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청계산에 중요한 볼일이 있다더니만... 이거였군.”
한주가 알 수 없는 혼잣말을 했지만 윤조는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아줌마.... 좀 있다가 신이 왔을 때 이런거 물어도 되요? 오늘 죽을 팔자인 사람이 어딨나... 이런거?”
“죽을 팔자인 사람 찾는거야 쉽지. 그건 냄새가 고약해서 바로 찾을 수 있거든.”
“네…”
“...뭐여! 지금 영혼을 바꿔치기할 셈인거여? 쯔쯔.... 그게 아다리가 딱 맞아야 하는디... 쉬울거 같냐? 그라고 바꿔치기할 영이 싫다고 하면 말짱 도로묵인거여.“
“싫다고 할리 없어. 누가 죽을 예정인지만 알려주면 돼. 그 뒤는 내가 알아서 해.”
“자살영 주제에 능력있는척은... 야! 네가 살았을 때나 대가리 좋고 똑똑한 도련님이지 죽어서도 그런줄 아냐! 넌 영중에서 가장 천박한 자살영이야!”
“가장 천박하지만... 가장 힘이 세다는것도 지금 알아가는 중이거든? 혀를 뽑아줄까? 무당짓 못하게?”
“아이고... 왜 그러십니까요…”
양보살은 정말 거짓말처럼 잔뜩 기가 죽어 조용히 운전만 하기 시작했다.
“뭐냐? 이런 거 건드린다고 신 들리는거 아니거든? 거 보지만 말고 젯상 좀 같이 거들래?”
늦가을과 초겨울 중간쯤의 청계산은 칼바람이 계곡을 헤엄쳐 다니며 뒤집어 놓아 온통 싸늘하고 추웠다. 얇디 얇은 한복으로 갈아 입은 양보살과 성숙은 추위에 몸을 떨며 젯상을 차리고 있었다.
윤조는 하는 수 없이 과일을 닦고 쌀을 담는 것을 거들기 시작했다.
‘아 진짜 드럽게 춥네... 야! 이 한주! 보고만 있지말고 좀 거들어!’
“뭘 다 선수끼리 있는 마당에 귓속말을 하고 지랄이냐. 지금 할머니가 다 들리니께 빈정상하게 귓속말 하지말라신다... 어허!”
양보살의 핀잔에 윤조는 괜히 헛기침을 해댔다.
“난 여기 찌그러져 있어야 해. 내가 네 친구 영을 감췄는데 걔가 깨려하면 가서 집어와야해. 그리고 보통 다른 영들이 나랑 있는걸 싫어해...”
“그래? 너 귀신 사이에서도 왕따냐? 그런데 그 아저씨는 뭐가 그리 좋다고 너한테 그리 붙어 다닌대?”
“그 치는 나한테 빚이 있어... 아니 그런게 있어. “
“뭐가 그리 빚 지고 빚 받고 그런게 많냐. 돈개념도 없는 것들이 빚은 어지간히 셈하고 있네.”
엉망진창이 된 슬픈 광대의 마스카라 자국처럼 처연하게 늘어진 느티나무 중간에 걸터 앉은 한주는 달빛을 등에 지고 더 퍼렇게 달아오른 채 골똘히 말이 없었다.
젯상이 마련되자 성숙은 습자지처럼 얇은 소복차림으로 망설임 없이 계곡에 첨벙 들어갔다. 윤조는 얕게 소리를 지를 뻔 한 것을 가까스로 참고 멍석 끄트머리에 꿇어 앉아 눈만 튀어나오게 뜨고선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입수를 마친 성숙이 덜덜 떨리는 몸을 가까스로 멍석위에 앉히고 알 수 없는 주문을 외기 시작하자 양보살도 웃음기 사라진 차가운 얼굴로 연신 기도문을 외우며 날이 퍼렇게 선 작두를 마지막으로 손보기 시작했다.
“내가 금일 공사가 다망한 와중에 이리 행차한 것은!
우리 딸래미 머리를 얹어줘야겠응께!
청계산을 굽어 살피시는 우리 신령님, 치악산에 장군님, 북한산 신령줄기 여러님들!! 부디 부디 예쁘게 봐주시고! 좋은 제자 되게 해주시고! 앞으로 공덕 많이 쌓는 옳은 제자 되게 하소서!”
내내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던 양보살이 갑자기 부채를 홱 펼쳐들고 냅다 고함을 지르자 윤조는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 뻔 했다.
양보살이 연신 상반신만한 큰 부채 둘을 정신 사납게 빠른 템포로 흔들어댈 때였다.
가뜩이나 추운데 갑자기 고드름으로 뺨을 맞은듯 차디 찬 바람이 한 줄기 닥치는가 싶더니 눈 앞에 흉측한 영 하나가 서 있다.
“아악!! 아이 씨. 저 새끼는 또 왜!!”
윤조는 찰나에 보았지만 대번에 그날 밤 죽은 변태 영인 것을 알아보았다. 뒷머리가 깨진 채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변태 영은 흉측한 면상에 이상한 웃음을 띈 채 아랫도리를 벗어제끼고 있었다.
“아이고... 잡귀가 들어오고 지랄이여. 얘 얘 하는 꼬락서니 좀 보게나. 성숙아 아가야! 단디 마음 묵고 쫓아내! 썩 꺼지라고 하란 말이다! 아 거 참.... 답답허네... 아가 와이리 굼뜨고 답답시럽냐. 안 되겄다. 야이 잡것아! 얼른 나가지 못할까!! 어이!! 꺼지거라!! 훠이 ! 훠이!!”
성숙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소복을 마구 풀어헤치기 시작하자 양보살은 기겁을 하더니 쑥을 금세 태워 연기가 풀풀 나는 쑥다발로 성숙의 몸을 사정없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곧 성숙은 멀쩡한 상태로 돌아왔지만 아주 지쳐 있었다.
“... 잠깐 쉬었다 하자…”
양 보살도 땀에 흠뻑 젖은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성숙의 옆에 걸터 앉았다.
“좋은 신 받기는 글렀어야. 중급 중에서 그나마 골라보드라고. 귀신들이 어찌나 인물을 따지는지... 안 이쁜 년은 무당 되도 수입도 없당께. 하빠리들만 붙어싸서... 돈 좀 벌면 한번 싹 다 갈아엎자. 그라고 신도 업그레이드 해서 받으면 되야. 처음엔 걍 대충 대충 열번에 한 세 번은 맞추는 놈으로 잡으면 디야.”
성숙은 얼굴의 땀을 닦느라 안경을 벗으며 힘겹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안경을 벗은 성숙의 눈은 꽤 예쁜 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이미 삶에 지치고 무언가를 포기한 듯 공허해 보였다. 윤조는 한 번도 성숙에 대해 딱히 궁금해 해 본 적이 없는 것이 조금 미안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