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vita è bella - 취리히의 밤(4)

by Hazelle

굳이 단계를 묻는 다면, 이미 알 사람들은 다 알아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이지만 난 아직 극복이 안 되었고, 가족들은 이젠 충분히 앓았다고 생각하고 있죠. 대놓고 내게 눈치를 주는건 아니지만, 스스로 더 이상 내색하기는 불편하달까요.

더 한심한건 우울이 습관이 되어 이젠 부러 우울하려고 애를 쓸 때도 있다는 거죠 . 하하.

그래서 기차에서도 우울하기 짝이 없는 짧으면서도 긴 책 하나를 또 읽었어요. ‘충성스러운 개’라고... 아시나요?”

“세상 일이 이치대로 되는건 아니지만, 대충 이런 법칙은 있죠. 죄를 지은 사람이 벌을 받는걸로. 상처 입힌 사람이 회개하고 사죄를 해야 하지만 그게 통하지 않는게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이 끼어들 때입니다. 객관적인 기준 따위는 대수롭지 않아요. 더 사랑하면 죄인이고 잘못한게 없어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무조건 비는거에요. 아주 궁상맞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오셨군요.”

꽤나 훌륭하다 생각했던 책을 가차없이 별 것 아니란 식으로 평가하는 그가 다시 거슬리기 시작했다.

“전 꽤나 잔인할 만큼 솔직하다 느꼈는데.. 뭐 누구나 받아들이는 것이 다를 수 있으니까요.

그나저나 새로운 기획에도 관심이 있으시다니... 어떤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군요. 전 여기 다큐멘터리 건으로 온 거라 알고 있었습니다만...”

역시 일로 만난 사람과는 일 얘기를 하는 편이 자연스럽다는 생각이다.

“전 남편의 전 처와 이런 곳에서 마주친다는 것 참 불쾌하겠어요. 제가 작성한 초대 명단에는 없었는데, 아마 본부장쪽에서 초대할 필요가 있었나 봅니다. 불편하게 해 드려 죄송하단 말을 하고 싶었어요.”

“아.. 네.. 뭐...”

그럼 아까 그가 나타나 방해한 것은 의도적이었단 얘기인가...

불편한 주제는 치우고 얼른 일 얘기를 하고 싶은데 이 남자는 도통 상관 없는 얘기들만 늘어놓고 있다. 어쨌건 이 남자는 본인이 하고 싶은대로 할 예정이니 차라리 순순하게 그가 묻는 얘기에 대답을 하는 편이 낫겠다고 포기하게 되었다.

“이 방에 사람들이 드나들 일은 없을테니 그 굽도 온전치 않은 신도 좀 벗어두고 있는 것이 어떻소?”

순간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다. 가만 보면 이 남자는 오늘 저녁 내가 식사를 하지 않은 것도, 소피에게서 도망중이던 것도, 내 신발에 문제가 생긴 것 마저 알고 있다.

불쾌한 것인지 신기한 것인지 모를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들들은 잘 지내고 있나요?”

“이미 예상을 하고 있었던 아이들 처럼 멀쩡하답니다. 그런데 자제분이 있으셨던가요?”

“아뇨. 언제고 딸을 하나 갖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만 아쉽게도 현실적으로 전 자식이 없습니다.”

“저도 늘 딸이 있었으면 했어요... 뭐 갖고 싶다고 입맛대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자식은 아니지만...”

“그러게 말이오. 당신 같은 사람이 딸이 없다는 것이 참 아쉽네요. 아주 예쁘고 참한 아가씨가 되었을텐데...”

그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별로 웃을 만한 말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린다. 디노가 대답을 하자 문을 열고 각종 브랜드 이름이 크게 적힌 쇼핑백을 한 가득 팔에 건 집사 앙드레가 역시 쇼핑백들을 한 짐 든 젊은 하인 둘을 데리고 들어왔다. 어리둥절해 있는 내 앞에 차례대로 쇼핑백에서 꺼낸 상자들을 늘어 놓고는 상자 뚜껑들을 열어 놓는다. 브랜드별로 두 세개 모델의 구두가 한 모델당 똑같이 세 켤레씩이나 있어 방 안 가득 구두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워 하는 나와는 무관하게 앙드레와 두 젊은 하인은 펼쳐 놓은 구두들을 다시 더 가지런하게 열을 맞추어 신기 좋게 정돈하고선 디노 뒤쪽에 다시 손을 모으고 섰다.

‘구두들을 이 시간에 어떻게 구한거지?’

‘내 사이즈는 어떻게 알아서...?’

‘것보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며 어떻게 대처 해야 하는지...?’

마음속에 수 십가지 질문이 혼잡스럽게 떠오르기 시작했지만 정작 입은 떨어지지가 않아 그저 맨 앞에 놓인 입생로랑 구두를 노려보고 앉았다.

“좋군요, 이게 뭐냐는 바보같은 질문은 안하는 분이니 하하. 이게 뭐냐는 상투적인 질문을 한다면 구두라고 대답하려 하고 있었습니다만 하하하”

디노는 본인의 유머가 자못 우습다는 듯 혼자 폭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돈 많은 방송국 오너에게 프로그램 제작지원비를 내놓으라고 찾아온 일개 프로듀서에게 베푸는 호의치고는 지나치지 않은가.

사심이 있어 내게 이런 쓸데없는 호의를 베푸는 것이 뻔하다 하더라도 내게 거절따위를 할 수 있는 특권은 없다. 역시 난 그의 결정에 따라 영락이 좌우되는 일개 프로듀서일 뿐이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낯선 남자가 베푸는 사치스러운 호의를 덥석 받기에는 ‘고고한 이혼녀’로써 지키고 있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살다보면 내 본심을 어떻게 잘 포장해서 상대방의 기분을 거슬리지 않고 전달하는지가 관건인 순간이 많이 있다. 이런 일방적인 그의 호의가 썩 마땅치는 않아 묘한 표정으로 천천히 그를 올려다 보자 내가 입술을 달싹거릴까 겁이라도 나는 듯 갑자기 남자는 빠른 어투로 먼저 말을 이어가기 시작한다.

“키가 있으니 작은 사이즈는 아닐거라 생각했고 내 비서가 37과 38 반 사이즈 사이일거라 추천을 했소. 까다로운 사람이니 선호하는 제품 아니고선 신지 않을거라 우려하던 차에 마침 지나가다 소피씨가 다른 사람을 붙잡고 마리나씨의 신이 입생로랑의 이번시즌 제품이라 하는 소리를 듣는 행운을 잡았지 뭡니까 하하. 그래서 입생로랑과 비슷한 류의 브랜드들로만 사오라고 했어요. 가족은 없는 대신 돈은 넘치는 사람이라 닫힌 명품샵 문을 여는 것 정도는 쉬운일이란 것 쯤은 아실테고... 맞는 사이즈의 마음에 드는 구두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난 시간이 돈보다 아까운 사람이라 나와 먼저 얘기를 한 후 내친김에 계약 관련해 내 변호인단과도 오늘 밤 협의사항을 정리까지 했으면 하는데 구두가 성치 않으니 편한 마음으로 미팅을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소. .... 그리고...”

약간 초조해 보일 만큼 빠르게 쏟아내던 말을 잠시 멈추고 그가 빤히 나를 바라본다.

그래도 이런 호의는 좀 부담스럽다고 말을 해야 겠다 생각하는데 내가 입을 떼는 것과 동시에 그도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에잇 참. 이런 변명 따위 서툰데다가 말을 더 할 수록 우스워만 지겠다는 기분이 드는군요.

그래요. 당신을 3년 전 우연히 본 이후 잊을수가 없었죠. 분명 따뜻해 보이는 사람은 아니지만 차가운 얼음속에 분명 화산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 임자가 있는 사람이라 잊어보려고도 했지만 이후 고작 세 네번 더 본 것이 다인데 더 궁금하고 더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비열하지 않을 만큼만 노력해 가까이 다가가려 했는데 적어도 이젠 남의 여자를 탐한다는 죄책감은 덜수 있어 어찌나 기쁜지... 그래서 내 마음대로 이런 짓부터 하게 되었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생각하진 않고 있지만, 그래도 혹시 불쾌하다면 일단 사과부터 받으시오. 대신 구두를 물리지는 말고... 돈쓰고 초라해지는 꼴은 너무 불쌍하지 않겠소? 어린 나이의 사람들도 아니니 하던대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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