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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무슨 사고?”
“… 그냥 가볍게 한 소리에 토 달지 말고 김 대리님, 어여 이거 한 입 해.”
찝찝한 단어를 집어 내자 남자가 말끝을 흐리면서 깻잎에 싼 소금구이 한 점을 얼른 입에 밀어 넣는다.
“내가 핵심을 집어내니까 당황한 거지? 악! 뭐야… 오빠 왜 마늘 세 개나 넣었어. 죽일 셈이야?”
“마늘이 몸에 좋아. 어차피 오늘은 보험이 있어서 뽀뽀 못 하니까 많이 먹어 둬.”
장 선생은 또 질문에 대한 답 대신 허접한 소리를 해댔다.
“오빠… 무슨 사고? 무슨 보험?”
“이 아가씨가 꽤 집요한 걸 깜빡했네… 너 학교 때 국어 못 했을 것 같아… 그냥 우스개 소리야. 그게 핵심이 아니고.”
“어머? 무슨 그런 섭한 소리를? 나 수학을 못 한 건 사실이지만 국어는 잘할 수밖에 없었어. 그것까지 망치면 대학 레벨이 완전 달라졌거든.”
“… 아가씨… 이과 아냐? 그런데 지금 수학은 못 했고, 국어를 잘했다고 하는 건가?”
이런 게 재밌다. 이 남자에겐… 진짜 깔깔대면서 웃고 있다.
“뭐, 국어도 허당이었지 뭐. 너 국어 선생이 33문제 3점씩 해서 내고 1점은 그냥 주려고 ‘윗글의 제목을 쓰시오’ 냈는데 학교에 가방만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꼴찌도 맞추는 문제를 두 시험 내리 전교에서 유일하게 틀렸잖아. ‘메밀밭’ 이랑 ‘재수 좋은 날’! 기억 안 나?”
“… 역시 남의 흠을 기억하는 기억력은 아이큐랑 상관이 없다는 것이 여기서 증명되네.”
오늘도 이 희한한 세 명의 조합은 사이좋게 장어를 뜯으면서 시답잖은 농담이 대부분인 대화로 이 밤을 채우고 있지만, 돌아보면 즐거운 나날이란 이렇듯 고민 없이 하릴없는 농담이나 주고받던 시절이다.
“운전해야 해서 술을 한 잔 못하는 게 아쉽네… 둘이 한 잔 해!”
장 선생이 대리만족이라도 해야겠다며 백세주를 주문한다.
“행님, 한 잔 하이소. 제가 운전할께예. 저 운전병 출신 아닙니꺼.”
남의 데이트에 비싼 장어 꼽사리 껴서 얻어먹는 주제라 술 기사라도 자청해야겠다고 생각한 양심 있는 선배가 희생을 선언했다.
“오메… 웬일이래. 술 귀신이 술을 다 양보하고…”
“내가 말했제. 나는 자제가 된다 안 카더나. 그래서 나는 중독이 아닌 기라.”
“아, 진짜? 나 강일 씨 너무 예쁘다니깐. 그렇다고 내가 오늘 기사로 데리고 온 건 아니고… 알지?”
“아… 전혀 그쪽으로 생각 못 했지 말입니다. 은근히 지금부터 의심이 가지 말입니다.”
요새 잘 나가는 주류는 오십세주라며 마시지 못하는 자가 소주를 추가로 주문했다.
사람은 셋인데 술을 먹는 사람은 둘이라 잔이 계속 빨리 돈다. 원래 술은 딱 첫 잔만 쓴 법이다. 그걸 왜 견디는지 모르겠으나 그 한 잔을 견디면 갑자기 술이 달다는 매직이 일어난다. 그렇듯 작은 미라클은 생활 곳곳에 숨어 있다.
“부모님 건강하시지?”
흔한 질문인데 어색한 이유란 남자가 내 주변이나 혹은 내가 살아온 길을 물은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응, 아직 젊으신데 뭐… “
무심코 대답했다가 급히 입을 닫았다. 남자의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한 것이 떠올랐다…
“맞아, 아직 젊으시니까…”
세상에서 두 번째쯤 흔한 질문인데 괜히 어색해져 버렸다.
“오빠 어머니도 건강하시지?”
“음… 우리 집은 뭐랄까, 살아 있는 사람들 중 남자들은 몸이 아프고, 여자들은 마음이 아프지.”
“행님… 오데 안 좋습니꺼?”
“… 아직은… 아직은 아니야.”
그래, 절대 어디가 아픈 사람은 아니다. 백수인데도 아침마다 운동하고, 수영하고, 하루 종일 부지런하게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 몸이 아플 리가 없다… 없는데… 그런데 저 ‘아직은’ 이라는 단어는 또 희한하게 가슴에 박혔다.
“의사들이 건강 염려증이 또 의외로 심하다 카데예.
지는 어렸을 때 의사는 조금 아프면 혼자 주사 놓고 하면서 평생 멀쩡할 줄 알았어예.”
“아는 게 병이라는 옛말은 맞는 편이야.”
또 남자는 애매한 대답을 하더니 대리기사가 있어 든든한지 마음 놓고 또 한 잔을 거푸 비웠다.
“천천히 마셔. 내일 속 아파.”
“걱정해 주는 거네, 김 대리? 걱정은 사랑해야 생기는 이차적 감정이라 하던데… 맞나? 김 대리는 나를 사랑하나?”
취했다. 이 남자.
취하면 좀 흐트러지고, 흐트러지면서 사람이 조금 쉬워진다.
“어, 그런가 봐. 나는 그렇게 오빠가 걱정이 돼. 참 이상하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어떤 사람을 요즘은 매일 같이 걱정하고, 기다리고 있어. 그래서 나는 사랑이 피곤한 거란 걸 깨닫는 중이야.”
“우와… 술 안 먹고 취한 인간들 옆에 있는 거, 이거 엄청 신선하고 민망하네? 뭔 가시나가 한 번 튕기는 것도 없이 덥석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노. 취했나.”
“강일 씨, 원래 사랑에 빠지면 기본적으로 좀 취해 있는 법이지.
그런데 술 보다 더 위험해. 술은 얼마나 지나면 깨는지 대충 아는데 사랑은 언제 깰지 모르니까…”
“캬… 명언이네예, 행님.
사랑 성공 호적설 보다 훨씬 더 낭만적이고예. 그런데 한편 얄궂네. 보통은 요렇게 초반인 상태일 때는 둘이만 티 안 낼라 하고 세상 사람 다 알게 좋아하는 냄새를 풍기는데, 이 둘은 확실하게 둘이 들러 빠졌는데 야릇하게 불안한 냄새를 풍기지…”
방청객의 촌철살인에 두 남녀 주인공은 말이 없어졌다. 강일은 지금 우리한테서 슬픈 이별의 냄새가 난다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