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 여인은 아침부터 내내 왜 저러노? 한 며칠 죽상 때리고 있었지 않았나?”
“오늘은 확실히 기분이 좋아 보이죠? 출근하자마자 제 컴퓨터 버그도 잡아주더라고요? 어제 부탁했더니 딱 눈 반쯤으로 깔고 ‘제가 용산이에요? 왜 저한테 그런 걸 잡아달라고 하는 건데요?’ 이러더니 말이죠. 오늘은 걸음걸음 나비만큼 사뿐도 한 데다가 노래방에서 제발 불러달라고 해도 꺼 버리던 노래를 아주 그냥 메들리로 부르고 댕긴다니까요.”
“… 제가 말씀드렸죠? 두 분 아무리 소곤 거려봤자 다 들린다고?”
뒤를 보지 않아도 한 2미터 떨어진 곳에 환상의 콤비 안 부장과 한 대리가 파티션에 기대 선 채 믹스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안주거리로 나를 올렸다는 것을 다 알 수 있다.
“것 보세요. 부장님, 담배 하도 펴서 가래 때문에 목소리 너무 티 난다니까요.”
“대리님이 용산 어쩌고 제 흉내 어설프게 내는 것도 다 들렸어요.”
“아… 그래? 미안해…”
전혀 미안하지 않은 말투로 미안하다고 하더니 오늘은 저 정도인걸 보아 일 년 중 가장 기분 좋은 날인가 보다며 둘이서 마무리로 속삭이고 섰다. 아무래도 좋다. 이제야 남자 친구와 한결 더 가까워진 기분, 조금은 정상적인 커플이 된 듯한 느낌. 일과가 끝나면 척박하고 추운 종로 한복판을 헤매다 나 만큼이나 지친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심심하고 단조로운 일상이 오늘은 조금 다를 예정이니까. 희한하지… 정신없이 일 하느라 다람쥐처럼 내내 동동거리는 일과 중엔 그렇게나 집에 가고 싶은데, 막상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는 심연처럼 가라앉아 힘이 빠졌던 건 외로움 때문이었다. 그러니 하루 종일 떠 올렸던 그 얼굴을 가까이 보는 것도, 춥다는 핑계로 살짝 끼면 순식간에 온몸이 포근해지는 그의 단단한 팔짱도 지금 이 단조로운 일상을 견디게 하는 마법이 된다.
“맞다, 김 대리야, 오늘 11시부터 면접인 거 알고 있제?”
“그럼요!”
어제까지는 아니 갑 사무실에 경리 뽑는데 왜 내가 거기도 참석을 해야 하는 건가 입이 댓 발은 나왔었는데 오늘은 뭘 해도 재미가 나 죽을 지경이다. 오늘은 마치 산업역군 로봇이라도 된 양 순식간에 산더미 같은 에러 체크며 프로그램 업데이트며 보고서 작성이며 어쩜 이리도 잘 되는지 모를 일이다.
“아니 왜 이래? 이러다가 점심 먹기 전에 쓰러지는 거 아녀? … 아! 남자 친구라도 만나기로 했나 봐? 어느 남자 친군고? 백수의사? 아니면 강남에서 제일 바쁜 우리 오 선임님?”
“아 진짜 고장 난 라디오도 아니고 왜 이래요? 아니라고요,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요! 아주 그냥 등에 써 붙이고 다닐까 보다. 오 선임 여자 친구 아님.”
“딱 걸렸어! 만나기는 만나는구나? 오늘 어디 시스템 하나 펑크 나서 우리 김 대리 발목을 단단히 잡아야 할 텐데…”
누구나 하나 갖고 있는 터진 입을 가지고 저토록 밉상이 될 수 있는 것도 재주라면 재줄라나…
10시 20분쯤 되었을까… 면접 자료를 준비하느라 복사기와 댄 스중인데 내리깐 눈에 이 사무실에서는 보기 드문 뾰족한 하이힐이 들어왔다. 짧게 사람을 평가하는 유명한 기준들 하나로 ‘약속 시간을 잘 지키는…’이라는 항목이 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사람들은 ‘늦는’ 것 만이 약속시간을 어기는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무조건 일찍 오면 근면 성실한 것으로 착각을 하곤 한다. 오늘 면접에 사활을 건 푸릇푸릇한 아가씨이겠거니 하며 친절한 목소리를 준비했다.
“면접 시간은 아직 좀 남았는데, 이 복도 끝 탕비실 옆에 작은 회의실이 오늘 면접 대기실이거든요? 차나 커피, 주스 드시고 싶으신 대로 탕비실에서 가져다 드시면서 기다리…”
아뿔싸.
사회생활에 어느 정도 이력이 났다고 느껴질 때부터 든 나쁜 습관. 바쁘다는 핑계로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도 전부터 본론을 꺼내는 그 좋지 않은 습관이 또 튀어나왔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다. 유난히 동그랗고 작은 얼굴에 깜찍한 깻잎머리를 하고 선 여인은 경미 씨다…
“어머… 경미 씨, 며칠간 안 보여서… 아니, 어떻게…”
그만둔 직장에는 웬일이냐고 단도직입적으로다가 묻기도 뭐 하니 말이 자꾸 꼬인다.
“괜찮아요, 김 대리님. 원래 친절한 캐릭터 아니시잖아요. 뭐 애까지 쓰고 그러세요. 저 술 먹고 김 과장 욕해서 잘린 거 다 알 텐데 뭐.”
제대로 비뚤어진 표정을 하고 선 전 경리의 파장은 은근하게 강력했다. 그렇게 괘씸하다고 끝까지 자르자고 칼을 휘둘렀던 재무팀 김 과장은 이미 도망간 뒤였고, 본인 핸드폰 찾을 때도 그렇게 경미 씨를 불러대던 안 부장도 투명인간이 되어 사라졌다. 김 대리가 출근하자마자 컴퓨터도 고쳐주고 상냥하게 인사도 해 줘서 기분이 좋던 한 대리만이 피할 새 없이 경미 씨와 맞닥뜨렸다.
“어! 어… 이게 누구야. 경미 씨 아냐!”
“쳇, 뭐 며칠이나 못 봤다고 엄청 오랜만에 보는 척 이세요? 진짜 다시 오고 싶지 않았지만 뭐 계약상 인수인계는 해야 한다고 어찌나 난린지. 어쨌건, 오늘 면접 오는 애 중에 우리 회사 애는 뽑지 마요. 엄청 무식하고 밥맛이니까.”
“아, 그래? 부장님한테 유념하시라고 전할게.”
한 마디 한 마디 가시를 잔뜩 묻혀서 쏘아대는 전임 경리의 눈치를 보는 대리. 원래 그런 거다. 치사하고 아니꼬운 월급이라는 족쇄를 벗어던지는 순간 위계는 반대가 된다. 말단 직원이 잘리면 상무는 밖에서 그 말단 직원 안 마주치는 게 일신상 편하니까.
하지만 사실 전임 직원의 충고랍시고 건네는 말을 들을 상사도 없다. 경미 씨의 저 전언 때문에 아마도 부장은 그 아가씨를 더 눈여겨볼 테니까. 이 사무실에 들어선 지 십 분이 넘는 동안 단 한 번도 미소를 보이지 않던 경미 씨는 거칠게 본인이 쓰던 자리로 가서 남아 있던 소지품들을 준비해 온 커다란 가방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기 시작했다.
“어, 경미 씨. 그 무선 마우스는 회사 비품… 아… 닌… 가?”
재무팀 박 대리가 뭘 부수는 소리를 내면서 짐을 챙기는 경미 씨 근처를 얼쩡거리다가 그녀의 칼 쏘는 눈빛에 주눅이 들어 겨우 문장을 맺는다.
“아니거든요!! 그리고 제가 예전부터 박 대리님한테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요, 지금 술 안 취했으니까 맨 정신에 제대로 말씀드릴게요. 대리님은요, 참 일제시대 순사 같애요. 그 왜 조선인인데 일본에 붙은 사람들 있죠. 그리고 그 일본인 대빵도 뭐 결국 월급쟁이잖아요? 그런 거예요. 그렇다구요. 대리님은 조선인 일본 순사라구요.”
박 대리는 누가 봐도 명백하게 김 과장의 사주를 받고 경미 씨의 행각을 지켜보고 있던 것이 발각되자 못지않게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조용히 ‘그건 일본 순사 아니고 친일판데… ’라고 중얼거리다 자리를 떴다. 아마 우리가 퇴사자에게 좀 더 살갑지 못한 이유란, 어차피 시기의 차이일 뿐 언젠가의 내 모습이기도 해서일지…
경미 씨가 곱지 않은 손길로 짐을 싸는 사이 이 사무실에서 따박따박 월급 받고 편히 지내고자 하는 젊은 처자들이 한 다섯 쯤 도착해서 잠시 전임자임에 확실한 히스테리컬 한 여인의 몸사위를 지켜보는가 하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닮은 조심스러운 발길로 면접 대기실을 찾았다.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는 순간은 사실 우리의 무관심 속에 늘 일어나고 있었다.
“인수인계를 안 할 수도 없고… 매번 계약직들 갈릴 때마다 거참 껄끄러워서… 험…”
면접시간이 다 되어가자 어디에 숨었었다가 이제 나타났는지 아침까지는 뉴 페이스 아가씨들을 볼 생각에 한껏 들떴던 안 부장이 괜한 헛기침을 하면서 느릿느릿 일어섰다.
“어머! 대리님도 면접관이에요?!”
책상을 폭파하듯 다 뒤집어 놓은 채 투박스럽게 서류들을 정리하던 경미 씨가 이건 또 무슨 심리인지 잔뜩 가시 돋친 톤으로 못 볼꼴이라도 본 양 격앙된 어조로 불러 세운다. 이 사무실과 이제 인연이 없어지는 판국인데 터줏대감 본능은 금세 사라지지 않는가 보다. 그러고 보니 짧은 순간, 처음 이 사무실에 파견 왔을 때가 생각이 났다. 한겨울 추위가 한창이던 1월 말에 기름집 사무실 아니랄까 봐 아낌없이 히터를 틀어 두어 들어서자마자 저절로 가디건까지 벗어젖히게 했던 통 큰 따스함… 일단 그것이 내가 느낀 첫인상이었고, 전층을 장악한 이 회사의 핵심 부서인 전략기획 예산 팀에는 약 80명 정도의 사람들이 왁자지껄 유난히도 친목이 강해 보였고, 그 드넓은 사무실에 여자라곤 딱 하나. 바로 저 여인. 이 부서의 ‘돈’과 ‘법인 카드’, ‘경비’등을 담당하는 이 부서의 핵심, 살아 있는 지갑, 경리. 누구보다 기름집 진골 사원 인양 어디선가 나타난 또 다른 여인을 반갑지 않은 티를 숨기려 애쓰지도 않고 아래위로 훑어보던 그 여인. ‘오늘부터 파견 나온 데이터베이스 엔지니어신가요? 자리는 저 쪽이에요.’ 하필이면 왜 상무실 코 앞에다가 배정을 해주는가 했더니만 이후 내내 나는 수시로 인기 없는 상무의 국밥 친구가 되어야만 했었다. 어쨌건 이 갑들의 사무실에서 단 하나, 내게 친절하지 않았던 사람은 저 여인 뿐이었는데 그녀의 소리, 실체 없는 구박이 어이가 없어 친구에게 털어놨을 때, 남녀공학 공대 출신인 내 친구가 그랬었다. ‘그게 원래 공대 여신이라고 자칭하는 뺑덕어멈들이 신입생 중에 여학생 들어오면 짜증 내는 거랑 같은 심리임.’ 80명 중 80퍼센트가 유부남인 사무실이라도 혼자 공주 대접받는 여인인 것이 좋았나 보다…라고 이해했고 어차피 나는 일을 아주 많이 해주러 온 을이므로 그녀의 견제를 신경 쓸 만큼 한가하지 않았었다. 그렇게나 갑 중의 갑 진골 인척 하던 그 여인도 알고 보니 나보다도 더 어려운 처지인 인력회사에서 파견된 계약직임을 알고 나서는 근본 없었던 그녀의 주인 의식이 더 이해가 안 가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말 끝마다 ‘우리 회사’, ‘우리 사무실’, '우리 상무님’을 달고 살았기 때문이다. 원래 이 기름집은 복지가 끝내주기로 유명한데 회식의 수준부터가 달랐다. 회식했다 하면 초이스 없이 닭 아님 돼지, 사장이 기분 나면 노량진 수산시장 정도인 우리 회사와는 달리 이 팀은 점심 회식이면 남산 하이얏트 호텔, 저녁 회식이면 고급 일식집이나 혹은 소를 구워댔으니까… 경비의 규모가 남다르다 보니 경미 씨 전임 경리는 공금에 손을 살포시 얹었다가 바로 퇴출되었다. 보통 경리가 돈 계산 투명하고 잘하면 그다지 잘릴 일이 없는데 이 아둔한 아가씨는 이 기름집의 철저한 생리를 무시했달까… 대한민국 학벌주의의 끝장을 보여주는 곳. 전신 회사가 국영회사였기 때문인지 나이 든 부장급은 만만디 정신으로 무장한 이들이 대부분이고 일에 대한 큰 열정도 혹은 관리자로써의 묵직한 분위기도 그다지 없어 보이지만 조심해야 한다. 80명 중 90퍼센트가 서울대 출신, 그 서울대 출신들 중 90퍼센트가 상대 출신. 사무실에서는 서로 직책을 부르지만 회식 자리 가는 순간 여기저기서 ‘선배’, ‘형’의 호칭이 난무하다.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에서 같이 지내온 지 무척 오래된 사이들이고, 보이지 않는 위계는 절대 깨질 수 없는 불문율이다. 술김에 주사로 과장 좀 씹었기로서니 당장 잘린 게 억울해 죽겠는 저 여인은 사실은 제일 건드려선 안 되는 부분을 건드렸고, 하극상은 용서가 절대 되지 않는 중죄다. 그런 생각을 하느라 정작 그녀의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고 섰는데,
“아니 왜 ‘우리’ 회사도 아닌 김 대리님이 면접에 들어가는 거지? 엔지니어가 경리 업무에 대해 뭘 안다고…”
원래 나는 떠나는 사람에게 친절한 편인데… 그래, 나는 하던 대로 친절하다. 때로 하고 싶은 말을 참는 것이 최선의 친절일 때가 있으니까.
“그러게? 난 경리업무 하나도 모르는데… 그런데 경미 씨가 쓰던 그 예산 프로그램을 짠 게 나지 뭐야? 내가 바쁜 와중에 경미 씨 가르치느라 한 이주일을 고생했던 걸 상무님이 감사하게도 안 잊으셨나 봐. 들어와서 체크하고 이주일 까지 가르치지 않아도 되는 좀 더 깨인 인재를 추천해 달라 하시더라고. 뭐 경리 업무 몰라도 프로그램 지식 정도는 내가 점검해 볼 수 있으니까 말야.”
일하는 곳에서 조차 본인의 성별을 꼭 부각하고, 항상 보호와 대접을 받으려 하며 인생 최대의 미션이 본인보다 한 세 단계 위인 남자를 잡아 결혼으로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퇴사하는 것인 예쁜 여직원들이야 많이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철저한 성별 나누기 때문에 나는 일꾼일 뿐인데도 그들과 같은 여자라는 이유로 텃세질을 당해야 하는 것은 사실 많이 짜증 나는 일이다.
경미는 마지막 텃세를 부리다 본전도 못 건진 채 짐짓 의연한 척 자리 정리를 다시 하다 김 대리가 사라진 쪽을 잠시 노려보고 섰다.
김 대리.
이 모든 ‘나비효과’의 시작은 저 여자였다. 물론 본인은 상상도 못 할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