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나 사이의 채무관계

by Hazel

어릴 적부터 엄마는 내 공부를 자신의 인생 성공의 척도로 여겼다. 마치 내 성공이 곧 엄마의 성공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엄마는 공부를 해야만 하는 이유, 공부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이뤘을 때의 영광과 명예를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그러면서도 가끔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너 공부시키느라 내가 얼마나 썼는 줄 알아? 14억쯤 될걸"

어떨때는 12억, 15억, 20억 항상 달랐다. 엄마에게 그건 농담처럼 보였겠지만, 나는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엄마가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지 알아달라는 의미였겠지만, 그 속엔 내가 반드시 그 돈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도 깃들어 있었다.


그 결과, 나는 내가 엄마에게 빚을 진 것이라 생각했다.
나중에 꼭 돈을 많이 벌어서 갚아야만 한다고, 엄마가 원하는 직업과 사회적 지위를 갖추고 보상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10억이라는 돈을 갚으려면 적어도 50대는 되어야 할 텐데, 그때까지 엄마의 '빚 독촉'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이런걸로 스트레스는 받는 내가 불효자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 빚은 단순히 금전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내가 틱틱대고 상냥하지 않고 짜증 내는 말투로 엄마에게 상처 준 빚, 다른 딸들처럼 더 살갗게 굴지 않아서 서운하게 한 빚, 엄마가 원하는 어른이 되지 못한 빚 등등 나는 너무나도 빚이 많았다.


엄마는 나를 위해 많은 희생을 했고, 나 역시도 그 점을 알고 있었다. 엄마 덕분에 돈 걱정 없이 공부하고, 유학도 다녀왔으며, 여유로운 대학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 모든 혜택의 대가는 '엄마를 만족시키는 삶'이었다. 엄마가 원하는 직업, 엄마가 기대하는 사회적 위치, 엄마가 바라는 사윗감. 이 모든 것이 나의 '도리'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심리상담과 다양한 책들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았다면 양육과 교육은 부모의 의무라는 점이다. 그것은 자식에게 갚아야 할 빚이 아니라, 부모로서의 기본적인 책임이다.


엄마가 나를 공부시키고 뒷바라지한 것은 엄마 자신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내가 유학을 가서 공부를 하고 어떤 대단한 직업과 사회적 지위를 가질 것이라는 엄마의 기대가 내가 반드시 갚아야 할 의무는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는 마치 내가 '정서적 빚쟁이'인 것처럼 만들었다.

“나는 너를 위해 내 인생을 헌납했으니, 너는 나의 자랑이 되어야만 한다.”

"너를 위해 그렇게 희생하고 노력했는데, 넌 왜 이것밖에 되지 못했니?"
이 메시지는 죄책감과 무력감으로 나를 짓눌렀다.


그러나 정말 마음을 정리하고 천천히 생각해보면 이 정서적 빚은 아예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다. 빚을 지고 있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엄마라는 걸, 내게 정말 사과하고 그걸 내가 받아들일수있을때까지 기다려줘야하는 사람은 엄마라는 걸 이제는 깨달았다.


내가 부모의 보살핌이 가장 필요했던 시기에 엄마는 바쁘다는 이유로 날 보살피지 않았다.

밖에서 일하느라 너무나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린다는 이유로 그 스트레스를 나에게 풀었다.

엄마가 원해서 나를 낳지 않았다는 것을 계속 나에게 주입시켰다.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엄마에게 인정받지 않으면 나는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을 키우게 했다.


이 모든 것은 나에게 평생의 트라우마와 공포심을 남겼다 아무리 무덤덤해지려고 해도, 잊어버려고 해도, 금세 다시 떠오른다. 이제는 엄마가 날 버리는 게 아니라 내가 엄마를 버릴 수 있는 시기가 되었음에도 나는 엄마가 무섭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사랑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부모의 희생이 자식에게 무조건적인 빚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 그건 또한 부모의 선택이었으며 그 기대와 실망도 모두 본인의 것인데 자식의 탓을 하는 건 말이 안되는 거다.


엄마의 희생에 감사하지만, 그것이 나의 자유와 행복을 담보로 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앞으로는 내가 진 빚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가고 싶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무능력한 아빠와 눈이 너무 높은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