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에서의 시간은 온전히 새로운 일에 대한 계획과 내가 이미 사랑하고 있는 예술가들에 대한 얘기로만 채워졌다.
몽마르뜨 언덕에서 찾아낸 천재 만화가 빌리, 그 누구보다 빼어난 감각을 서양인이 흉내 낼 수 없는 본인만의 동양적 철학에 결부시켜 화려해도 우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디자이너 준코, 그림실력보다 뛰어난 상상력으로 기발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폴란드에서 온 샤를르... 마땅히 세상에 인정을 받아야 하지만 기회를 박탈당한 소외된 천재들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 그는 단 한번도 눈을 떼지 않고, 귀를 닫지 않고 열심히 집중하고 있었다.
새로운 인재에게 기회를 주자고 여지껏 여러 번 윗선을 설득하고자 했지만 화려한 세공이 되어 있지 않은 원석의 빛을 알아주는 이는 없었다. 세상은 우선 그들의 신분과 얼굴색을 평가하고 무서운 편견으로 그들의 천재성을 알아봐 줄 기회마저 박탈하게 마련이다.
“특히 프랑스 방송국은 겁쟁이들이죠. 그들은 이미 성공이 검증된 안전한 애니메이션들을 비싼 값에 들여와 우스꽝스러운 더빙을 입힌 후 재판매하는데 급급합니다. 사실 파리 곳곳에 미국식 사고와는 철저히 다른, 끝내주는 상상력을 가진 천재들이 널렸는데도 말이죠...
프랑스는 분명 예술가를 우대하지만 ‘자국’ 예술가에게 국한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고도 그들은 매일같이 쏟아져 들어오는 관광객들을 보고 흐뭇해 하며 국제도시의 위상 어쩌고 하는거에요.”
나도 모르게 격양되어 내 의견을 강력히 피력하며 말을 맺었는데 그는 갑자기 소리를 내며 웃었다.
“당신을 처음 본건 삼 년전이고 그 사이 기억하는지 모르겠으나 벌써 네 번째 만났소. 물론 일로만 만난 사이이니 내가 당신을 잘 안다고는 말할 수 없겠죠. 그런데 오늘 나는 완전히 새로운 마리나를 본 것 같군요.
베를루스쿠니가 왜 당신을 그리 신임했는지 알 것 같아요. 비록 그가 사람 보는 눈을 나쁘게 쓰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당신은 모르고 있는듯 하지만, 당신 역시 그 천재들 중 하나군요. 천재를 알아보는 것 또한 천재가 아니고선 힘든 일이니까... 그리고 당신이 혼자 힘들게 하고 있는 그 일도 보통사람은 생각조차 할 수 없어요.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란 귀찮은 일은 싫어하는 법이거든요. 이미 되어 있는 상품을 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직접 들로 나가 고르는 작업을 하다니...
난 타고난 돈이 많은 것이 편한적이 없었소. 내 선택도 아니었지만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했죠. 나이가 들면서 과하게 많은 재산을 가진것이 늘 불안했어요. 나누면서 내 알 수 없는 죄책감을 씻으려 했었죠.
그래서 처음 시작한 일은 굶고 있는 자들의 배를 불리는 것이었어요. 물론 그 일을 처음 시작했을땐 무척 기뻤죠.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깨달았습니다. 내가 내 돈을 나에게만 쓰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 난 내 죄책감을 덜어내고 그것에 안도할 뿐 진정한 나눔을 하고 있지는 않다고... 왜냐면, 난 내 빵이 누구의 배를 불리는지 모르오. 그저 난 돈을 댈 뿐... 또 그 빵이 얼마나 그 사람을 배 불려주는지도 잘 모르오.
그래서 오랜 기간 죄책감은 덜었으나 보람은 없었어요. 운이 좋아 가진 돈이라 하더라도 돈은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소중한 것이니 잘 써야 한다는 것 또한 생각하지 못한 것이오.
당신은 진정한 나눔을 하고 있군요. 그리고 내게 제안조차 하지 않았는데 내가 마음대로 끼어 들겠다고 해서 미안하고, 또 흔쾌히 허락해 주어 감사합니다.
파리에서 당장 재단을 세울 예정이오.”
디노는 파리에 사무실을 단장했고 이후 일주일에 한번씩 파리를 들락거렸지만 성급한 고백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다시 그것을 언급하거나 내 대답을 묻지는 않았다.
누군가에게서 고백을 듣는다는건 나도 마음이 있는 상대가 아니라면 불편하게 마련이다. 왠지 그는 기다리고 나는 미루고 싶은 대답을 해야만 할 것 같고 사람의 마음을 알고 난 후 그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대한다는 것이 쉬운것도 아니다.
하지만 디노 발레스트라는 달랐다. 그는 독촉하지 않았고 여전히 내게는 각별히 친절했으며 아무렇지 않게 선물 보따리를 수시때때로 말도 없이 배달시키곤 했다.
그와 함께 일하는 1년은 즐거웠다고 고백하겠다. 그는 여전히 특유의 오만하고 건방진 태도를 잃지 않았지만 소탈했고 가끔 덤벙대기도 했으며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박학다식하고 유머러스한 남자였다. 화를 낸 적도 언성을 높인적도 없고 우리가 발굴해 낸 예술가들이 마침내 그들만의 전시회를, 그들만의 부띡을, 생애 첫 애니메이션 상영을 하는 날은 말없이 진심을 담은 포옹을 해 주는 따뜻한 사람이기도 했다.
가끔은 내가 그를 만나러 스위스로 간 적도 있었다. 물론 일 핑계를 대긴 했지만... 그럴때면 그는 꼭 전용기를 보내 나를 데려 오고 파리로 돌아가는 길은 고집을 피워 함께 기차를 타곤 했다.
“어렸을때 예쁜 여자의 입을 보면 키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녀의 말은 들을 수 없었어요. 지금은 당신의 입을 보면 또 어떤 놀라운 얘기들로 나를 즐겁게 할지가 기대되어 견딜 수 없습니다.”
기차 안에서 언젠가 그가 내게 한 말이었다.
어느 새 우리는 동지로 친구로... 많은 말이 없이도 상대방의 생각을 가늠하는 가까운 사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 나는 꽤 오래 함께 했던 ‘채널5’(주: 프랑스 방송국중 하나, 이후 다른 채널에 흡수 통합되었다.)를 떠나 ‘프랑스2’ 채널 드라마국장으로 영입이 되었지만 여전히 미국 드라마를 선별해 수입하고 시청률에 급급하는 생활에 신물이 나기 시작했다.
디노도 여러 번 자신의 방송국에서 같이 일하자고 제의를 했지만 나는 번번히 거절했다. 그와 매일 같이 일을 한다는 의미가 반드시 공적인 관계로 국한 되리라는 자신이 없었을 뿐더러 아이들 교육문제도 복잡해 그의 제안은 늘 논외의 그것이었다. 집요한 그의 제안을 한사코 거절하기도 어려워 결국 나는 ‘프랑스 2’와의 고용계약을 재작성하여 독립 프로덕션으로써 채널에 공급하는 쪽을 택했다. 사실 최초로 프로덕션에서 임의로 채택, 개발한 프로그램을 방송국에거 검토 후 사입하는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나를 반석에 올린 ‘가제트’ 시리즈는 여전히 인기였지만 나는 좀 더 ‘코끼리 바바’ 나 ‘ 레 슈트롱프(스머프)’ 같은 프랑스 애니메이션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처음에는 고전이라 식상해 하던 방송국 사주들도 새로 재탄생 된 시리즈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국수주의라 치부 될 정도로 자국 문화에 애착이 강한 프랑스 시청자들은 새로운 스토리와 기법으로 돌아온 그들만의 만화를 반기지 않을리 없었다.
더 바빠지게 되면서, 아니 디노의 든든한 후원을 받게 되면서 내 우울증은 나도 모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다만 걸리는 것이라면 10대 아들 둘에게 쏟을 시간이 더욱 부족해 졌다는 것이었다. 시간을 자주 같이 보내지 못 해, 못내 미안해 하자 고프레도가 말했다.
“ 다시 평범한 것에 미안해 하는 엄마로 돌아와서 기뻐.”
맥스는
“엄마가 다시 기모노 귀신 장난을 쳤던 밤, 무섭기도 했지만 정말 기뻐서 한참 웃었어. 다시 재밌는 엄마로 돌아와서 기뻐.”
라며 목을 끌어 안았다.
이른 봄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그날 밤은 돌이켜 보면 특별했다. 2 년 전 갑작스레 이별을 하고 아끼던 장미나무를 다 뽑아 버렸었다. 그 화려하고 진한 향이 부담스러웠고 짜증스러웠기에...
올해 쟈끄씨에게 부탁해 다시 장미 나무를 심었을때 아이들은 조금 놀라와 했었다.
맥스는 장미가 다시 그리워진거냐 했고 고프레도는 혹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거냐고 했다. 큰 아이는 생각보다 섬세해 놀래킬때가 있다. 난 그저 우물쭈물, 냄새나는 녀석이 둘이나 되니 좀 더 강력한 향기가 필요하다 생각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고프레도는 ‘냄새나는 두 녀석에게도 완벽한 그녀에게도 필요한건 장미가 아니라 사람일거라’는 애매한 말을 한다.
저녁 설거지까지 끝낸 끌로에가 방금 집을 떠났는데 초인종이 울린다.
문을 열러 나갔던 고프레도가 황급히 내 곁에 다가와 당황한듯 말했다.
“문 밖에... 웬 신사가 엄청 좋은 차를 타고 와선 커다란 보따리를 든 비서와 함께 서 있어.
엄마한테 디노 발레스트라가 왔다고 전하라는데?”
난 원체 폐쇄적인 편이라 사람을 한꺼번에 모으는 파티도 싫고 아주 가까운 사람을 제외하곤 집으로 초대도 하지 않는다. 내 공간과 시간을 침범받을때 극도로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디노 발레스트라의 예고없는 방문은 분명 평소의 나라면 화를 내야 할 상황이지만 이 전례없는 방문이 그다지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것 보다는 그의 손에 들려있는 와인의 라벨이 오히려 궁금할 뿐이었다.
얼굴이 도화지라 말소리를 내지 않아도 이미 표정으로 갖가지 질문을 쏟아 내고 있는 아들녀석들을 억지로 밀다 시피 2층으로 올려보낸 후 그를 응접실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