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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선생… 그 남자다. 작년에 김 대리라는 여자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단 하나의 꽃’이던 시절, 상무 심부름으로 병원 특실에 입원 중인 상무 사모를 자주도 방문해야 했었다. 갑자기 부아가 치민다. 말이 경리지 나는 이 사무실 윗대가리들의 식모, 혹은 1인 심부름센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더욱 씁쓸한 것은 하필 그때 그 병원의 다른 층 일반실에는 따닥따닥 커튼 칸막이로 나뉜 여덟 침대 중 하나에 허리를 다친 엄마도 누워 있었다는 사실이다. 가족 같은 사무실이라길래 그런 소식도 전했지만 다들 걱정하는 척, 막상 경미 씨는 엄마 병간호도 해야 한다고 말해주는 이 하나 없었다. 뭐 불만은 없었다. 슬프게도 나부터도 아픈 엄마보다 상무 사모가 더 우선이라 생각했었으니까… 그렇게 상무 심부름을 여러 날 하다가 그 남자를 봤었다. 그 남자는 어렴풋이 한 번이라 기억하고 있지만 정확하게는 네 번을 마주쳤다. 어차피 그가 상무 사모의 주치의였기 때문에… 중학교부터 단짝이다가 전문대를 졸업하고 신참 간호사가 된 친구를 통해 남자의 정보를 입수했다. 하얀 가운이 멋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남자의 배경을 듣고 나서는 괜히 혼자 지폈던 설레발을 미친 듯 밟아 꺼버렸다.
듣기 싫었던 질문은 ‘커서 뭐가 될래?’였다. 커서 뭐가 되긴 되나? 아님 뭐가 꼭 되어야만 하나? 부모가 내게 했던 기대라면 아마 태어나기 전, 아들이었으면 했던 그 기대가 다였을 거다. 내 잘못도 선택도 아닌 딸로 태어난 이후 ‘기대’라는 것을 부모에게서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런데 저런 질문을 들으면 화가 났다. 사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꿈은 ‘부자’였고, 부자가 되는 제일 쉬운 방법은 부자인 남자를 만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세상에 나와 버둥거려 보니 사실 그것도 쉬운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보이는 사람들이 다 잘나서 웬만한 조건의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데, 사무실에서 제일 별로라고 생각했던 사투리가 촌스러운 노총각 경태 씨조차 나를 선택지에 올리진 않았다.
그래도 세상에 단 하나 믿는 구석이란 ‘사랑’이다. 미친 듯 사랑하면 그 모든 걸리적거리는 조건들이 물방울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 우연을 가장해 네 번을 마주치면서 그가 나의 마법에 걸리기만을 바랬다. 그런 일은 역시 드라마에서처럼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나 마주칠 때마다 조금 과하게 친절하고, 흔적을 남기려고 커피를 쥐어주고 했는데 남자는 항상 딱 고만큼… 환자 보호자를 대할 때의 적절한 친절함 외에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아, 마지막으로 마주쳤을 때는 그가 내게 캔커피를 건넸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브랜드의 커피를 손에 쥔 채 망설이는가 싶더니, 매너도 좋게 이 커피를 좋아하느냐고 확인까지 한 후 건넸지만 그 캔커피에는 내심 바랬던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 같은 것은 없었다. 내가 예쁘지 않은가… 아니다, 나는 태어나 제일 많이 들은 말이 예쁘다는 말이었다. 조금 더 예뻐지면 나아질까… 적금 만기가 되면 코를 좀 더 높일까… 더 이상 심부름을 갈 일이 없어지면서 그 남자도 볼 수가 없었지만 그 잔상은 꽤 오래 남았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남자를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올해 여름휴가 때 코를 높였다. 나는 태어나기도 예쁘게 태어났지만 덤으로 파마가 잘 되는 머릿결과 성형이 잘 받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 수술이 너무 잘되어서 연예인보다 예쁘단 소리를 다른 층의 경리 친구들에게서 들었다. 그러다 내가 그토록 바랬던 대로 우연히 그 남자를 다시 마주쳤다… 그런데… 그 남자가 김 대리 남자 친구란다… 똑똑해 봤자 여자는 여자인지 김 대리는 그 남자 때문에 마음을 졸이는 것을 종종 들키곤 했다. 차갑게 친절한 의사 선생이 그렇게 이글거리는 뜨거운 눈으로 자기를 바라봐 주는데도 마음을 모르겠단다. 공부만 했던 답답이는 계속 공부만 해야 공평한 거 아닌가? 별 기술도 없는데 이 여자는 뭐가 그리 쉽다. 그래서 설악산을 갔을 때까지만 해도 해볼 만하다 생각했었다. 딱 저 여우가 말실수인 척 남자의 뽀뽀를 끄집어내기 전까지…
회식 자리에서 상사 욕한 건 분명히 잘못했다. 그래도 억울하다. 내가 언제든 대체 가능한 경리가 아니고 저 배 나온 아저씨들이 쩔쩔매는 예산 프로그램 건드리는 김 대리였다면 이렇게 쉽게 잘랐을 거냐고 따졌을 때 인사과장이 그랬다. ‘김 대리면 회식 자리에서 그렇게 정신 놓게 퍼 마시지도 않지.’ 그때 알았다. ‘여우 같다’와 ‘여우’는 다르다는 것을…
“너무 예쁜 지원자는 배제하시죠? 김 대리님이 묻히지 않으려면?”
이런 시시한 말은 왜 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예쁜 여자가 늘 이기는 거란 말을 하고 싶었을까…
“아니, 왜? 기왕이면 어여쁜 아가씨가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그럼 아저씨들이 나 좀 덜 귀찮게 할 거잖아.”
저 여자는… 진심이다… 센 척하려고 저러는 게 아니다. 그래서 더 화딱지가 난다.
“아, 맞다. 경미 씨, 내 책상 두 번째 서랍에 경미 씨가 내 자리에 놓고 갔던 거울 있어. 그 왜 맨날 수시로 보던 안나수이 거울 있지? 잊기 전에 말해줘야지. 나 지금 면접 들어가니까 내 책상에서 찾아가.”
“그거 대리님 가지세요.”
“… 음… 왜? 난 괜찮아. 가져가.”
제3의 손인양 그렇게 내내 가지고 다니던 손거울을 왜 나에게 주겠다는지 모를 일이다.
“아니에요. 대리님 가지세요.”
이 여자… 오늘 여러 가지로 이상하다.
“난 필요 없어… 그리고 나 남의 물건 가지는 거 별로…”
무심히 한 번 더 거절하고 면접실을 향하려는데 갑자기 둔탁하게 무언가 책상을 후려치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경미 씨가 챙기던 회계장부 철을 책상에 아무렇게나 던진 채 무서운 얼굴을 하고 서 있다.
“어머… 경미 씨…”
한참 오전 업무를 마무리하기 시작해 바쁜 11시경… 곧 신임 경리로 오버랩될 처지의 헌 경리의 히스테리에 일순 사무실이 정지되었다.
“경미 씨, 왜 그래… 괜찮아?”
민호 씨와 두바이장 원유가를 정리하던 한 대리도 놀래서 다가왔다.
“둘이… 싸우는 거… 아니지?”
“아뇨… 그런데…”
“좀!! 가지시라구요. 내가 주고 싶다잖아요! 이제… 나랑 볼 일 없을 거면서… 그래도… 일 년이나 매일 얼굴 보고 살았는데… 언니, 어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아요? 누가 나랑 또 만나재요? 술 마시재요? 그냥 내가 아끼던 거울 안 써도 갖고 있으라구요! 그럼 적어도 그 거울 있는 동안은 나 까먹지는 않을 거잖아. 나를 그때 그 경리 있잖아. 이렇게는 기억 안 할 거잖아. 나 그전 경리… 말고, 나랑 일 년 동안 같은 사무실에 있었던 거울 준 ‘경미’로 기억해 달라고요. 나도 언니룰 김 대리 언니 말고 김 윤조 언니로 제대로 기억할 테니까…”
월급 받으러 나오는 이 전쟁터 말고, 다른 곳에서 언니 동생으로 만났다면 아마 오늘 저녁에 나는 동생 안타까운 사정 같이 들어주고 욕 좀 했다고 자른 좀팽이 김 과장을 같이 안주삼아 잘근잘근 씹어줬겠지. 대체 왜 저러나 싶은 그녀의 히스테리는 바로 이해가 되었다.
“알았어, 경미 씨. 나 그럼 경미 씨의 예쁜 거울 잘 쓸게.”
살짝 당황하던 김 대리가 순순히 대답을 했다. 저 언니는 내가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잘도 알아듣는다. 그래서 더… 밉다… 퇴사 후에도 연락하라는 둥, 언제 같이 밥이라도 한 번 하자는 둥… 그런 군더더기는 붙이지도 않는다. 어쩌면 저 여자가 만만하지 않은 이유란 지키지 못할 말은 아예 꺼내지도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