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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강북 중에서도 일산에 가까운 모래내라는 곳에서 태어났고, 부모가 그 동네에서 몇십 년째 쌀가게를 하는 집 둘째 딸이다. 하나 키우기도 빠듯한 형편이면서 아들 욕심은 저버릴 수 없는 부모덕에 딸 셋, 아들 하나… ‘아 그러니까 위가 딸 셋이지?’라는 함축적인 질문을 받아야만 하는 그런 집 둘째 딸. 그 귀한 아들 대학 보내느라 위의 딸 셋은 일찌감치 돈벌이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뭐 그닥 뛰어나게 공부를 잘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좀 있는 집안에, 아니면 좀 없어도 ‘외동딸’이었다면…
대한민국에서 초등학교만큼이나 흔해빠진 대학이란 곳을 갔을 거다. 인수분해 전에 화장하는 법, 앞 머리 고슬리는 법을 먼저 배웠고, 여상을 갔더니 다들 목숨 걸고 외모를 가꾸길래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예뻐지는데 도가 트기 시작했다. 슬플 것도 없다. 기왕이면 보기에도 행복한 예쁜 여인을 뽑겠다는데 누가 토를 달겠나. 그래서 타고난 미모를 더 잘 개발해 말하지 않으면 누구나 강남 출신인 줄 아는 세련된 외모를 가지고서 업계에서 가장 대우가 좋은 이 기름집에 당당히 입성해 2년이 넘게 잘 먹고 잘 살았다. 다만 이 회사는 지분을 가진 용역 업체를 두고 거기서 경리나 데스크 안내직원, 주차관리 혹은 경호 직원을 뽑고 있다. 뽑을 때도 자를 때도 좀 더 용이하게 하겠다는 의도겠지. 그렇지만 적당히 열심히 다니면 딱히 구조조정 등의 칼바람을 맞을 일 없는 은근히 안정적인 직군이기도 했다. 아직도 이해는 잘 안 가겠지만 그러니 이 편안한 직장을 그만두게 된 것은 상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다 김 대리 때문이다. 굳이 골똘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골치 아플 일도, 자존심이 상할 일도 없던 내 인생을 꼬아버렸달까…
1999년…
내년이면 앞자리가 바뀐단다. 그게 뭐… 나이가 스물아홉이면 내년에 앞자리 바뀌어서 서른 되는 거랑 뭐 별 반 차이 있나 했는데… 그냥 손 놓고 있으면 컴퓨터들이 난리 난다나? 뭐 그렇지만 인간사 웬만한 난리는 돈으로 해결이 되고, 돈 많은 회사에서 간단하게 전문가를 모셔 와 난리 나기 전에 대비를 할 셈이니 나와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아니, 그 오기로 한 데이터 베이스 엔지니어가 꽤나 젊다는데, 기대가 은근히 되었다. 사무실에 80퍼센트가 아저씨들인데 그렇다고 총각 사원들 중에 마음이 가는 사람도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은 유부남 상사와 바람이라도 나지 않는 이상은 이 사무실에서 나와 엮일 인간은 없다는 것을 점점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아, 그럼 경미 씨는 대학을 안 나온 건가? … 아, 잘했어, 잘했어. 어차피 전문성도 없이 그냥 타이틀 따려고 나올 바에야… 얼마나 좋아, 일찌감치 자리 잡고, 경력도 더 쌓고… 안 그래?’라고 말하는 그들의 대부분은 서울대 출신이다.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이 지난 지는 한참이다. 그 서울대 출신들의 또 대부분은 꽤 사는 집 자식들이다. 80명 남짓의 부서원들은 어떻게든 학연, 지연으로 연결이 되어 주말이면 지겹지도 않은가 각종 동문회로 엮어 산을 같이 타거나, 공을 치거나, 낚시를 다녔다. 유독 살가운 한 대리가 몇 번 모임에 초대를 해서 주말에도 꽃단장을 하고 껴 본 적도 있다. 하지만 몇 번 지나지 않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 사모임에서도 경리가 필요해 나를 불렀을 뿐이란 것을… 그렇게 다시던 입맛이 써질 무렵, 그 파견 엔지니어 소식이 돌았다.
“대리라며, 왜 그리 어리대?”
“나이가 뭔 상관이야. 나이로 일하나 어디… 거의 일 년 내내 우리 사무실에 파견 나와 있어야 하니까 아마 고급을 그리 오래 묶을 순 없고 해서 중급 엔지니어로 보내나 본데, 사장이 진짜 아끼는 인재라고 몇 번이나 안 줄라고 한 거 우리 상무가 저 짝 ‘더블 드래곤’ 네로 뺏길 뻔한 걸 새치기한 거 아녀. 그리고 우리가 쓰는 프로그램은 미국 본사에서도 3년 전부터 업데이트 중단한 거라 커스터마이즈드 엄청 해야 하는데… 누가 오든 우리한테는 메시아야. 무조건 잘해 줘야 한다고.”
스마트하고 젊은 엔지니어라… 보기도 전에 살짝 설레고 있었다. 전산실이 있는 층을 지나다니다 보면 키 차이만 다를 뿐 비슷비슷하게 파리한 안색과 유독 마른 손가락을 가진 샤프한 인상의 남자들이 조용히 각자의 컴퓨터 화면에 집중한 모습들이 꽤나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전산실에 있는 그 공대 출신 남자들은 사회성을 훨씬 더 갖추고 있는 상대 구렁이들과는 달리 좀 더 순수해 보였기도 했다. 어쩌면 새로 온다는 그 젊고 순진한 엔지니어와 알콩달콩 사무실 비밀 연애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어머나, 짐이 많으시네요? 하긴 뭐 내년 3월까진 여기 묶이신 몸이니. 오홍홍… 가만 보자… 자리가…”
드디어 그 엔지니어가 첫 출근을 하던 아침이었다.
그전 날부터 상무가 파견 엔지니어가 쓸 자리를 잘 치워두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했었다.
“자재실에서 새 책상 올라올 거야. 컴퓨터를 두 대 정도 올려야 하니까 좀 큰 책상이 올라올 텐데 자리가 어디쯤이 좋을라나… 아무래도 내 방 옆에 저기 밖에는 자리가 없는데… 새로 오는 엔지니어가 마음에 들어할라나? 부담스러워할 텐데…”
“아이 그러면 안 되죠. 새로 오는 분 마음 편해야 얼른 적응하시죠. 일단은 책상을 저기에 두었다가 내일 오시면 직접 어디쯤 앉고 싶으신지 물어보고 자리 이동할게요.”
“그거 좋네. 우리 사무실 전체 예산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해 줄 귀한 사람인데 처음부터 그런 대접 좋다, 좋아. 역시 경미 씨가 우리 사무실 유일한 여직원이라 센스가 남달라. 그럼 뭐 경미 씨가 내일 그 엔지니어랑 잘 얘기해서 자리 문제를 그렇게 정하는 걸로…”
이미 깔끔한 새 책상을 정성을 들여 다시 한번 닦아 두었다. 혹시 예민한 분이라 새 가구 냄새 이런 거에 민감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고대하던 젊은 엔지니어가 아침에 꽤 많은 짐을 카트째 끌고 나타났다. 노트북뿐 아니라 본인이 쓰던 컴퓨터, 각종 데이터베이스 책들, 사무실에서 쓸 소지품들을 한가득 담고… 처음 만나는 사람을 약간 알기 시작할 때 도움이 되는 것은 그 사람의 취향을 살짝 들여다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업무에 관련된 용품들을 제외하고는 별 달리 눈에 띄는 물건들은 없다. 책이 꽤 많은데 대부분 컴퓨터 알고리즘,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래밍 언어 책들이고 그 사이사이에 수도쿠 책이 몇 권 눈에 띄었다. 취향이라고 할 것도 없을 만큼 짐의 구성은 심플하다. 그나마 곁다리로 낀 것이 수도쿠 책이라니… 어지간히도 공돌이 스타일인가 보다… 생각하면서 슬쩍 꽃 미소를 날려본다.
“이 책상이고요, 일단 지금 자리가 넓은 데가 여기라… 자리는 나중에…”
“아.. 여기 옆방 상무님 방이죠? 아… 한 소리 할 텐데…”
“…네? 저희 상무님 앗싸리 하세요. 잔소리 많은 스타일은 아닌데…”
“아뇨, 아뇨. 여기 상무님이야 제가 뵌 적이 없어서 그분 얘기가 아니고요… 이 짐 주인이…”
“어머, 본인이 아니셨군요?!”
좀 아쉽다. 얼굴도 뽀얗고 키도 훤칠하고 손가락마저 길어서 괜찮아 보였는데… 아마 다른 엔지니어가 오는 모양이다.
“아, 네. 저는 여기 말고 저 쪽 여의도 쪽에 있는 더블 드래곤에 파견될 예정인데요, 사실 이 회사 프로젝트가 너무 장기로 잡혀서 아무도 안 가고 싶어 했거든요. 근데 여기 상무님이 프레젠테이션받으셨을 때 그 엔지니어라고 콕 집으셔서 당첨된 대리가 올 건데 우리 사장님이 그 대리 눈치를 좀 많이 보세요. 보통은 프로젝트 하나 끝나면 포상 휴가 나오는데 별 과자집 인사 시스템을 완료하자마자 여기로 파견 확정되어서 엄청 저기압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 대리님 짐꾼인 거죠. 헤헤. 한 번씩 본사 들어올 일 있으면 여의도에서 여기까지 제가 뫼시러도 오고 그럴 겁니다. 아마… 아… 근데 상무실 옆인 거 알면 좀…”
“… 좀 … 뭐! 지랄할 거라고??”
그것이 그녀, 김 대리와의 첫 만남이었다.
무릎이 살짝 덮일까 말까 하는 샤넬라인의 블랙 치마 정장에 깔끔한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적당한 7센티 하이힐을 신은채 벽에 살짝 기대 선 중키의 젊은 여자는 긴 파마머리가 잘 어울렸다.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도 표 낼 수 없는 깊은 실망감을 느꼈다.
“안녕하세요, 이 부서 예산 프로그램 앞으로 업데이트할 김 윤조라고 하는데요, 제 자리가 여긴가요? 상무님 방 옆?”
“앗, 대리님. 정리 다 하고 전화드린다고 했는데… 왜 이리 일찍 올라왔어요.”
“내 짐인데. 내가 정리해야지. 무거운 거 옮겨 줘서 고마워, 재호 씨.”
“아닙니다! 그 가냘픈 몸에 이걸 어떻게 옮깁니까!”
“군댑니까? 다나까 지겹지도 않습네까?”
여자는 직급은 낮아도 나이는 더 많아 보이는 같은 회사 남직원과 친해 보였다.
“자리가… 여기 밖에는…”
당연하게 여자는 대빵의 방 옆이 자기 자리란 것에 심기가 불편해 보였지만 나도 오기로 되어 있던 젊은 엔지니어가 남자가 아닌 여자라 김 새기는 마찬가지다.
“아까 자리 나중에… 옮길 수도 있다고…”
짐꾼 남직원이 잽싸게 흘려들었던 말을 주워 꺼내 들었다.
“아뇨, 아마 다른 자리 내기 힘들 거예요. 상무님 방 옆인 거 제외하곤 저 자리가 명당인데… 뭐 어차피 일하러 파견 오신 거 자리가 많이 중요한가요? 프로들은 집중하면 막 산에서도, 명동 한복판에서도 프로그램 짜고 그런 거 아닌가.. 홍홍홍”
“그래요? 그럼 프로이신… 성함… 아, 경미 씨가 저랑 자리 좀 바꿔주시면 되겠네요?”
“아우, 저도 상무님 옆으로 가고 싶지만 저는 재무팀이랑 가까이 있어야 해서요. 어쩌지요? 자리가 그리 중요할까요?”
이상하게 처음부터 기선을 제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텃세라는 치사 하지만 효과는 센 카드를 꺼내 보았다. 가진 게 많이 없어도 견디기만 하면 어느 정도 생기는 힘, 텃세다. 미국 남부 깡촌에 사는 백인이 인종차별을 그리 해대는 것도 알고 보면 별 노력 없이 그 터에 말뚝 박고 살아 생긴 파워, 텃세에서 기인한다.
“뭐 그럼 할 수 없죠. 제가 더욱 프로가 되어야겠네요. 여기는 산이다… 생각하면서?”
“푸하하하. 대리님 진짜 웃겨요. 하하하”
“… 조용히 하시오. 갑의 사무실에서, 이 프로 경리님이 진지하게 말씀하시는데 그리 웃고 말이야. 재호 씨, 좀 있다가 점심시간인데 전에 이 근처에서 프로젝트했었지? 쌀쌀해서 알탕 당기는데 잘하는데 알아?”
“아 그럼요, 명태가 먹어도 놀랄만한 알탕을 끓이는 집을 알고 있죠. 대충 정리되면 식사하러 가시죠.”
“오늘 아마 환영 회식이 있는 걸로…”
“네, 알아요. 그건 저녁이라더라고요. 프로젝트 첫날 점심을 불편하게 먹고 싶진 않아서… 저희 직원이랑 오붓하게 할게요.”
보기가 싫은 건지, 원래 그런 까칠한 성격인 건지 여인은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할 말만 명료하게 한 후 책상을 본인 마음에 들게 세팅하기 시작했다.
“뭐… 커피나 차 한 잔 드려요?”
친절이라기보다는 몸에 밴 업무 습관이었다.
“아니… 아직도 이 사무실에선 여직원이 차 심부름합니까? 앞으로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전 제 손으로 잘 찾아 먹으니까요… 참, 그래도 여긴 은행처럼 여직원은 따로 유니폼을 입거나 하진 않는가 보네요? 사복 차림이신걸 보니.. 뭐 그럼 굳이 스커트 정장 안 하고 와도 되겠다.”
여직원이 커피 심부름을 하냐며 놀랜다. 글쎄… 딱히 불쾌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부분이다. 저 회사에선 여직원이 차를 안 내 온단 말인가? 그저 내 업무의 중요한 한 부분일 뿐인데… 저런 반응을 보자 더 기분이 나빠졌다. 그나저나 은행처럼 여직원은 유니폼이 있다면 옷 값이 반절은 줄겠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간 그녀를 지켜보다가 점점 안심이 되었었다.
그녀는 나보다 두 살이 많았고, 키도 나보다는 작고, 가슴도 나보다 작으며 스타일도 늘 바빠 그런지 첫날 등장 때 딱 한 번 스커트를 입은 적 빼고는 평범한 정장 바지에 무난하고 얌전한 스타일을 추구했다. 쓸데없이 말이 많은 편도 아니었고, 전혀 상냥한 타입도 아닌 데다 오히려 지위 막론하고 시시한 소리 하는 사무실 아저씨들에게 적당히 말 펀치도 잘 날리는 까칠한 쪽이었다. 그래서 마음을 놓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의 적수가 아니었다…
그래서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무언가가 달라지고 있었다. 그렇게나 마주칠 때마다 예쁘다 예쁘다 해대던 이 아저씨들이 자꾸만 김 대리 근처에서 모이는가 하면, 하나 친절하지도 않은 그녀가 한 마디 하면 여고생 귀신이 붙었나 ‘까르르’, ‘까르르’ 자지러지는 것이다. 나이가 어리니 다들 친근하게 ‘김 대리야’라고 불렀지만 내가 은근하게 느끼던 애매한 ‘무시’, ‘열외’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사무실에 유일한 ‘여자’라 느끼던 은근한 소외감은 같은 여자에 오히려 다른 회사에서 온 김 대리에겐 나눠지지 않았고, 그래… 또 한 가지 이상한 거… 희한하게 이 아저씨들이 결코 못 생기지 않은, 아니 꽤 괜찮은 외모인 김 대리에겐 전혀 외모 품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에겐 하던 ‘예쁘단’ 칭찬을 그녀에겐 하지 않았고, 대신 그녀를 ‘이대 나온 여자’ 라든가 ‘똘똘이 스머프 김 대리’ 등으로 불렀다. 그러다가 내가 그녀를 미워하게 된 것은 아저씨들의 그런 대우는 ‘그녀를 동등하게 보기 때문’이라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을 때였고, 그날 나는 모래내 쌀집을 하면서 꾸역꾸역 애를 넷이나 낳아 나를 일찌감치 여상으로 몰았던 부모를 원망하면서 회사 근처 주점에서 혼자 맛이 갔다.
미운 정도 정이고, 또 사람은 적응하며 어떻게든 살게 되어 있으니까 그렇게 또 지나가고 있었다. 어차피 나와 다르다고 미워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그녀와 나는 전생에 콩쥐 팥쥐 혹은 장화 홍련 사이였나 보다. 그리고 그게 맞다면 내가 전생에는 팥쥐 혹은 홍련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녀는 내가 고통받는 줄도 모를 만큼 평화로운데 나는 그녀를 보는 게 더 힘들어지기 시작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