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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Nov 22. 2024

앞에 두고서 떼는 뒷걸음

(4)

“아니, 대부분은 그런 경우라고… 천하의 김 대리. 자존심 챙겨! 그러지 말고 딴짓을 하면 신경이 덜 쓰이는 법이니까 오늘 내가 저녁 사줄게. 어때?”


“제가 대리님이랑 왜 밥을 먹어요!”


“… 아, 진짜 너무 한다. 김 대리. 우리 거의 일 년 가까이 같이 일하는데 말야. 맨날 얼굴 보고, 서로 모르는 거 거의 없고… 밥 한 번 같이 밖에서 먹을 수도 있는 일이지. 그게 그렇게 목소리 데시벨 팍 올릴 일이야?”


아차… 한 대리는 정말 많이 섭섭한 눈치다. 연애가 공부에도 독이고, 사회생활에도 독이고, 여러 모로 인간을 예민하기 짝이 없는 동물로 만들어 가는 독약이다.


“아… 아니에요. 그런 뜻… 뭐랄까, 직업윤리? 변호사는 의뢰인이랑 밥 안 먹고, 의사는 환자랑 따로 안 만나고 그런 것처럼 갑과 을 사이도 철저하게 공적인 것이 낫다… 뭐 이런…”


“됐어. 진짜 섭섭해, 김 대리. 그 연락 절대 안 될 놈한테 계속 전화나 해 보던가.”


잠깐만.. 저 인간이 방금 자리를 뜨기 전에 연락 절대 안 ‘될’ 놈이라고 했다… 매우 찝찝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잠깐만요, 한 대리님!”


저만치 성큼성큼 사라져 가는 한 대리를 부르는데 누군가 어깨를 두드린다.


“내가 소개팅 시켜 줘? 거 남자가 연락 뜸해지는 거면 미련 갖지 말어.”


이번엔 안 부장이다. 왜 이리 단체로 자꾸 그만두라는 거지…


“저 알아서 할게요, 소개팅 같은 거 안 해요. 부장님.”


“해변가에 미역만큼 널린 게 남잔데 뭐 하러 한 놈한테 목을 매노.”


“그 널린 미역 중에 마음에 드는 거 찾기 억수로 힘들거든예?”


제기랄.

눈치가 보여 회사에 있을 때는 그나마 연락을 시도하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꼼짝없이 남자가 전화를 해 오지 않으면 계속 연락 없다가 이대로 어이없게 종지부가 날 수도 있을 지경이다. 그렇게 비겁한 남자였나, 그렇게 나쁜 남자였나, 그렇게 쓰레기였나… 연락 없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속의 화는 곱절로 쌓여갔다.


하루에도 몇십 번, 본사에서 업무 전화, 7층 전산실 서버 관련 전화, 그리고 신촌에서 자주도 뭉쳐 다니는 동창들 전화… 그 흔하게 울리는 전화 중 그의 전화는 없었다. 차라리 흥미가 없어졌다는 재수 없는 이유라도 듣고 끝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마치고 할 일 없재? 만화방으로 올라 온나. 

아지매가 신 메뉴 개발했는데 옛날에 그 니네 학교 앞에 있던 미리내 오징어 볶음밥이랑 완전 똑같다이가.”


“미쳤나. 내가 저녁 먹을 시간에 어떻게 퇴근해서 가노. 그라고 왜 내 할 일 없을 거라고 넘겨짚는데?”


“에이, 뭐 누구 볼 사람도 없다이가. 그라고 오징어 볶음밥은 야식으로 먹어야 맛있지, 가시나야. 오늘 오빠야가 쏜다.”


“내한테 오빠야는 하나… 근데, 잠깐만. 니 왜 그리 확신에 차서 내 볼 사람도 없다고 말하는데? 딱 기다리라, 만화방에서. 내 오늘 야근 쏜살같이 하고 날아간다.”


“뭔 소리 하노. 그냥 한 소리 갖고… 윽수로 예민하네… 알겠다. 나중에 보자 그라믄.”


강일은 분명히 약간 당황했다. 아니다. 그들의 말처럼 내가 예민하다 못해 희한한 의심병까지 생긴 게 맞다. 며칠간 연락 안 되어서 답답해도 방정맞게 술을 마신다던가, 누군가에게 술 김에 전화를 해서 떠벌리는 그런 최악의 짓은 아직 안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 입에서 안 나간 비밀을 그들이 알 리 없다…


강일의 사촌 동생 강준은 나와 고등학교 동기였다. 지방 일군 고등학교였던 우리 학교에는 명문대를 갈 아이들만 모은 우열반이 있었다. 그 우열반 멤버로 친했던 강준의 사촌 형 강일은 우리보다 한 해 위 선배였는데 깔끔한 무테안경에 하얀 얼굴, 그리고 타고난 유머 감각으로 인기가 꽤 있는 편이었다. 같은 신촌권 대학에 오게 되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모이는 동문회에서 자꾸 마주치다가  한 때 강일을 좋아하게 되었었다. 원래 누군가를 좋아하면 숨기 지를 못 하는 타입이라 결국 모두가 알게 되었지만 강일은 그런 나를 내치고 우리 학교 피아노과를 다니던 선배 언니와 사귀었었다. 일 년쯤 사귀다 헤어지고 어느 정도 지나 여전히 죽이 잘 맞는 나에게 고백을 한 적도 있었지만 그때는 내가 거절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후로 그냥 아주 친하게 지내기로만 했었다. 사귀진 않지만 툴툴대면서도 서로 가장 챙기는 게 진짜 이해가 안 간다고 주위에서 말하기도 했다.


어쨌건 오랜만이다. 강일을 만나는 시간을 꼽아 기다리는 거…


“왔나! 근데 야근을 막 이리 째고 8시부터 와도 되나? 연말이라 바쁘다매.”


“언제는 빨리 튀어 오라매. 아 됐고. 오빠, 니가 전화해봐.”


“누구한테… 오자마자 뭐라 해쌌노. 가서 니 보던 거 신간 나온 거나 갖고 온나.”


“됐다고. 내가 지금 만화가 눈에 처 들어오겠나? 이 인간 또 연락 안 한다. 전화해 봐”


“내가 왜 하는데…”


강일은 무표정하게 시선을 만화책에 고정시킨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갑자기 왜 이라는데? 언제는 내보다 느그 둘이 더 친하다매. 집에 가서 잠도 잤잖아. 언제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전화를 해서 불러내고 그러더만… 그런 요사 좀 또 부리봐봐.”


“윤조야. 전화를 안 받으면 뭔 사정이 있는갑다… 이래라.”


“아니, 뭔 사정. 죽었나. 지 사촌 형한테 떠 보니까 그건 아니거 같더만. 멀쩡하게 같은 하늘 아래 살아 있는데 왜 연락이 안 되냐고.”


“…. 가시나야, 니 피하는갑지.”


“… 왜?? 왜??? 왜????

그렇게 멀쩡하게 같이 잘 놀고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 그렇게 갑자기 그냥 싫증 난다고? 말이 된다고?”


“일단 마음을 비우고 만화를 봐. 내가 해도 안 받아. 안 받을 사정이면… 그라고 어차피 그래 봤자 나는 니 편인 거 그 행님이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 그냥 딱 한 번만 내 앞에서 전화 함 해봐!!”


“아 잠깐만, 가시나야. 그라몬 내 화장실 좀 갔다 올게. 니가 딱 내 오줌 마려운 타이밍에 등장해 갖고…”


강일은 일 년 365일 중 137일 혹은 138일 입는 빛바랜 츄리닝 바지를 추스르며 급하게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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