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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Nov 08. 2024

이별 보험

(5)

“장어들도 좀 드이소. 스테미나가 필요한 사람이 내가 아닌데… 내가 다 먹고 있네…”


슬쩍 거슬리는 소리를 던진 것이 걸리는지 이내 화제를 돌리려고 애쓰는 선배 오빠가 건네는 장어 한 쌈을 받아먹는데… 이미 배가 불렀나, 아까만큼 맛이 있지가 않았다. 


“에헤이… 비싼 장어를 왜 이리 남긴대… 수제비 매운탕 드실 수 있으시겠소?”


대충 장어를 끝냈겠거니 하고 매운탕 솥을 들고 들어오던 아줌마에게도 한 소리 들었다. 

그러게 말이다. 아까 이 방에 앉을 때까지만 해도 입맛이 돌아도 너무 돌아 장어 모자랄까 걱정이었건만… 역시 입맛을 지배하는 것은 마음이었다. 아니면 술이 들어가니 입맛이 마비가 되었거나…


“오… 수제비도 고무만큼이나 쫄깃쫄깃한 것이 예사롭지 않녜예!”


방청객은 어느새 수제비에 빠졌다.


“여기 오는 길 하나도 안 어려우니까 앞으로 종종 오면 되겠네.”


“에이, 길은 쉽지만 뭐 여기 택시 타고 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행님 없이는 여기 오기 어렵지예.”


잘한다. 내 선배. 남자가 또 은근슬쩍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것을 잘 차단했다. 


“어떻게 알았지? 강일 씨가 우리 윤조 데리고 가끔 오라고 할 참이었는데…”


“그니까예. 아니 왜 멀쩡한 남자 친구 두고 만나면 싸우기나 하는 고향 선배랑 맛집을 오겠습니꺼.”


“그 남자 친구 내년에 병원 복귀하면 다시 하루에 배달 도시락 두 개 겨우 먹는 신세로 돌아가야 하니까 그렇지.”


아! 그거였나… 갑자기 기분이 바로 풀린다. 어디 영영 먼 데 가 버릴까 봐 두 시간이 넘게 긴장하고 있었는데… 의원 선생이 본업 복귀하겠다는 거였나 보다. 그러고 보니 이 온돌방 참 따뜻하고, 매운탕 감칠맛도 끝내준다. 술이 들어간다, 술, 술, 술…




끝이 정해져 있다 하더라도 마음을 숨기는 건 하지 않기로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기적이지만 적어도 저 여자 마음속에서는 오래 머무르고 싶다. 아니 아예 담겨서 아주 먼 훗날 다시 추운 겨울 하루에 나를 꺼내 안아주면 그녀를 다시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게… 어떻게 만나는 게 제일 좋으냐고 물었을 때, 잠깐 생각하던 여자가 말했다. ‘지친 하루가 끝날 때쯤, 깜짝 등장해서 무작정 태우고 달려 서울 아닌 어느 곳에서 맛있는 밥을 사주면 제일 행복할 거야’라고…  


“강일 씨, 오늘 김 대리랑 근교 나가서 맛있는 거 먹을까 하는데 일 없으면 같이 어때?”


“저야 뭐 널널한 복학생이긴 한데요, 그렇게 자주 꼽사리 끼면 김 대리가 저를 진짜 암살할지도 모르는데예…”


“눈치를 받더라도 보수적인 경상도 선배가 후배 지켜야지. 남자가 근교에 차를 태워 데려가는데 오늘 밤에 신촌으로 복귀를 못 하거나 하는 불상사가 있으면 안 되잖아, 안 그래? 하하.”


“참 알수록 신기한 분이시네예. 

본인에게 생길 기회를 막아달라니… 뭐 아주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더. 우리 김 대리 책임질 짓 못하게 막으라는 거 같아서… “


그녀의 선배는 생각보다 그녀를 더 아끼고 있는 것 같다. 책임질 짓은 안 하겠다는 비겁한 남자로 보이는 모양 처음으로 못마땅한 말투를 내비치더니 못 이기는 척 내 데이트 신청을 받아준다.


“… 아이고, 행님. 날씨가 윽수로 춥지예. 맛난 거 묵을라고 하숙집 저녁을 다 마다했다 아입니꺼. 우리 아줌마 전라도 분이시라 웬만한 밥집 뺨치거든예. 맛난 거 사주셔야 됩니더.”


“어서 와. 미리 예약을 하긴 했는데… 혹시 우리 김 대리 절대 못 먹고 이런 거 있나?”


“뭐 많지예.

은근 입맛이 아주 제한적이라예. 뭔 놈의 트라우마에 징그러운 건 그리 많은지… 닭도 못 먹어…”


“아니 닭을 왜… 닭이 제일 흔한 음식인데…”


“몰라예, 어렸을 때 시골 큰집 할매가 닭백숙 해준다고 마당에서 방금 놀고 있던 닭을 손도끼로 탁 잡는 걸 봤는데 모가지 날아간 닭이 지 앞에서 한 이십 분간 강강수월래를 했다나… 갸 그거 최면 치료 같은 거 받아서 까맣게 까묵기 전엔 닭 못 먹어요.”


“음… 일단 오늘 먹을 게 닭은 아니라서 다행인데, 또 뭘 못 먹지? 회나 생선은 잘 먹던데…”


“주로 비싼 건 잘 먹어예. 지 말로는 특수 부위만 못 먹는다는데, 그 특수 부위가 보통 사람한테는 그리 특수하지 않다는 게 문제지만… 주로 내장 종류 절대 못 먹고, 피부 못 먹고, 파충류, 양서류 이런 거 못 먹고… 아 그런데 또 생선 알이나 내장은 잘 먹고… 일관성이 없어예.”


“피부? 피부를 먹는 사람도 있어?”


“왜 이러십니까. 콜라겐 덩어리 돼지 껍데기를 모르십니까.”


“아! 하하하. 뭐 그 정도 식성이면 보통 규수 식성이구만 뭘. 뱀 닮은 것도 못 먹고 이런 건 아니지?”


“오데예. 장어는 또 없어서 못 먹지예.”


“생각보다 까다롭지 않아.”


“뭐 그런가예. 어쨌건 털털한 입맛도 성격도 아닙니더. 뒤끝 엔간히 있어예.”


“.. 뒷 끝이라… 뒷 끝이 없는 사람보다 나는 좋은데…”


남자가 봐도 어려운 이 남자를 만나 속을 끓이는 후배가 체한 듯 자꾸 마음에 걸린다. 가식적이지 않지만 분명 속은 다 내놓지 않는 남자인데, 잡힐 듯 잡히지도 않는 어려운 상대다. 세상 대부분의 남자는 유치하다고 여자들은 투덜대지만 사실 그 보통 유치한 남자들은 쉬운 남자들이다.


“한 이십 년 지난 것도 절대 안 까먹으니까… 뒷 끝 끝판 이지예.”


“난 그 점이 지금까지 중 가장 마음에 드는데.”


뒷 끝 있는 여자가 좋다는 괴짜의 등 뒤에 앉아 종로에 도착했는데 이 괴짜가 전화 한 통을 하자 이내 센 척 하지만 하나도 안 센 후배가 어디선가 숨어 보고 있었던 것처럼 주차장에서 나오자마자 맞춰 건물 밖으로 종종걸음을 하며 달려 나온다.


“아이고, 가시나… 길바닥 얼었는데 저 힐을 신고 뛰고 있노. 저러다 미끄러지면 발목 나가는데…”


“이렇게 좋은 오빠야를 왜 우리 김 대리는 그냥 선배로만 두고 있지?”


여자 친구 걱정을 하니 빈정이 상했나 싶지만 장 선생은 진지했다. 그의 눈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오데예, 저한테는 심장이 롤러코스터를 타지 않는다고 합니더. 원래 쌀 씻을 때 이 쌀로 밥 해 먹을지, 죽 해 먹을지 이미 결정하는 거 아닙니꺼… 아이고 저거 봐라. 방금 삐끗했다… 가시나 작년에도 저러고 돌아다니다가 발목 나가서 내가 한 며칠 업어줬… 앗… 절대로다가 사심 있어 업은 거 아니고예, 그 뭐냐, 몸 불편한 사람 돕는 그런 봉사심으로다가…”


장 선생은 혹시나 분란 일으켜서 후배 커플에 누가 될까 봐 쓸데없이 노심초사하는 이 속이 빤히 보이는 여자 친구의 선배 오빠가 막상 다가오는 여자의 발목에만 집중하고 있는 양을 관찰 중이었다. 


“강일 씨는 우리 김 대리 참 잘 아는 것 같아.”


“세월을 무시 못한다 아입니꺼. 뭐 그다지 어려운 스타일도 아니고요. 저 자식 센 척하는데 말짱 허당이라니까요. 울기는 또 얼마나 잘 우는지… 나이는 먹을 만큼 먹어서는 길바닥에서 넘어져도 서럽다고 우는 바보라예. 울면 시끄러우니까… 그래서 눈을 못 떼겠… 에헤이… 저 봐라, 꼴랑 저거 걸어오면서 호랑나비를 몇 번 잡노.”


대답을 하면서도 그의 눈은 윤조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무래도 불쌍한 이 선배를 보험으로 삼아야겠다. 







“강일 씨, 윤조 좋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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