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괜찮아, 굉장히 아프지만 영은 이미 떠났어. 육신의 아픔따위는 이제 전혀 상관없다구. 뭐해? 얼른 네 친구 살려야지. 자살영으로 구천을 떠도느니 이렇게라도 이승에 붙어 있는게 나아. 얼른 해. 주머니 끈만 잡아 당기면 돼…. 야!! 너 공부 잘하는거 맞냐? 끈 풀라는 소리를 지금 몇 번을 해?”
윤조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여전히 피범벅이 되어 아스팔트에 들러붙어 있는 수연의 몸을 내려다보다가 한주의 닥달에 그제사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손가락을 겨우 진정시켜가며 주머니의 끈을 잡아 당겼다. 주머니는 텅 빈 듯 보였고 수연의 몸도 여전히 미동도 없이 아스팔트위에 널부러져 있다. 윤조가 충격과 혼란스러움에 가득찬 눈빛으로 한주를 돌아볼 때 놀랜 차주가 뛰쳐나와 황급히 수연의 몸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 아직 살아 있다… 얼른 119, 119…”
돈이 꽤 많아 보이는 화려한 스타일의 중년 여자는 혼잣말을 계속 중얼거리며 황급히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내다 두 번이나 떨어뜨린 다음에야 겨우 119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이제 됐고… 가자.”
이번에도 윤조는 대답할 겨를도 없이 어느 새 자신의 방 침대 끝에 걸터 앉아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되는거야??”
“뭐냐? 하루 종일 같이 저지르고도 나한테 물어보면… 알고보니 머리는 딸리는데 굉장한 노력파였군.”
“그럼 결국 뭐야. 수연이 몸은 살았는데 수연이는 죽은거네? 아 말이 정말 이상하네… 미나 몸은 죽었는데 미나는 살은거야?”
“같은 사건도 참 촌스럽게 말하고 있네.
육체는 생명력이 없어. 혼이 다라고… 인간들은 보이는데에 집착하지만 결국 혼이 없이는 다 껍데기라고…
그러니 결국 수연은 팔자대로 오늘 마감한거고, 미나는 죽을 날 제가 스스로 정했는데 그나마도 맘대로 안되는 팔자가 희한한 년이고… 그리고 넌 그냥 오지랖 넓어 신세 망치는 년… 나는 연급따위론 넘어갈 수가 없는 신세니 닥치는대로 해보는 중이고… 그런거야. “
“그럼… 그럼 수연이 혼은 어딨는거야? 걔도 그럼 이제 내 눈 앞에 보일참이니?”
“아니, 걔는 애매한게 없어. 그냥 박복하게 태어나 박복하게 죽었으니 아마 그 전생에 지은 죄는 거의 다 갚은걸걸… 그런데 짧아도 그리 착하게 산 건 아니니, 연급에 들렀다가 어차피 상옥에 떨어질거야. 구천을 헤매고 다니는 것들은 제일 질이 낮은 것들이지… 나를 포함해서… 흐흐”
한주는 썩 기분 좋지 않은 웃음을 흘렸다.
“대체 연급은 뭐고 상옥은 뭐야?”
“대충 연급은 재판 받는데고, 상옥은 인간들이 부르는 지옥 중 그나마 좀 나은 곳이야. 거기서 좀 잘 하면 다음 번엔 좀 낫게 태어나기도 해. 대부분은 그 수준으로 태어나지만 말야. 도둑놈으로 생을 마감한 놈이 다음 생에 갑자기 신부로 태어나진 않는다구. 다 노는 바닥이 있어.
인간들이 가장 착각하는게 뭔지 알아? 고생을 죽도록 하면 빚을 갚았다고 생각한다는거야. 수연인가 걔도 걔가 지지리 없는 집에 하루종일 술에 노름에 돈 떨어지면 기어들어와서 분풀이로 딸년이랑 어미를 번갈아가며 패는 놈을 애비로 만나 죽어라 고생했지만 그건 그거고 걔가 짧은 평생을 내내 다른 인간들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피해의식에 절어서 저지른 업은 별개란 거지. 뭐 물론 그런 상황에서 덕을 쌓는 인간은 거의 없지만…”
태어나 가장 피곤한 날인것이 분명한데 이상하게 윤조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알아듣기 힘든 말들만 잔뜩 늘어놓던 한주는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여느 때처럼 어느 새 사라지고 이미 없었다.
조 여사는 송북구 일대에선 알아주는 큰 손이었다.
열 네 살에 가출해 안 해 본 것이 없었다는데 대부분 ‘카더라’일 뿐 아무도 그녀의 젊은 시절을 같이 겪은 이는 없었다. 스물 아홉에 40살이 많은 땅부자와 결혼했다가 남편이 죽고 그가 남긴 재산으로 요정을 굴리면서 건물을 사고 팔아 큰 손이 되었다. 첫 번째 결혼 이후로 벌써 세 번 째 이혼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돈은 넘치도록 많은데 마음을 붙일 곳이 없어 허전한 그녀는 매일 밤 본인의 요정에 틀어박혀 혼자 술을 마시다가 산 위의 맨션으로 돌아가곤 했다. 지역 경찰에게 공짜 술과 아가씨로 접대를 해 끈끈한 유대관계를 형성한 조 여사에게 매일 밤 음주운전 따위는 대수롭지 않았다.
‘제기랄, 믿고 쓸만한 인간이 주위에 하나도 없으니… 인간은 돈으로 살 수가 없는건가…’
거의 십 년을 데리고 있었던 경리가 공금을 횡령한 걸 찾아냈을 때 조 여사는 그녀를 어떻게 하는 대신 뱃속의 아이를 없애게 했다. 몸으로 때우고 어떻게든 돈으로 갚겠다는 그녀의 하소연에 조 여사는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밑의 수하에게 처리를 보고받고 그녀는 술을 마셨다. 오래 전 첫 번째 결혼생활 중 외도로 생긴 아이를 두 번 낙태한 후 그녀는 자궁척출술을 받았다. 그녀는 영원히 자기는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증오했다.
‘남의 것을 탐했으니 당연히 제일 아끼는 것을 내놓는거지.’
여전히 그녀는 그녀를 배신한 경리를 향해 저주의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다시금 치밀어 오르는 부아에 거칠게 핸들을 꺾었다.
“쿵!”
“에이.. 씨…”
조 여사는 순간 정확히 사람을 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당황시킨 것은 이 사거리에 감시카메라가 있다는 것이었다.
‘귀찮게 되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