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에헤이 이 시골 양반들이 서울에 아는 데라고는 강남하고 신촌 딱 두 군데네. 막히는 구간 지나서 밟기 시작하면 금방이니까 좀만 기다리소.”
터널 쪽으로 가면 강남, 반대편 광화문 방향이면 신촌… 그렇게 생각한 시골 인간 둘은 입을 다문다. 부푼 꿈을 안고 서울에 상경했지만 그렇다… 서울살이 6년인데 가 본 동네 빤하고 그 넓은 서울에 모르는 곳이 더 많다. 서울에 대학이 그리 많은데 딱 다니는 대학이나 아는 애 다니는 대학가 몇 군데 빼고는 모르는 곳 천지고, 넓은 곳에 내놓는다고 우물 안 개구리 습성이 어디 가는 건 아니란 사실을 희한한 순간에 깨닫게 된다.
“행님, 어디로 가실 건지 은근히 마 기대가 됩니더. 그라고 이렇게 셋이 노는 거 염치없지만서도 지는 참 좋네예.”
뒷자리의 염치없는 작자는 한껏 들떠 있었다.
“아직 어딘지는 몰라도, 우리 같은 뚜벅이들은 가고 싶어도 못 가는 데 같습니더.”
방금 ‘안녕히 가세요’ 팻말을 스치면서 서울을 빠져나온 차 안에는 항상 승객들의 음악 취향을 고려하는 장 기사의 선곡인 쇼팽의 녹턴이 흘러나오고 있다.
“강일 씨, 강일 씨 후배가 피아노를 잘 치더라고. 어제 나만을 위한 독주회를 해줬는데 아마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거 같애. 한 이십 년 후에 다시 쳐도 그대로라면 좋겠어.”
“오, 이십 년 후에도 내 피아노 들어줄 거야?”
말했지… 상대의 말, 행동 사소한 거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집착하게 된다고… 그게 사랑이라고… 그리고… 그러한 집착은 들키면 상대를 질리게 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고… 그럼에도 그의 말 한마디 ‘이십 년’ 이란 단어에 가슴이 이토록 설레는 것이다.
“글쎄… 그럴 일이…
그건 뭐 그때 가서 볼 일이지만… 만약에 내가 못 듣는 이십 년 후라도 너는 그 곡을 칠 때 적어도 나를 떠올리겠지. 이렇게 내가 주문을 걸어두면 말야…”
또… 또…
그의 애매한 부정이 또 마음을 후벼 팠다. 심기가 불편해지고, 달랬다가 밀어냈다가 하는 남자가 얄밉기 짝이 없다.
“됐어, 오빠가 이십 년 후에 또 들을 생각이 아니라면 난 다신 녹턴은 치지 않을 테야.”
겨우 한다는 말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다. 사랑을 하면 왜 유치해지는지 알겠다. 뇌를 거치지 않고 마음에서 입으로 말이 토해져 나오고, 우아함과 가식을 관장하던 뇌의 일부분이 마비가 되어 5세 여아 수준의 거친 행동거지가 말릴 새도 없이 튀어나오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어른이 되면서 살짝 접었던 솔직함이 마구 되살아나고 그것은 ‘유치하다’라고 어른 세계에서 정의되는 그것이다.
“야가 피아노를 쳤다고예? 아… 우리 김 대리 진짜 마음을 다 내놓기로 했나 보네… 엠티 가서 멜로디온도 안 한다고 집어던지던 그런 성질인데…”
“오랫동안 손 놓은 거에 비해 아직도 잘하던데… 왜 그렇게 안 치려고 해?”
이상하게 장 선생은 확실히 강일이 오빠가 끼면 말이 많아졌다. 이 남자는 나와 둘만 있으면 낯을 가리나…
“야가 화장을 잘한다 아입니꺼? 누구 보여줄라고 그리 열심히 화장하냐 물으면 진짜 성질내요. 누굴 보여주다니! 거울 볼 때 내 기분 좋으려고 열심히 하는 기다. 라고 대답하고요, 오늘 치마가 좀 짧은데 누구한테 잘 보일라고? 물으면 난리 나요. 보여주긴 누굴 보여주냐며 가진 게 다리라 좀 내놓겠다는 거다. 뭐 이러는 애니까 아마 같은 맥락이겠지예. 지 귀 즐거울라고 피아노 잘 치는걸껄요. 행여나 누구 들려주려고.. 하고 물음 또 칼 쏘아요.”
역시 저 인간은 나를 가감 없이 너무 잘 알고 있지만 듣다 보니 세상 혼자 사는 여자 같지 않은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겠다.
“그래도 어제 와인 바에서는…”
“그래도 어제 와인 바에서는 분명히 나 들으라고 쳐 준거 맞으니까 정말 영광이네. 그리고 당연히 어떤 다른 사람보다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화장하고 차려입고 특기도 연마하는 거지. 정말 올바른 자기애를 갖고 있어 나는 더 마음에 드는데? 듣고 보니 어제 나만을 위한 연주도 더 소중해졌어. 고마워, 김 대리.”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남자는 이미 내 마음을 여우처럼 잘 알고 있다. 다행이면서도 살짝 억울하다… 원래 생색은 내 입으로 내야 제 맛인데 말이다. 그래도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한 ‘선물’이 그를 위한 것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원하게 뚫린 자유로를 타기 시작했나 보다.
단체로 통일 전망대를 들러 코 앞의 같은 핏줄 다른 나라를 바라보며 분단국가의 현실을 체험했던 이후 거의 처음 타는 길… 연애를 안 해 본 것 치고 남자는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가득한 편이다.
“쪼매 먼데로 가신다길래 장흥이나 백마 요런 데인 줄 알았는데 조금 더 늙수그레한 데로 지금 가고 있네예?”
그렇지 뭐, 강일이 오빠나 나나 서울 근교 아는 데라고는 엠티 장소가 다니까… 우리에겐 놀만한 멋진 근교란 끽해야 양수리, 대성리 같은 ‘리’ 시리즈 혹은 양평, 가평, 청평… 같은 ‘평’ 지역, 혹은 장흥, 백마, 춘천 정도의 기타 지역이 있다. 자유로를 타고 엠티를 가 본 적은 없다. 즉, 기차가 가지 않는 곳은 우리 능력 밖의 지역들이다.
“그렇지, 남한 산성 근처에 가면 보양식들이 많아. 우리 밀레니엄 시대를 안전하게 열기 위해 불철주야 고생하시는 김 대리, 오늘은 내가 몸보신시켜줄라고…”
아무래도 나도 모르던 내 이상형은 ‘맛집을 많이 알고’ 데려가 주는 남자였나 보다…
막히지 않아도 꽤 멀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장어집은 우리만 모르고 세상 사람은 다 아는 곳인 듯 주차장에는 차들이 꽤 서 있고, 날씨도, 시간도 그저 그런데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근교의 땅값은 견딜만한 모양인지 음식점이 정말 크다. 대청마루를 굽이굽이 돌아 미리 예약한 방인 듯 한 상 이미 가득하게 차려져 있는 곳으로 아줌마가 안내를 했다. 횟집에 가면 흔하게 깔리는 하얀 기름종이를 식탁보 삼아 주종목은 장어인 게 확실한가 본데 깔린 반찬만 한 삼십 가지 된다. 순간, 이 남자랑 헤어질 때쯤이면 살이 엄청 불어 굴러다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아… 그러고 보니 이미 이 남자와 헤어질 것은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나 보다…
“보양식중 진짜 효과가 있는 것들은 잉어찜이나 옻닭백숙 이런 게 있는데 그런 건 절대 안 먹을 여인이니까 만만한 장어로 골라봤어. 어차피 메뉴는 딱 간단하게 장어 구이니까 알아서 시켰거든. 맛있게 먹자.”
아줌마 귀에 도청 장치라도 있나,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금구이 반 관, 양념구이 반 관을 양손에 진지하게 들고 바로 나타나서 석쇠에 올려준다. 망설임 없이 숙련된 그녀의 손길을 보고 있자니 어떤 분야건 본인이 하는 일에 자신감이 선행되어야 처음 만난 상대에게도 큰 신뢰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저렇게 노련한 손길로 구워 주는 장어는 가짜 장어라도 맛있을 판이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전문가로서 어느 쪽이 더 맛이 있습니까?”
쓸데없는 질문은 세상에 없다고 믿는 강일이 손길이 바쁜 장어 장인에게 즉석 인터뷰를 시도했다.
“아 말해 뭐해요, 소금구이죠. 양념구이는 뭐랄까, 혹하긴 한데… 남자로 치면 나쁜 남자? 혹하지만서도 이내 질리지. 담백하게 본연의 맛을 살린 이 소금구이가 진국인 남자랑 맞먹지.”
“오, 그런 멋진 비유! 그라몬 여기 두 남자는 보실 때 어떻게, 소금구이입니까, 양념구이 쪽입니까.”
쓸데없는 질문을 해대는 사투리 젊은이가 싫지 않은 모양 아줌마는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오호호호, 그걸 우째… 보자… 마, 총각은 소금구이!”
“역시!! 사람 보는 안목 있으시고!”
진국인 남자라는 소리에 기분이 좋은 강일이 목소리를 드높인다.
“일단 나쁜 남자 하기에는 뭔가 쪼매 부족해.”
“아니, 아줌마! 담백하니 본연의 맛을 살린 게 소금구이라매!”
“됐어, 나는 거짓말은 못 해. 우리 집 단골 양반은… 아이고 마… 오데 우리 장 선생님을 장어 따위 미물에다가 갖다 대겠어요.”
“우와 이 아주머니…”
빈정이 제대로 상한 복학생이 한 마디 더 하려는 데 아줌마는 이미 본인의 소임을 마치고 신속하게 몸을 일으켰다.
“너무 태워서 드시지 말고 맛있게 드세요.
필요하면 거기 벨 누르시고…”
“양 봐봐, 둘이서 못 오는 이유를 알겠지?”
부정할 수 없다. 저 양을 둘이서만 먹는다면 내일 당장 장어로 변신해도 놀랍지 않을 판이다.
“에이, 그렇게 핑계 대시면 섭하지예. 사실 행님 저랑 같이 만나는 거 너무 좋아하시잖아예. 아닙니꺼”
“허허, 부정할 수 없구만.”
이 남자는 나랑 채팅방에서 만났고, 그리하여 내 선배 오빠를 알게 되었는데 가만 보면 둘이 무슨 군대 동기쯤 되는 모양 친하다. 이걸 뿌듯하다고 해야 할지 괴기하다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어느 의미에서 우리의 보험이지, 강일 씨는…”
“보험예?”
“응, 보험… 사고 나면 어느 정도 충격 완화해 주고, 잃은 거 보상도 해줘서 위로가 분명히 되어주는 보험. 그러니까 보험료라 생각하고 부담 없이 많이 먹어 주세요.”
이 남자가 딱히 굉장히 어려운 단어를 쓰거나 하는 스타일은 분명히 아닌데, 희한하게 한 번씩 수수께끼 같은 소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