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벌써 자정이 가까워졌다.
남자 친구가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먼저 가겠다 일어서면 절대 보내 줄 일 없는 동문이라는 이름의 깡패들이 남자 친구가 데리고 나서니 일언반구 토 다는 인간이 없다.
“잘 들어가고, 재회의 혁혁한 공을 기억한다면 조만간 조 앞에 와인 통삼겹 집 하나 새로 열었던데 거기서 조촐하게 저녁 한 번 쏘시면 만수무강할 겁니다~”
기억과 기록에 새겨지는 것들은 공짜가 아니었다고 항상 주장하던 강일이 오빠는 오늘도 신념대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12월 중순을 훌쩍 넘긴 시절이라 날씨는 당연한 듯 춥다. 비는 그쳤지만 기온은 더 내렸는지 후끈하던 만화방을 나서자마자 찬기가 온몸을 덮친다. 너도 나도 다 목도리에 코트 있는데 굳이 자기 코트, 목도리 벗어서 이중으로 덮어주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는 조용히 손을 잡더니 자연스럽게 코트 주머니 속에 같이 넣었다.
“올해는 제대로 된 눈이 늦는 건가…”
흘끗 하늘을 바라보던 남자가 말했다.
“기상 예보에선 이브에 함박눈이 올 확률이 꽤 된다던데?”
“흠… 원래 기상청 야유회 가는 날 비 온다던데? 하하… 어쨌건 만약 이브에 눈이 온다면 약속 없이 압구정 라리에서 여덟 시에 보자. 어때? 마치 전화조차 없었던 옛날처럼… 미리 그렇게 약속을 잡아두는 거야. 우리가 그 전날에 싸우게 되더라도… 혹은 헤어지더라도… 이브에 눈이 온다면 거기 그 시간에 보는 걸로… 어때?”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연락이 안 되더라도, 싸웠더라도… 헤어… 지게 되었더라도… 그래, 그 마지막 단서는 무척 마음에 안 들지만… 그날 그 시간에 무조건 보는 거… 좋다.
골목을 일부러 세 바퀴나 돌았다.
내가 그런 것이 아니라 남자가 일부러 자꾸 돌아서 우리 집 앞 골목만 피하는 게 좋았다. 그도 나처럼 헤어지기 싫어한다는 것을 읽을 수 있어 좋다. 잠을 못 자 내일 하루 종일 토할 지경이라도 괜찮다. 살면서 온몸의 피가 신선하게 도는 느낌… 과연 얼마나 자주 만날까. 살을 에는 추위에 태엽 풀린 인형 마냥 느릿느릿 그저 같이 있는 게 좋아 하염없이 걷는 짓을 얼마나 자주 할 수 있을까.
얼마나 걸었을까…
골목 끝 쪽에 신촌을 대충 아는 인간이면 모르는 이가 없는 라이브 카페에 한 물 간 발라드 가수가 직접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좁은 가게 안에 얼마나 많은 인간이 들어앉았는지 추운 날인데도 숨을 못 쉬겠는 모양 가게 문은 활짝 열려있고, 자욱한 담배연기에, 취한 사람들의 고성방가, 그 와중에 같이 몇 잔 걸친 듯한 오래된 가수가 입 한쪽에 한참 타 들어가 재가 고꾸라지듯 아슬아슬하게 붙은 담배를 물고 본인의 흘러간 히트곡을 기계적으로 부르고 있었다.
들어갈 생각은 없었지만 잠시 발을 멈추고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그의 노래 한 조각을 주워 들었다.
“.. 본인 노래일 텐데 반주가 어긋나네?”
“설마… 대한민국에 살았으면서 저 노래, 저 가수를 모르는 건 아니지?”
“노래는 들어본 적 있지만 가수까지 기억하진 않았어. 저 사람이 부른 거 맞지?”
남자는 반주가 어긋나는 것이 거슬리는지 약간 얼굴을 찡그린 채 대꾸했다.
“몇 만 번은 쳤을 노래를 틀리는 건 그만큼 오래 손을 놨거나 아님 정말 술에 취했거나…”
차라리 레코드 판으로 듣는 게 더 나을 법한 나이 든 가수의 라이브는 생각보다 실망스러워 걷던 걸음을 다시 재촉한다.
“피아노 했다고 했었지?”
“이 나라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자라면 대부분 만만한 특기로 하는 피아노… 딱 그 정도라고 말했을 텐데요…”
“그렇지… 그러다가 독립이라도 하게 되면 둘 곳이 없어 잊고 살게 되는 그 피아노… 흠… 그럼 안 친지도 꽤 되었겠네.”
“아우.. 당연하지. 선사시대만큼 까마득해.”
남자는 과장스럽게 손을 흔드는 나를 사뭇 장난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일도 늦게 끝나니?”
“음.. 아직 밀레니엄 버그 3차 테스트 중이라, 정시 퇴근은 불가능하고… 그래도 9시쯤엔 나올 수 있어.”
남자가 내일도 나를 만날 생각인가 보다. 얼었던 볼이 녹을 만큼 갑자기 발그스레 열이 올라온다.
“그래, 그럼 회사 앞으로 9시 10분쯤에 갈게. 이렇게 내일 볼 약속이라도 잡지 않으면 헤어지기 싫어서 온 밤을 동태가 될 때까지 걸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랬다가 밀레니엄 버그를 다 물리쳐야 하는 우리 히로인 김 대리님이 아프면 어떡해. 이제 들어가자. 진짜 데려다줄게.”
내가 딴 남자를 오빠라고 불렀을 때 남자는 얼음보다 차갑고 겨울비만큼 서늘했었다. 그런데 지금 감기 걸리겠다며 목도리를 다시 매만져주는 그의 손길은 오뉴월 햇살만큼이나 따스하다. 너무 따스해서 나 하나도 안 춥다고, 조금만 더 같이 있자고…
목구멍까지 차 오른 말을 다시 삼키며 조금 걷자, 야속하게도 어느새 집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