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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Nov 18. 2024

앞에 두고서 떼는 뒷걸음

(2)

잔뜩 얼굴이 구겨진 상무를 모시고 일층에 도착하니까 정말 용 빼는 재주가 있는 한 대리가 그새 차를 빼서 대령 중이다. 당연히 옆 좌석에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정아 씨가…


저 차는 타지 않는 게 좋겠다…

마침 한 대리 차 뒤로 성호 씨 차가 도착한다. 


“상무님, 저는 세단이 더 좋은데… 저랑 같이 성호 씨 차 타고 움직이시지요.”


나름 이 경상도 출신 상무를 좀 아는데, 지금 정아 씨 위험하다. 어떤 몸짓, 말투도 밉상이라는 프레임이 걸려 있는 중이니까… 공익을 위해 안 하던 여우짓을 좀 하기로 했다. 미움받으면 이제 뽑힌 경리 아가씨도 힘들어지고, 그 아가씨 뽑은 탓에 일 년은 견뎌야 하는 상무도 스트레스받을 테니… 선수들 그로기 되기 전에 떼놓으려면 심판이 필요하다.


그래서, 저 차에는 밉상이 있으니 안전한 성호 씨 차로 타시죠,라는 말 대신 SUV인 한 대리 차를 살짝 핑계로 댔을 뿐이다.


“거 경미 씨가 부서 전체 점심 회식 이런 거 나가면 뒷정리는 다 꼼꼼히 하고 나와야 된다는 거 전달 안 하고 갔나?”


“그럴 리가요… 경미 씨 술 안 먹었을 때 엄청 꼼꼼해요.”


“흠…”


무심코 즉각 대답을 한 안 부장도, 상무도, 나도, 운전 중인 성호 씨도 조용해진다. 지금 상무가 구관이 명관이라는 속담을 떠올리면 큰일이다.


“아직 적응 안 되어서 그래요. 그리고 보니까 이렇게 좋은 회사에 있었던 게 아니라서 호텔 회식에 너무 들떴더라고요. 회식을 이렇게 신나 하는데 좋은 거죠. 회사원으로써…”


아무래도 조금 거들어야겠다 싶었다…


“회식이 신날 군번이 아니지…”


참 웃기지… 대한민국에 군대는 분명히 남자들만 의무인데 그 남자들은 사회에 나와 여자들과 같이 섞여서도 짠 밥이니 군번 타령이다. 


남산을 올라가는 동안 상무의 썰렁한 농담을 쳐내지 않고 몇 번 받아줬더니 다시 임꺽정만큼이나 호기로운 상무님으로 돌아왔다. 호텔 정문 쪽으로 차가 서서히 서는데 방금 발렛 파킹을 맡긴 한 대리와 정아 씨가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 여인이… 을지로 백화점 주차장에서 자주 보던 손짓 발짓을 성호 씨 차를 향해 해 대는 것이 이미 불안하지만…


“저 푸닥거리는 뭔데? 추워서 저라는 기가? 밥 먹는다고 좋아서 저라는 긴가? 참 가지가지한다이… “


어쩌지… 이미 밉상으로 많이 굳혀진 듯한데… 


“유머감각이겠지예. 거 왜 백화점 주차장 가면 예쁜 빵모자 쓴 아가씨들이 저래 도와주잖아예.”


“그러니까, 발렛 파킹 해주는 호텔에서 서비스하는 사람들 헷갈리구로 저 뭔 푸닥거리냐고.”


상무는 이미 심기가 불편해 있다. 내가 저 여인에게 어떻게 조금 코치를 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이내 접어버린다. 같은 갑을 모시는 을들 사이에서 내가 진심의 충고를 건네도 그 진심은 빼 버리고 곡해하는 경우는 채일만큼 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의 천성이라는 것은 가르친다고 바뀌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국식 현악기 음악이 낭랑하게 울려 퍼지고 있는 식당을 들어서자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미리 정리되어 있는 예약실로 안내한다. 이런 경우에 누가 먼저 방으로 들어가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먼저 들어간다 해도 덥석 앉는 이는 없고 일단 서서 대기하는데 어차피 앉을 수 있는 서열과 보이지 않는 자리 배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래 상무는 휘적대고 체통 없이 회식 룸 문을 먼저 열고 입장하지 않는다. 적당하게 세네 번째로 들어가서 못 이기는 척 가장 좋은 자리에 앉는 것이 자연스러운 정석이다. 그래서 정아 씨가 성큼성큼 먼저 앞장을 서서 방으로 들어갈 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


“앗싸! 저 여기 앉을래요! 먼저 앉는 사람 임자!!”


커다란 원형 탁자 정 중앙에 폴짝 가볍게 앉는 여인을 모두가 주목했다. 아무래도 이 부서에 최초의 무 눈치자가 들어온 것 같다…


바로 뒤에 들어오던 아저씨들이 흠칫 본인 실수도 아닌데 난감한 표정을 못 숨기고 헛기침을 했지만 말로 찔러야 먹힐 무 눈치자가 헛기침 같은 비언어 고급 시그널을 알아챌 리 없다.


뒤늦게 통화를 하면서 들어오던 상무도 잠깐 혼란스러운 듯 상석에 이미 안정적으로 몸을 앉힌 여직원을 보더니 멈췄다.


“보자… 자리가… 마 여기 앉아야겠네.”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상무는 아무렇게나 문 가까운 자리에 앉으려 하고, 부장들은 말린다.


“음식 가져오느라 내내 문을 열고 닫을 건데 오데 문지방에 앉는다 하십니꺼. 그라지 마시고 저짝 안쪽으로, 정아 씨 옆에…”


이미 상무의 심기를 눈치챘지만 마음은 약해서 듣기 싫은 소리는 못 하는 안 부장이 제안을 마치기도 전에 드디어 상무의 불편한 심기는 폭발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쟈 옆에 왜 앉아!!”


이쯤 되면 사태 파악하고 벌떡 일어나 시정해야 그나마 가까스로 정상인인데… 그녀는 앞에 놓여 있던 냅킨을 탁 탁 털어 야무지게 턱받이로 블라우스 위에 덮는 중이다. 본인이 이 사태의 쟁점인 것을 분명히 모른다… 그리고 이 아저씨들도 참 그렇다… 누구 하나 속 시원하게 저리로 비키라는 말을 못 한다. 


“정아 씨, 거기 앉으면 상무님이 어디에 앉아야 해?”


내가 진짜 남의 회사 일에 입바른 소리 해 가며 괜히 그녀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지만, 안 부장이 자꾸만 눈으로 ‘니도 저 여인 뽑는데 일조하지 않았느냐’며 소리를 질러대서 어쩔 수 없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호텔 중식당은 처음이라 그만… 정말 죄송합니다.”


보통 눈치 없는 자들이 또 마음은 여리고 사과는 습관처럼 배어 있다.


“아 됐어, 거 냅킨도 벌써 다 펼치고 물도 마셨구만. 컵 들고 왔다 갔다 뭐 하는 거야, 그냥 거기 앉아.”


상무는 귀찮다는 듯 인상을 조금 더 찌푸리면서 정아 씨로부터 두 자리 건너 앉았다. 별 의미 없이 거기 앉은 듯 하지만 사실 그 자리는 상무의 의중이 고스란히 보이는 자리다. 밉상인 여인 바로 옆은 절대 앉기 싫고, 좀 더 떨어져 앉으면 그녀의 면상이 밥 먹는 내내 보일 것이니 그녀를 가깝지만 보이지 않게 둘 수 있는 사각지대를 대번 고른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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