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 콩 심은 데 콩 나. 참 맞는 말이지. 콩을 심었는데 감자가 나올 순 없는 거야… 그러면 그 콩들은 말야… 콩을 또 만들기 전에 잘 생각을 했어야지… 담배를 한 번도 안 피운 사람이 폐암에 걸리는 이유는 그런 폐를 물려받았기 때문이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유전이야.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 과학이라고.
우리 친가 쪽은 다들 오십을 못 넘겨. 간이 안 좋은 콩들이지… 유전에는 복불복이 거의 없어. 사랑과 신앙의 힘으로 나쁜 간은 회복되지 않아. 한 번 증상이 나타나면 이미 진행이 시작되었다고 봐야 하고, 남들보다 훨씬 피곤하고 아프게 지내다 빨리 떠나는 거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게 되었어. 그래서 마음이 급했던 거야. 늘…
빨리 죽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하고 싶은 게 없어지는 건 아니거든. 난 남보다 주어진 시간이 짧을지도 모르니까 남보다 몇 배로 시간을 바쁘게 쓴 거지. 그래… 오늘 강일 씨 일부러 불렀어. 난 처음에 맛있는 밥 재미있게 같이 먹을 사람이 필요해서 윤조를 만났는데… 함부로 사랑에 빠지고 싶지는 않았거든. 사랑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가 떠나고 어쩔 수 없이 남겨져 남은 몫을 혼자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침울하고 힘들어하는지를 매 순간 보면서 살았어.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못할 짓이야.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그렇게나 혼자 남을 어머니 걱정을 했는데 그 남겨진 어머니는 아직도 한 번씩 지나가듯 말해… 아버지는 가는 순간까지 홀가분하지도 못했다고… 남은 이는 또 그게 걸리고 미안한 거야.
그런데… 강일 씨.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아름다운 이별은 없어. 이별은 원수가 되어 더럽게 헤어지지 않는 이상은 결국 수술도 안 되는 마음의 병을 한참 혼자 다스려야 하는 거더라고. 그래서 나는 계획에 없던 사랑을 해 버린 죄는 어쩔 수 없더라도 저 여자를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하고 싶은 거야. 시간을 둘이서만 나누면 나중에 그 기억으로 더 많이 힘들어질 수도 있으니까 둘만의 시간에 자꾸 강일 씨를 초대했어. 그리고… 나도 그녀도 청춘이야. 둘만 있다가 눈이 멀면 내가 좋은 남자로 깔끔하게 퇴장하는 게 어려워지지 않겠어? 그래서 나는 이래저래 보험이 필요했던 거고, 강일 씨가 가장 제격이었다고나 할까… 퉁명하게 대해도 이 혈혈단신 서울 바닥에서 윤조가 제일 의지하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강일 씨는 저 아가씨를 후배 이상으로 아끼니까… 이만큼 적당한 방패가 없어. 힘들어하면 혼자 두지 않을 좋은 오빠니까… 말하고 나니 속은 시원한데, 강일 씨한테는 더 미안해져 버렸네.”
강해 보이는 짙은 눈썹 밑에 살짝 꺼진 그의 눈이 유독 쓸쓸해 보였다. 강일은 처음부터 비밀스러워 보였던 대만의 이야기를 막상 듣고 나자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렇게 오늘 밤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은 남자와 그렇게 마시고도 아직 취하지 못한 남자는 한쪽에 여전히 엎드려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든 여자를 그대로 둔 채 한참을 말없이 마주하고 있었다.
“하… 어렵네요. 벌써 많이 안 좋으신 겁니꺼.”
잔뜩 막힌 목소리로 겨우 강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끝은 같아. 힘든 길을 둘이 가는 건 별로 도움이 되지 않거든. 힘든 길에 초대한 자는 제대로 온전히 힘들 수도 없게 돼. 힘든 데다 죽도록 미안하기까진 하고 싶지 않아… 이해해 줬으면 좋겠는데…”
꼭 그 처지가 아니라도,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 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강일은 다시 말문이 막혀 버렸다.
“… 알겠습니더. 행님… 감히 다 안다 말할 수 없어예. 하지만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겠습니더. 뭐 얼마나 도움이 될랑가는 모르겠지만, 제가 옆에 있을께예. 그래도… 왜 병원은 그리 그만두셔야 되는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꺼…”
“그냥… 올해 쉬어 봤더니 다시 그렇게 남 살리려고 아등바등 살기가 싫어졌어. 어머니랑 같이 미국으로 다시 들어갈 생각이야. 어쩌면… 사고 치고 뒷수습은 강일 씨한테 맡긴 채 도망가는 걸지도 몰라. 비겁하다고 욕해도 좋아…”
“… 아닙니더. 제가 보험 할께예. 원래 보험이 필요한 이유는 사고 쳤을 때 수습할라고니까… 뭐라 할 말이 없어요. 길게 산 건 아니라도, 이런 이별은 처음이라… 저, 아무 말도 안 할께예. 속사정을 말하고 안 하고는 행님이 알아서 하이소.”
“고마워. 제일 듣고 싶던 대답이야.
한 이 년쯤 지나서… 어느 겨울날 내 생각이 난다고, 나쁜 새끼라고 욕하면 그때쯤 이야기해 주면 좋겠네.
강일 씨는… 우리 보험이니까…”
“… 그라겠습니더.”
쉬지도 못하고 매일 야근에 지쳤던 김 대리는 오십세주에 취해 든 잠을 겨우 깨고 차에 오르자마자 다시 잠이 들었다. 깊게 어두운 겨울밤, 한산한 자유로를 달리는 강일의 옆모습이 잔뜩 굳어 있다. 대만은 아까의 처연한 모습은 숨긴 채 그런 강일에게 수시로 시시한 농담을 걸었고 강일도 표정은 굳었지만 애써 그런 대만의 농담에 적당히 대꾸를 하고 있었다.
“… 행님, 생각보다 사고 수습이 크겠는데 특별 보험료 한 번 더 내시지요.”
뒷자리에 잠든 윤조를 깨워 그녀의 오피스텔로 밀어 넣고 두 남자는 다시 차에 돌아왔다.
“물론이지. 말만 해. 강일 씨 내일 수업 없다고 했지.”
“이리 고급 차를 신촌 바닥 아무 데나 세워두기도 그렇고, 행님 모시다 드리고 지는 거기서 택시 타고 와도 되긴 하는데요, 제가 오늘 심장이 두근거려 잠을 못 자겠다 아입니꺼. 책임지소. 저도 오늘 좀 퍼마셔야 기절이라도 좀 하겠습니더.”
“아! 난 또 뭐라고, 우리 집에서 자고 내일 늦게 가. 내가 또 해장국을 끝내주게 끓이지. 같이 해장하고, 만화도 같이 읽고 그래 주면 나야 신나지. 아! 마침 냉동실에 손질해 둔 복어가 있네. 우리 강일 씨는 운도 좋아.”
성격 시원시원하고 재치가 넘치는 강일은 인맥이 넓은 편이었다. 문득 어머니가 걸핏하면 누굴 닮아 저렇게 넉살이 좋고 술을 좋아하느냐고 투덜댈 때면 아버지가 ‘누굴 닮았겠느냐’고 사업가 기질인 본인을 닮아 아들이 호인이라고 과한 칭찬을 하던 게 떠올랐다. 술 콩은 술 콩을 낳고…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옆자리의 남자 때문에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강일 씨, 질문 하나 할게. 집으로 가는 길이 여러 군데인데 제일 좋은 길이 공사 중이라 막혔어. 그걸 알고 있는데도 혹시나 하고 그 길을 가 볼 거야, 아니면 현명하게 다른 길로 돌아갈 거야?”
“뭐 뻔한 질문을 하고 그러십니꺼.”
“그러니까. 뻔한 거라고. 자꾸만 다른 방법은 없나, 막힌 길을 뚫어서 갈 순 없나… 그런 고민하지 마.”
덤덤한 어조로 무거운 이야기를 가볍게 던진 대만이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한 차가운 길 위로 시선을 던졌다.
그런 대만을 곁눈질로 살피던 강일도 이내 운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가슴이 아려오는데 윤조는 대체 어떻게 견뎌야 하는 걸까 하는 걱정이 눈처럼 강일의 가슴속에 답답하게 쌓이기 시작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