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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죽을 운명인 인간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
“아… 오늘 어차피 죽게 스케줄 되어 있는, 그러니까 어차피 사주팔자상 오늘 이승을 떠나기로 예약되어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나요? “
“난 네 년놈들이 무슨 작당을 꾸미는지 다 알고 있다. “
“아… 그러면 굳이 설명 드릴 필요는 없어서 다행이네요. 좀 급한 것 같은데, 빨리 말씀해 주시면…”
“그런 짓은 함부로 하면 안 돼! 뒷감당이 아주 어려울거야.”
“ 어차피 말하게 될 거면서 그만 뜸들이고 말하는게 어때?”
성숙은 아니 성숙의 몸에 든 주정뱅이 영은 다시 막걸리를 통째 집어 꿀꺽거리며 들이마시더니 한주를 노려보았다.
한참을 한주를 쏘아보던 성숙은 다시 윤조쪽으로 시선을 옮긴 후 한층 낮은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했다.
“묘날 묘시에 태어난 박복한 여자애다.
태어나지 말았으면 더 좋았을 놈 밑에서 태어나서 하루도 마음 편하게 못 살다가 오늘 자시에 비명횡사할 팔자야. 그런데 수상한건 그 년을 치는 운전하는 년이 억수로 운이 좋은 년이거든. 그 년 팔자엔 오늘이 한을 푸는 날로 되어 있어.
산을 넘어 남동쪽으로 오 리 쯤 내려가면 영혼이 빠져나가기 전의 주머니를 구할거야.”
“아니 업신들은 무당 몸에만 들어가면 못 알아듣는 말을 쓰고 난리야. 그냥 대충 어느 동네 어느 사거리인지 말하라고! 편하게 말하면 될걸 꼭 동서남북 찾고 때가 어느 땐데 리 찾고 지랄이래.”
한주가 앙칼지게 뱉자 성숙의 동공이 약간 흔들렸다.
“다리 밑에 편의점 있지? 그 옆에 분식집 골목 밑에 작은 횡단보도라고 이 새끼야!”
성숙이 내는 아저씨 목소리가 어느 새 익숙하다고 느끼려는 찰나 윤조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뜨자 성숙이 말했던 편의점 앞 횡단보도가 보이는 건너편 전봇대위에 한주와 나란히 걸터 앉아 있었다.
“묘날 묘시 어쩌고가 누구…야…? 잠깐만.. 이거 학교 밑에 분식점 골목 앞 그 길이네… 동네를 말도 안 했는데 잘도 찾았네? “
“말했잖아. 그냥 영들은 인간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이 있다고 … 알아도 말 못하는거야. 그런데 업신이 되면 말해야 하는게 거꾸로 규칙이라고. 그래서 주정뱅이 영을 이용했을 뿐이야. “
“… 알고 있었다면 굳이 나를 데리고 다닐 필요는 없잖아. 네가 혼자 해도 되는 거 아니었어?”
“아니… 이승에 가까운 영혼을 건드리는 위험한 일은 혼자 할 수 없어. 그런 일에 선뜻 뭐 하나를 걸 정신나간 인간 하나가 필요해. “
“… 미나를 살리기 위해서 … 내가 … 뭘… 하나 내놓아야 한다구?”
“만약 그러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남의 일에 괜히 끼어들기 싫다면 그냥 없던걸로 하면 돼. 내일이면 걔는 나랑 같이 같은 곳을 떠돌게 될거야. 시간도 공간도 없는 미친 곳에 갇히는거지… 그래도 알게뭐야. 네 일은 전혀 아니니까… 네가 끼어들겠다고 한 것 자체가 어이없는 일이지…”
한주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에 차가운 눈빛으로 공지사항을 알리는 교도관처럼 덤덤했다.
“걔를 살리면 내 목숨을 내 놓거나 그런거야?”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수명을 좀 나눌수도 있고, 또는 네가 아끼는 무언가를 잃을 수도 있지. 어떤 걸 내놓아야 할지는 나도 몰라. 난 그냥 규칙을 설명해주는거야. …
그런데, 너…
죽는게 두렵니? 의외인걸? 나는 네가 꽤 오래전부터 차라리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말야…”
“글쎄… 너무 당황스러워서…”
“적어도 너는 네가 선택을 할 만한 복은 있어. 어쨌건, 곧 일어날거야. 얼른 정해. 마음. 살릴거냐?”
“… 응. 일단 살려. 그리고 나도 아직은 안 죽어. 알았지?”
“죽어야 한다고 말한 적 없어. 그리고 나도 몰라. 네가 뭘 내놓아야 할지는… 난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고 그럴 자격도 없는 구천생이라 해당이 안되지만…
살아 있는 것이 뭣 같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알고 보면 가장 여러가지 특권을 누리고 있는중인지도 몰라. 적어도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 몇 가지는 있으니까… 그것의 의미가 얼마나 큰지 인간들은 모르지만 말야. 그래서 마구 허비하고 있지.”
윤조는 한주의 아리송한 이야기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살린다고… 그래, 내가 뭘 해야 하는거야?”
“내가 지금이라고 할 때 옆에 있다가 주머니 입을 열어. 내가 넣고 가두었지만 난 가둘수만 있을 뿐, 다시 열어 살 수 있게 하는 것은 산 사람만 할 수 있어. 그래서 그 끈은 내가 당겨봤자 열리지 않아. 네가 필요한거야.”
한주는 눈 앞에 작은 비단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짐작컨대 작은 주머니 안에 미나의 영혼이 들어있다. 이미 잘 봉인되어 있지만 바람에 날리기라도 할까 윤조는 얼른 주먹안에 말아쥐었다.
한주는 어느 새 입을 다물고 건너편 횡단보도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밤중의 동네 사거리는 한산했다. 24시간 영업중인 편의점의 불빛이 환하긴 했지만 간간히 짖는 동네 개 소리외엔 온통 멈춘듯 고요했다. 적막을 깨는 것은 가끔 한밤중의 드라이브를 즐기는 과속 차량과 배달 오토바이들 뿐이었다.
“저기.. 보이냐?
묘날 묘시에 태어난 박복한 십대녀….”
윤조는 잠깐 시선을 딴데 두었다가 한주의 말에 다시 횡단보도 쪽을 바라보고는 깜짝 놀라 얼어붙었다.
옆 선이 터져 벌어진 낡은 고무 슬리퍼를 끌고 아직 10월이긴 해도 밤 바람이 제법 매서운 이 날씨에 맨 다리를 내놓은 채 정신없이 분식집 골목 사이에서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수연이었다.
“참 열심히 하는 애였는데.. 그치?
큰 팔자는 어쩔 수 없다니까… 자 우리도 이동하자.”
윤조가 놀래 뭐라 말을 할 새도 없이 한주와 윤조는 어느 새 수연에게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다가가 있었다. 한주는 수연에게 보이지 않으려 윤조를 등 뒤에서 감싸 안고 있었다.
“자… 이제 얘가 신호등도 안 보고 건널거고…”
여전히 윤조는 입이 얼어붙어 눈 앞의 수연을 놀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한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은 일어났다. 한적한 밤이라고 속도도 낮추지 않고 급커브를 돌던 외제차 한 대가 신호등을 쳐다도 보지 않고 길을 막 건너기 시작했던 수연을 들이 받았다.
윤조는 수연의 가녀린 몸이 공중으로 높이 솟구쳤다가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그대로 내리 꽂히는 것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