시라도 본다면 개를 혼내서 내 말을 듣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혼난다’는 것이 뭔지도 모르고, 혼이 나더라도 본능이라는 알량한 단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강한 의지가 그를 행동으로 이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지금 하쿠와 나의 평화를 만들었나? 사실 속시원한 답은 없다. 개를 미워해봤자 소용이 없고, 혼내봤자 다음 날이면 모든 것을 잊고 웃는 강아지가 바로 하쿠다. 자식이 영악하다 해도 어쩔 수 없이 내 자식이라는 다분히 육아적인 사고가 탑재되었을 뿐이다.
내 노력보다는 강아지에게 더 빠르게 흐른 시간이 그를 철들게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좀 슬프지만 그래도 그 시간을 함께 했으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본다. 치미는 짜증을 삭여 가며 한 번이라도 더 나가서 산책을 하고, 보상이 곁들여진 훈련을 하던 순간이 하쿠의 기억에도 새겨져 있을 거라고.
무시무시한 공포로 개가 내 말을 듣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나의 ‘영악한 개’라면 더더욱 말이다. 부드럽게, 어쩌면 무력하게 매 순간을 꾸역꾸역 보내다 보면 신기하게도 조금쯤은 나아진다. 이런 수동적인 포기 선언을 함으로써 오히려 강아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불협화음이 가득한 악장도 쳐 나가다 보면 한 번은 아름다운 음이 된다. 그렇지 하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