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폭 익은 겨울 신촌 밤거리를 나서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쳇… 이렇게 자꾸 눈 오다가 다 써버려서 이브날에 비 오는 거 아이가?”
“그놈의 크리스마스이브에 왕창 벼락이랑 태풍이나 쏟아져라.”
“미쳤나. 왜 악담하는데!”
“그래야 그날 약속 펑크 나는 인간들한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지.”
“좀 연락 안 되어서 답답한 상태라는 건데 이미 방청객들은 결론 냈네? 우리는 깨진 걸로?”
그래, 딱 그 기분.
이 남자가 애를 먹이는 것은 맞지만 사흘 연락 뜸하다고 이미 끝난 사이라며 주위에서 이미 책장 덮기 시작하는 이게 정상이냔 말이다.
“내일 몇 시에 마치노?”
걷다 보니 신촌 한 복판에 있는 오피스텔 앞이다. 들어가려는데 강일이 잠깐 잡았다.
“왜! 내일도 보게? 됐다. 지겹다. 내일은 남 말고 님 만날란다.”
“그 님은 니가 보고 싶다고 쉽게 만나지는 인간이 아니잖아. 니가 남이라고 불러 쌌는 이 오라버니 내일 과외비 받는 날이다. 원래 네가 딱 기억해 두고 일수 찍듯이 매달 턱 얻어먹었다이가. 왜? 하도 정신이 나가서 그런 중요 행사도 까묵었나?”
“됐어. 밥값으로 날리지 말고 잘 모아. 뭐 그닥 힘들게 버는 돈은 아니겠지만서도.”
“뭔 소리고. 그 정도 남을 가르칠 정도가 되기 위해 내가 그 더운 여름 방학마다 학교 나가서 공부하느라 흘린 땀을 생각해 봐. 뭐가 안 힘들어.”
“알았어, 알았으니까 내일은 수고한 오빠 혼자 맛난 거 먹어.”
“대충 아홉 시에 끝나재?”
“뭐 맨날 그렇지. 그치만 장 선생 전화 오면 칼 퇴근이야.”
“칼 퇴근이 팔자에 없는 우리 박복한 김 대리님, 어여 들어가서 삼겹살 소화되기 전에 주무시소. 그래야 내일 아침에 얼굴 띵띵 붓고 눈도 작아져서 인상이 온화해지지.”
끝까지 깐족대던 강일이 급히 사라지는 걸 바라보다가 다시 철저히 혼자가 되는 집으로 향했다.
마음이 심란할 때 혼자 있는 것은 위험하다. 어차피 하루 종일 전화를 해대서 몇십 번은 흔적을 남겼으니 한 열 번 정도 더 한다고 그다지 달라질 바 없어 또 끈기 있게 연달아 전화를 해 댔고, 문자를 보냈고 남자의 핸드폰에 살고 있는 기계 여자의 안내를 따라 비슷한 내용의 애끓는 음성 메시지를 남겨댔다. 처음에는 화를 냈다가, 중반부터는 걱정을 했다가, 다시 화를 버럭 냈다가… 그러다가… 끝으로 갈수록 제발… 하고 읍소를 하고 있다. 대답 없는 남자 친구의 기계 비서에게 많은 독백을 남긴 밤이 끝났다. 차라리 일 할 수 있어 다행이고, 내 일로 부족하면 남의 일도 떠맡아해 주고 싶은 심정이다.
출근을 하자마자 해야 할 업무 리스트를 평소보다 훨씬 더 자세하게 짠다. 할 일을 쪼개고 더해서 많이도 만들어 냈다.
“원래 실연은 어떤 면에선 회사에 도움이 되지. 갑자기 일을 더 많이 하게 된다니까. 심란하면 다른 거라도 해야 하는 건 다 똑같은겨.”
멀리 여행 떠나는 엄마가 곰탕이며 김치며 집안일을 미리 다 해 두려는 것처럼 그렇게 일들을 쏙쏙 찾아내 가며 몰두하고 있는 것을 보더니 흐뭇한 갑들의 뒷 칭찬이 참 살갑다.
해 봤자 대답 없는 전화는 그만두었지만 혹시나 울릴지도 모르니 항상 지척에 두고 업무를 본다. 어제 까지는 입맛도 없더니만 그래도 배는 고프다. 먹기는 하는데 맛은 없다. 맛없이 먹고 배 부르니 더 기분이 안 좋아졌다. 하루를 잘 견뎌 간다 싶었는데 더 춥고 더 어두운 저녁 시간으로 넘어가자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울 것만 같다. 이대로 끝이라면 대체 이유라도… 아니 딱히 설명할 이유가 없다면 얼굴이라도 마지막으로… 아니… 목소리만 한 번 들어도… 시간이 조금씩 흐를수록 의식의 변화는 더 변덕스럽고 초라해져 갔다.
“김 대리, 며칠 동안 잠을 못 잔 거야? 눈 밑에 혹 생기겠어… 하루 종일 혼자 2배속으로 일하더만… 얼른 집에 들어가.”
드문 일이다. 상사가, 그것도 갑인 상사가 먼저 들어가 쉬라고 독려하는 것은… 진짜 쓰러지게 생겨서 노동력 착취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까 봐 겁이 나는지도 모른다. 일찍 들어가 봤자 마음만 더 볶는다고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닫았다. 느릿느릿 남은 일을 최대한 천천히 정리하고 괜히 책상도 한 번 훔치고… 그러고 나니 여덟 시가 좀 안 되었나 보다. 가려면 지금 가는 편이 낫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야근 팀이 저녁을 먹고 들어올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내리지 않지만 방금이라도 뭔가 잔뜩 뱉어낼 듯 골이 한참 난 밤하늘 밑에 추워서 한껏 움츠린 직장인들이 바쁜 걸음을 옮기는 거리에 섰다. 전산부 장 희영 씨가 마침 기다리고 있던 남자 친구를 보더니 반색을 하면서 총총걸음으로 스쳐 지나는 것을 보았다. 좋겠다… 뇌를 거치지 않고 그냥 드는 생각… 무심코 그들이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멍하게 섰다가 이내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섰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살짝 친다.
그래… 인정한다.
순간 심장 박동이 한 다섯 배쯤 빠르게 돌린 것 마냥 곤두박질치고 그 짧은 순간 어쩌면…이라는 기대를 했었다는 것을…
“어!!…”
“이 종로 바닥에서 지금 니만 슬로 모션이야.
뭔 종이가 팔랑거리면서 걷는 줄 알았네. 그나저나 내 귀신이제? 딱 맞춰서 왔다이가.”
강일이었다… 이 오빠가 진짜 왜 이러지. 님은 깜깜무소식인데 보나 안 보나 감흥 없는 선배 오빠는 자주도 얼굴을 구경시켜 준다.
“뭔데… 내가 언제 나올 줄 알고… 언제부터 와 있었는데?”
“아까 한 대리님한테 살짝 연락해 봤지. 니 오늘 야근하냐고. 아니라고 일찍 들어갈 거라더라. 심란하니까 개기다가 야근팀 저녁 먹고 들어오기 직전쯤 나오겠다 싶어 맞춰왔더니 딱 맞았네. 가자, 오늘은 소고기 쏜다. 형제갈비. 무난하니 괜찮잖아, 그자?”
무심코 팔을 잡아 끄는 강일에 이끌려 횡단보도를 건너고서야 멈추어 섰다. 그냥… 갑자기 드는 생각에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아, 또 왜! 내도 아는 거 없어. 자꾸 의심하지 마.”
강일은 내가 또 뭐 아는 거 있냐고 취조할까 봐 미리 손사래를 쳤다.
“… 진짜로… 끝난 거처럼 보이는갑지?”
“아 왜… 누가 그렇다나. 아니 뭘 맛난 걸 사준다고 해도 까탈이고.”
“오늘도 내가 그 사람 못 만나는 걸 알고 있잖아.”
“에헤이. 알기는 뭘 알아. 나는 네가 그 선생 만나나 안 만나나는 관심 없고, 그냥 또 이 불상한 에미나이 귀찮다고 저녁 굶겠네 싶어서 봉사하러 온 거 아이가. 쓸데없는 소리는 따신 온돌방에 엉덩이 붙이면 해라. 얼른 가자.”
“오빠… 나 … 너무 진이 빠진다…”
“일을 너무 많이 한 거 아이가? 아니면 애를 너무 많이 끓였나. 버스 복잡한데 택시 태워줄까?”
“무슨… 됐다. 지금 택시 타면 막혀서 미터기 말다리만 쳐다봐야 돼.”
“그체? 젊은데 그냥 버스 타.”
만원 버스에서 조차 강일은 수완이 좋았다. 대충 훑어보더니 자꾸만 밖을 확인하면서 내릴 데를 놓치지 않으려는 승차 직전 승객을 잘도 찾아내어 그 앞에 데리고 섰다가 아니나 다를까 이내 자리가 난 의자에 테트리스의 앉은뱅이 ‘ㄴ’처럼 나를 구겨 앉힌다.
“그거 아나? 사람들은 마음이 불편할 때 몸 따위야 뭐…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거든. 혹은 더 몸을 막 혹사하는 바보들도 있는데, 그라면 안 돼. 마음이 얼마나 요사스럽게 변하는 건데 마음은 멀쩡하게 다시 돌아와도 몸이 망가져 있음 말짱 꽝인거라. 그러니까 무조건 잘 챙겨 먹고, 잘 쉬고 그래야 돼. 꽃 다운 나이에 같잖은 연애 한 번으로 폭삭 늙고 싶나?”
“뭐라카노.”
“인자 조용히 해라. 공공장소에서 떠드는 거 아이다.”
강일은 하고 싶은 말만 하더니 김이 잔뜩 서려 잘 보이지도 않는 버스 창문만 응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