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vita è bella - 취리히의 밤(5)

by Hazelle

그의 말을 들으면서도 애써 거절과 반박의 문장을 속으로 만들고 있었지만 마지막에 그가 한 ‘어린 나이의 사람들도 아니니 하던대로 합시다!’란 무슨 뜻인지가 자못 궁금했다.

결국 나는 속으로 대 여섯개 준비했던 세련된 문장을 다 잊고 다짜고짜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하던대로 하자는것은..?”

“음.. 좋은 집안에 아름답고 우아한데다 머리까지 좋은 당신은 항상 주위가 구애하는 남자들로 들끓었을 것이오. 남자란 동물은 대부분 도전해 봄직한 상대에게만 열을 올리는 법이니 당신의 관심을 끌고자 했던 남자들은 대충 돈과 능력이 있었을테고... 이런 선물쯤이야 신물이 나도록 받았을것 아니오? 아무리 오랜기간 한 남자의 아내로 있었던 터라 이런 기분과 상황들을 잊었다 하더라도 이미 당신은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본인은 손해보지 않는 법 따위는 알고 있을거란 얘기요. 이런 선물쯤 받는다해서 이 남자의 마음도 같이 받아야 하나 하고 고민하는 촌뜨기는 아닐테고 나도 힘과 돈으로 여자에게 구애하는 것이 쉬운 사람이니 주는 법과 받는 법을 잘 아는 사람들 답게 하자는거에요.

당신은 그냥 받으세요. 구두를 신는 순간부터 내 마음도 함께 받아야 되는지 따위는 생각하지 말고...”

모르는체 하는 것이 진짜 모른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가 어느정도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그가 말했듯 관심을 받는것에 ‘익숙한’ 사람이 저절로 가지게 되는 또다른 감각기관에 의해 감지하고 있었다. 대부분 그런 관심이란 내가 아는 척을 해 주는 순간부터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라 부러 모르는척 하고 지날 때가 많을 뿐이다.

“38사이즈가 제 사이즈에요. 나머지 두 사이즈는 반품하세요. 또 다른 여자에게 재활용할 생각이 아니라면... 입생과 장폴고띠에, 샤넬, 루부탱은 두시고 루이비통,에르메스,디올과 구찌는 돌려보내세요.”

“참 세련된 답이에요.”

그가 얼떨결에 쏟아냈던 고백에 대해서는 아는체 하지 않았고 그도 더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일 얘기로 넘어가며 대화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다큐멘터리 건 얘기를 먼저 시작했지만 이상하리만치 별 질문이 없다. 그 사이 방을 나갔던 앙드레가 이미 사인이 끝난 계약서를 얌전히 가져다 놓는다.

“다큐 건은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첫 시도도 아니고 이미 성공적이라 시리즈별로 나오는 기획이니 이번에 저희가 참여할 기회를 준 것에 감사합니다.

내가 따로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기회가 없는 천재들을 지원’하는 프로젝트에요. 이미 마리나씨가 그런 일을 하고 있는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프랑스란 나라는 누구에게나 매력적인 모양인지 예술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큰 꿈을 품고 파리에 입성한다. 몽마르뜨 언덕을 가면 그림 좀 그린다는 화가들이 하나같이 낡은 이젤을 놓고 관광객을 그리기도 하고 매일 봐서 지겨울 법도 한 몽마르뜨 언덕을 그리기도 한다.

그들은 그림을 정말 잘 그리는 사람들이지만 그들 중 조금 더 특별한 누군가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따금 있다해도 이민자라서, 주류가 아니라서, 또는 그를 알아봐 주는 누군가를 만나지 못해 그들은 하루하루 몽마르뜨 언덕에서 늙어가고 있다.

내가 빌리를 만난 것도 몽마르뜨 언덕에서였다. 그는 한 꼬마손님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대부분 천편일률적으로 사진마냥 흡사하게 그리는 초상화 화가들 사이에서 그는 특이하게도 꼬마손님을 꼬마 코끼리로 표현하고 있었다. 사진같이 정교한 초상화를 기대했던 꼬마의 부모가 황당해하며 잔뜩 듣기싫은 소리를 늘어놓고 자리를 떴지만 그는 동요하지 않았고 여전히 즐거운 듯 휘파람을 불며 새 종이를 이젤에 끼우고 있었다. 나는 주인이 거절한 갈 곳 잃은 꼬마코끼리 그림을 그에게 200유로를 건네고 사 왔다. 이후 그를 다시 찾아 새로 기획중인 애니메이션 작업을 맡겼다.

준코는 에르메스 수석디자이너가 되겠다는 포부를 안고 파리로 왔다. 에스모드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비주류 아시안을 받아주겠다는 디자인 하우스가 없어 동네의 작은 부띠끄에서 수선을 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우연히 코트를 맡겼을때 그녀는 코트가 여러 벌이라면 이 코트는 좀 짧게 잘라 아방가르드한 재킷으로 바꿔보면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제안을 해 왔다. 듣고 있던 여사장이 깜짝 놀라며 만류했지만 나는 흔쾌히 그녀의 솜씨를 허락했다.

라벨을 뒤집어 보지 않으면 마르니인지 랑방인지 헤깔리는 패션계에서 그녀는 운이 따라주지 않는 천재였다. 천재는 대부분 소극적이고 침울하다. 그들은 고양이 같아서 그를 알아봐줄 누군가를 그저 막연하게 기다릴때도 많다. 난 준코가 콩코드 뒤쪽에 작은 부띡을 여는 것을 도왔다. 그녀가 주류가 아니라고 거절했던 사람들도 프렌치들이었지만 지금 그녀의 감각에 감탄하며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의 샵을 들르는 인간들도 프렌치들이니 아이러니하다.

어쩄건 놀랍게도 디노는 나의 이런 사적인 활동을 알고 지원을 하겠다는 이야기였다.

“기부는 여러방면으로 훌륭하게 하는 방법이 있겠지만 저는 마리나씨의 기부가 마음에 듭니다. 왜 나도 그 훌륭한 생각을 진작하지 못했나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로... 천재들을 찾아내세요. 내가 그들을 세울겁니다. 돈을 벌자고 하는 일은 아니지만 이 기획으로 전 더 돈이 많아지겠군요. 대신 불공평하지 않도록 정말 뛰어난 사람만 세우는 겁니다. 감동이 있고 성장하는 걸 보며 보람도 느낄 수 있으니 진정 멋진 기획이 아닐까 싶어요. 지분은 5대5로 하되 5년 계약으로 예술가가 사업으로도 성공을 하게 되면 전 손을 떼는 식으로 진행합시다.”

갑작스런 고백으로 혼란스러웠던 것은 잊어버릴만큼 흥분되는 제안이다.

더 많은 예술가에게 길을 열어 줄 수 있다. 한 사람을 발굴해 방송계에 일할 수 있게 하는데에는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었지만 이제 디노가 발벗고 나선다면 더 많은 사람을 더 빨리 그들이 가고자 하는 길에 놔 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자정이 넘어서까지 새 기획안을 법적으로 검토하고 협의서를 작성하느라 한참을 회의하고서야 그가 내어준 기사가 모는 차로 호텔에 돌아왔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더할 수 없이 포근하고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들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디노입니다.

내일 파리로 같이 돌아가시죠. 파리에도 거점이 있어야 겠기에 사무실을 둘러 볼 생각입니다.

그럼 내일 아침 11시에 차를 보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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