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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가 이력서에서 제일 눈에 띄는 부분을 읽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2번 면접자 양 주은 씨는 속이 꽉 찬 사람인 것을. 들어오기 전에 이미 다섯 명을 슬쩍 보았을 때 그녀만 유일하게 유행이 꽤 지난 통 넓은 바지 정장 차림에 코트 대신 두툼한 파카를 걸치고 온 것을 보았었다. 그녀는 면접복 따위가 당락을 결정 할리 없다고 굳게 믿는 소신파의 수장 격으로써 멋보다는 실용성이 최고라는 패션 철학의 소유자였다. 오늘따라 살을 에이게 추운데도 불구하고 다른 면접자들은 치마 정장은 기본, 아우터는 선이 늘씬한 양모 롱코트 정도를 걸쳤는데 이 아가씨만 두툼한 바지 정장에 실용성에만 중점을 맞춘 커다란 파카를 뒤집어쓰고 와서 충분히 따뜻한 실내에서도 껴입고 앉아 대체 뭘 공부하는 건지 준비해 온 경제 관련 책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대단하다기보다는… 그 언젠가 소풍 가는 버스 안에서 영단어를 외우던 우리 반 1등을 보던 기분이랄까…
아… 어쩌지… 희한하게 이 아가씨도 안 될 것 같다. 너무 야무지고 똑똑해 보인다…
“우리 양 주은 씨는 공부 잘했네? 여상이라도 일등 졸업할 정도면 우째, 공부를 좀 더 해보지 그랬능교.”
“아닙니다. 저는 대학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은 가지 않았지만 이후로도 경제 관련 신문을 매일 읽고, 경제, 마케팅, 경영 전반에 관한 서적들을 수시로 많이 읽고 있구요, 국제 유가 변동에 대해서도 상당히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아… 아무래도 이 아가씨를 이 순간 이후 다시 보기는 힘들겠다… 그녀의 대답이 뭐가 잘못되었다기보다… 아, 몰라. 저 대답이 경리 지원자에게 기대했던 그것은 아닐 것 같다…
“아이고 마, 상대 출신인 우리 네 명 보다 더 조예가 깊겠다, 그제?”
기특하다는 듯 박수까지 치며 좌중을 둘러보는 상무를 향해 나머지 세 명의 서울대 상대 출신들도 환하게 웃는다.
“음… 그라몬 우리 양 주은 씨는 취미생활은 우째 되노? 주말이면 산 좀 타고 야구장 같은데도 다니고 하나?”
사실 이 질문은 중요했다. 별 것 아닌 거 같지만 상무의 비서를 겸하게 되는 경리가 되기 위해서는 방금 상무가 준 힌트를 덥석 물어야 옳았다. 그에게 있어 좋은 비서 겸 경리는 돈 계산 꼼꼼한 거는 기본이고 산도 좀 타고 야구 응원도 프로급으로 할 줄 알아야 했으니까…
“아! 저는 매일 아침 조깅으로 심신을 단련하고요, 주말에는 주로 도서관을 가서 좀 더 심도 깊은 경제 서적들을…”
“에헤이… 뭐 경리 하는데 그리 경제를 전공을 할 거 까지야… 그니까 주말에 등산, 야구장 이런 거 안 가네, 맞제?”
“네! 그렇습니다. 소모적인 신체활동 위주의 취미생활보다는 아무래도 오래 남는 독서를…”
“그렇구만. 훌륭한 청춘이네. 늘 공부하고, 연구하고… 그라믄 우리가 좀 더 검토한 후에 담당자가 개별 연락하는 걸로…
오늘 이 추운데 성실하게 와 줘서 다시 한번 고마워요.
조심히 돌아가시고…”
형식적이고 틀에 박힌 질문 몇 개 던졌는데 그때마다 이 아가씨는 본인이 얼마나 늘 노력하는지, 공부하고 있는지, 시간을 잘 쪼개 쓰는지에 관해 버전만 다른 여러 이야기를 반복하다가 면접을 마쳤다. 두 번째 지원자가 나갈 때 바로 한 대리에게 문자를 하라는 상무의 턱 지시에 맞추어 그녀에게도 면접비 봉투와 함께 배웅을 부탁하는 지령을 날린다. 갑자기 허무하다. 이 정도까지 초고속 결정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어차피 수많은 면접들이 이런 식일 거다. 한쪽은 심장이 나대다 튀어나올 지경으로 극도의 긴장 상태인데 그들을 뽑는 쪽은 중간중간 면접자 바뀌는 틈에 하품이나 해대고 점심 뭐 먹을지 심각히 고민하고, 면접장 들어설 때부터 속으로 '너는 아웃, 너는 오케이’ 빨리도 결정짓고…
한 대리가 2번 면접자를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고 다시 돌아와 3번 면접자를 에스코트할 것이다. 막간의 휴식은 아저씨들의 수다로 채워진다.
“쟈는 진짜 느무 센스 없지 않나? 취미가 뭔가 즐기면서 노는 거여야 지 뭘 물어도 자꾸만 지가 얼마나 공부를 잘했는지, 잘하는지… 이런 뒷다리 긁는 소리를 해쌌노. 대학은 불필요하다케쌌고…
마 지금 번데기들 앞에서 마구 주름잡는 다이가. 허허.”
“맞습니더. 무조건 24시간 성실하게 사는 거 그걸 어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스타일인 거 같습니더,”
“센스 없는 거죠. 지금 우리가 회계사를 뽑는 게 아니라 경리를 뽑는 중인데 말이죠.”
면접관 초짜인 내가 보기에도 그녀는 너무 잘못된 방향으로 면접에 임하고 있다. 어떤 질문이 오더라도 간략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대답을 해야 하는데 본인이 하고 싶은 대답들을 외워 와 맞지도 않는 질문에 준비한 대답을 써먹으려고 하다 보니 핵심 없는 면접으로 종결되어 버린 것이다.
“회사는 무조건 공부 잘한 범생이 안 뽑아. 우리가 필요한 건 센스쟁이잖아. 내 아까 면접실 들어올 때부터 2번은 제끼 놨잖아. 아니 자리도 좁은데 거 옆에 사람 불편하게 시리 이따시만한 파카를 업고 앉아가지고, 무슨 시험도 아닌데 뭔 책을 그리 달달 보면서 초치기를 하고 있노. 파카가 어찌나 큰지 뭔 곰 한 마리를 업고 있는지 알았다이가.”
것 봐라. 상무는 8분이나 늦게 나타났지만 어차피 바깥에서 면접실로 들어오는 고 8초 사이에 이미 누구는 제외할 것인지 정도는 정하고 들어왔다.
“면접 보러 오는데 사이즈도 안 맞는 큰 정장 바지에다가 통굽 하이힐에 양말은 뭡니까. 너무 성의 없어요.”
와이셔츠 조차도 을지로의 오래된 양복점에서 맞춤으로 해서 입는 패셔니스타 김 과장이 어쩐지 조용하다 했다.
“업계에서 제일 대우 좋은 회사 경리 자리로 들어올라면 제대로 된 면접 복장쯤에는 미리 투자를 하는 그런 센스 정도는 있어야지. 동상 걸릴까 봐 두꺼운 양말에 구두… 보자마자 인상 써지는데… 저런 식으로 하면 어디를 가도 못 뽑혀요.”
“아니에요. 규모 작은 회사에선 좋아할 수도 있어요. 수더분하고 허영심 없어서 비리는 안 저지를 상이니까…”
김 과장의 오른팔이자 좀 전에 경미 씨로부터 ‘조선인 친일파 순사’라는 산뜻한 별명을 획득한 박 대리가 한 마디 거든다. 제일 끗발 낮은 박 대리까지 한 마디 할 수 있다는 것은 3번 면접자가 들어왔어야 할 시간을 넘겼다는 것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