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포기할 줄 모르고 ‘잠깐만, 마리나..’ 하며 따라 붙는 소피를 무시하려 애쓰며 계단을 바삐 올라가는데... 발 걸음이 약간 꼬이는 듯하다 왼쪽 힐이 삐그덕 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최대한 신경을 쓰면서 걸음을 딛는데 등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지금 이 상황에서 힐이라도 부러진다면 그 무슨 창피인지...
무작정 계단을 다 오르고 난간에 섰는데 샴페인 잔을 새로 하나 받아 든 소피가 눈맞춤을 하며 계단을 오르는 것이 보인다. 저 여자가 기필코 오늘 내 이혼에 대해 사견을 늘어놓을 모양이다. 일단 누군가와 대화를 해야 저 여자와의 쓸데없는 잡담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돌아보니 다들 짝을 지어 대화를 하느라 심각하다. 그래도 좀 만만하게 말을 걸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싶어 찬찬히 다시 한번 돌아보는 사이에 샴페인을 든 도둑 고양이는 또 옆에 와 있다.
“주최자와 아직 대화하기 전이죠? 디노씨는 아까 보니 리처드씨와 한참 얘기중이더라구요. 그나저나 마리나, 내가 긴히 물어 볼 것이 있었는데... 그게 사실이에요? 아랄도와...”
“마리나씨! 한참 찾았습니다. 여기 계신 줄 모르고 1층을 헤매다 정원까지 나가봤지 뭡니까. 하하. 기획안 얘기를 좀 자세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좀 전에 둘러보았을 땐 눈에 띄지 않던 디노 발레스트라가 어느 새 옆에 와서 말을 걸고 있었다. 보통은 대화를 방해한 것에 대한 사과로 말문을 여는 것이 상식일 텐데 그는 마치 눈 앞의 소피는 투명인간인 것 처럼 행동하고 있다. 역시 건방진 태도가 몸에 밴 사람이라 생각하면서도 왠지 마음 한 구석은 시원하다.
“오. 디노, 오랜만이에요. 지난번 일본 문화원 설립 행사에서 잠깐 뵌 이후 처음이죠?”
남자앞에서는 더욱 높은 목소리를 내는 소피가 거의 쇳소리에 가까운 하이톤으로 과장되게 인사를 건네보지만 디노는 그런 그녀를 흘끗 보는둥 마는둥 하고 여전히 내쪽으로 몸을 향한 채 말을 이었다.
“좀 조용한데서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다큐멘터리 건 말고도 흥미가 가는 기획이 있습니다만... 소피씨. 그럼 다음에 뵙죠.”
순식간에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소피에게 인사를 빠르게 건넨 그는 내 팔을 가볍게 잡으며 옆으로 이어지는 복도쪽으로 인도했다. 부러 소피의 얼굴을 보진 않았지만 화가 나 어쩔줄 몰라하고 있을 그녀의 얼굴이 눈에 선해 나도 모르게 걸으면서 미소가 슬며시 새어 나왔다.
디노가 열어준 복도 끝 쪽 방은 잘 정돈되어 있었지만 사람이 사용하는 방 같지는 않았다.
방 한 복판에 놓여있는 17세기 풍의 긴 소파에 자리를 하고 그가 맞은편에 앉기를 기다리는데 그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소를 띄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서 있었다.
“저녁 내내 아무것도 요기가 될 만한 것을 드시지 않던데 잠깐 간단하게 먹을 것들을 챙겨오도록 하죠. 한참 얘기를 해야 할 텐데 시장하면 곤란하니까요.”
그제사 나는 도착한 후 음식이 차려져 있던 부페석 근처는 가지도 않았던 것이 기억났다.
입맛은 없었지만 호의를 거절하기에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나를 방 안에 두고 그는 곧 돌아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소파는 지내온 세월이 무색하리 만치 편안했다. 아까 삐걱거린 왼쪽 힐을 벗어 살펴보니 다행히 당장 부러질 것 같진 않았지만 걸을 때 조심해야 할 상황이다. 어차피 디노 발레스트라와 얘기가 끝나면 곧장 호텔로 갈것이니 상관 없겠지...
피곤했는지 편안한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으니 자꾸 눈이 감겨오는 것을 애써 참고 있는데 드디어 한참 만에 디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디노보다 나이가 많은 하녀장이 종류별로 잘 구색을 맞춘 음식 카트를 조용히 밀며 같이 들어선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완벽한 솜씨로 테이블을 세팅하고 음식들을 잘 놓은 후 여전히 뒷모습은 보이지 않은채로 카트를 끌고 방을 나선다.
“일단은 좀 드시죠. 드시기 전에는 일 얘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아뇨... 허기가 지면 제가 알아서 먹을테니 일단 바쁘시니까 일 얘기를 시작하시죠.”
“... 본인 몸 관리도 제대로 안 하는 프로듀서를 믿고 투자를 하기란 위험하죠. 성의를 봐서라도 좀 드시죠.”
그는 이상하게 완강했다.
무슨 상관이람... 하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딸기타르트를 입에 집어 넣고 있다. 시금치를 으깨 넣은 라비올리도 훌륭했고, 청어 요리도 대체 레시피가 어찌되는지 궁금할 정도로 맛있다. 송아지고기를 살짝 튀긴 커틀릿도 최상이고 후식으로 준비된 이태리 정통 티라미수도 환상적이다.
한참을 먹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렇게 음식의 맛에만 집중하고 음미하면서 식사를 한지가 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디노는 팔짱을 끼고 알 수 없는 미소를 띈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낯선 남자 앞에서 평소보다 편하게 훨씬 많은 양의 식사를 하고 있는 내가 나 스스로도 이상할 지경이다.
“좋아요. 내가 적어도 마리나씨에게 불편한 사람은 아닌가 보군요. 아님 우리집 주방장이 마법의 손을 가졌던지 .. 하하”
“둘 다 인것 같군요.”
나도 멋적게 웃어 보였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는 신기할 정도로 편했고 음식도 파리의 내노라하는 레스토랑보다 훌륭했으니까...
“참, 그리고 호텔도 훌륭하고 방도 마음에 들어서 그러잖아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워낙 모든 것이 만족스러워서 일 때문에 온 것인지 여행을 온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에요 ”
허기를 느끼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꽤나 배가 고팠었는지 식사를 하고 나니 기분도 좋아지고 왠지 수다스러워 진다. 권력과 돈을 가진 거만한 남자라 생각해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던 이 남자가 불과 몇 십 분 전 소피로 부터 구해준 이후 막연히 그렇게 나쁜 남자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물론 그는 전 후 사정 모르고 언제나처럼 본인 기분대로 한 행동이겠지만...
“여기까지 오는 여정이 꽤 길었을텐데, 기차에선 뭘 했소?...당신은 지금 어떤 단계인가요? 혼자 있는 것이 편한 단계인지, 혼자 있으면 더 불안해 지는 편인지....?”
그는 애매모호한 질문을 던지고 자못 흥미롭다는 듯 몸을 앞으로 내밀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이 남자도 건너 들은 내 이혼에 대해 궁금하다는 것인데... 왠지 이 사람한테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는 내 친구도, 가족도 아닌 그저 아는 사람에 지나지 않고 내 얘기를 담아둘 사이도 아니니 아무렴 어떤가하는 생각이 든다.
“애매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