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력한 아빠와 눈이 너무 높은 엄마

by Hazel

내가 초등학교 때 친구집에 놀러 갔었는데 걔네 아빠가 거실에 누워서 친구엄마한테 과일을 깎아오라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봤다.


나에게 정말 문화충격 그 자체였다. 왜냐면 우리 집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는 아빠가 거실에 누워있지도 않고 엄마한테 뭘 시키면서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보통 셋이 함께 거실에서 티비를 보다가 나나 엄마가 뭐가 먹고 싶다고 하면 아빠가 나가서 사다 주는 게 우리 집의 흔한 풍경이었다.


나는 정말 아빠를 엄청 좋아했다. 특히, 초등학교 5~6학년때는 아빠가 타지에서 일하셔서 엄마랑 둘이서만 살고 주말에만 오시곤 했었는데 그때 엄마 몰래 아빠 방에 용돈을 숨겨놓고 내가 용돈이 떨어졌을 때쯤 엄마가 없을 낮시간에 전화해서 서랍 몇 번째 칸 뭐를 들쳐봐라 이렇게 지령을 알려주면 거기에 용돈이 딱 있었다.


나와 아빠의 너무 행복하고 즐거운 추억이었다.


나에게는 좋은 아빠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아빠는 좋은 남편이나 좋은 가장은 아니었다. 책임감도 부족했고 능력도 부족했다. 다만 이 능력이라는 건 좀 상대적이긴 하다. 어쨌든, 엄마의 기준에서는 아빠는 능력이 부족했고 우리 집을 가난에서 구해낼 수 없었고 결국 엄마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소위 좀 독한 사람이다. 돈을 단순히 많이 벌기 위한 것보다 성장해 나가면서 조금씩 발전해 나가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결국 해냈고 우리는 아파트를 사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아파트에서 사는 동안 아빠는 엄마의 기준에 들고 싶어서 무리하게 사업을 시작했다. 근데 그때가 하필이면 또 IMF였다.


내 또래의 다른 집들이 다 그러하듯 우리 집도 망했다.


그 뒤로 두 분의 사이는 정말 계속 좋지 않았다. 두 분은 정말 많이 싸우셨는데 근본적으로 엄마는 아빠의 무능력과 자격지심을, 아빠는 엄마의 무시하는 언행을 이유로 싸웠던 것 같다. 엄마는 스스로 공부해 가며 사업을 늘려나가면서 우리 집 사정은 조금씩 나아졌지만 내가 24살 되던 해에 두 분은 이혼하셨고 나는 자연스럽게 내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 주는 엄마와 살게 되었다.


엄마의 인생의 목표는 나를 공부시켜서 성공하게 하는 것이었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내 공부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는데 공부만 시키면 좋은 집에도 시집가고 풍요롭게 살 거라고 생각했다. 뭐 그렇다고 외적인 것에 관대했냐? 그것도 아니었다. 공부도 잘해야 하고, 예의도 있어야 하고, 사람들 배려도 해야 하고, 늘 여유가 있어야 하고, 당연히 어느 정도 예쁘기까지 해야 좋은 집안에서 너 하나 보고 데려가서 며느리 삼을 거라는 말을 정말 많이 했다.


또, 나중에 자기 사위는 최소 검사나 의사, 외교관 같은 거 일거라고 생각했다. 사짜 들어가는 직업의 사위를 원하는 엄마가 막상 본인의 배우자는 형편없다고 생각하니 자존심 상하고 사람들한테 창피했을 테니 엄마와 아빠가 싸우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엄마 본인의 못 이룬 꿈, 부족하고 창피했던 점들을 나를 통해 바꾸고, 보상받고 싶다는 것이 엄마랑 나의 자아가 분리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나에게 아빠란 혹은 남자란, "여자보다 당연히 능력이 부족하지만 가정적이고 착하다"가 디폴트였다. 또 여자는 "기본적으로 남자보다 잘났고 좀 이기적이다"가 디폴트였다. 우리 집이 그랬으니까.

다만, 아빠를 통해서 자격지심이 있는 남자와는 자주 싸울 수 있으니 자격지심이 없는 남자를 만나면 되겠다.(능력은 당연히 내가 더 나을 것이니)


하지만, 세상에 자격지심이 없는 남자, 아니 사람 자체가 정말 진짜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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