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뚫어져라 바라봐도 김이 서려 목욕탕 간유리처럼 되어 있는 버스 창문 너머 보이는 건 번지는 거리의 불빛들 뿐이지만 강일은 시선을 그대로 고정시킨 채 입을 닫았다. 그 밤 이후 불편한 것은 윤조뿐만은 아니었다. 강일도, 장 선생도, 원래도 이쯤이면 헤어질 것이라 예상했던 한 대리도, 일 년 내내 일 잘하는 을이라고 부리면서도 미안해하던 안 부장까지… 모두 불편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은 꼭 남녀 간의 애정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눈 뜨고 지내는 시간 대부분을 함께 하는 직장 동료로서도 마음이 아파 어쩔 줄 몰라하는, 센 척이 어울리던 낯선 여자를 보고 있는 것도 충분히 안쓰럽고, 간지러워 아끼는 소리를 대 놓고 해 볼 엄두도 안 내는 무뚝뚝한 경상도 선배의 마음도 한 편 사랑이다.
사실 며칠간 강일은 그 장어 먹으러 간 날 따라나선 것을 후회했다. 당사자만 모르는 비밀을 알게 된 것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알고도 모르는 척을 해야 하니 안 보는 편이 낫겠지만서도 남자가 이미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후배가 혼자 애를 끓이는 것을 모르는 척하기도 힘들어서 이후로 계속 그녀의 곁을 맴도는 중인데 차라리 그 비밀을 알고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적어도 누구 한 명은 그가 왜 그렇게 도망치듯 사라져 가야 했는지를 알고 있는 편이 다행이기 때문이랄까. 선녀가 애를 셋 쯤 가져 날개 옷에 대한 미련을 저버릴 때쯤 그 남자가 악당이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해 줄 수 있을 테니.
‘그러면 다 익기 전에 그만 두시지요. 떫은 감은 뱉고 돌아서면 미련이 없지만 잔뜩 익은 단감을 놓치면 그 미련이 오래가잖습니까. 지금… 너무 익기 전에… 사랑은 한여름 땡볕에 깜빡하고 남향 베란다에 내놓은 김치처럼 얼마나 빨리 익는지 모릅니다.’
‘그냥 서서히 연락을 안 하면 그렇게 또 잊히겠지? 나쁜 놈이라고 욕할 때 같이 맞장구쳐 줘. 더 빨리 잊을 수 있게… 빨리 나를 잊어 주는 만큼 나는 그만큼 그녀를 더 오래 기억할 수 있을 테니까…’
‘… 그냥 연락 안 하는 것만 가지고는 힘들 건데요. 걔 은근히 집념과 끈기가 장난 아니라서… 꼭 이유 알고 놓을라 할 겁니다. 시험 문제 틀린 것도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오데가 어떻게 틀렸는가를 알아야 속이 시원한 그런 스타일이라예. 싫어져서 간다고나 할라면 오늘 그렇게 눈에서 꿀은 안 흘렸어야지예. 속으로 이미 헤어질 거 다 결정 본 사람이 괜히 설레구로 왜 그리 감정을 다 내놓습니까.
그렇게 해 놓고 연락 안 하면 싫어졌구나… 그렇구나…
하겠습니꺼? 또라이로 각인시키기엔 또 너무 진중한 모습 일관되었잖아요.
딱 미련 안 남을 뭔 확실한 명분, 이유를 세워야겠지예.’
오리무중으로 단서조차 없이 다정한 밤 데이트 후 연락이 없어진 남자 친구를 아니나 다를까 윤조는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늘은 한층 풀이 더 죽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게 끝이라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예상했던 대로다. 강일은 장 선생이 최악의 이별, ‘그저 사라지기’를 택하지만 않았기를 내심 빌었다. 그 많은 이별 중 가장 최악이 ‘그냥 증발하기’인 이유는 이별의 고통을 고스란히 상대에게 떠 넘기는 비겁하기 짝이 없는 악수 중 악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뒷 판이 훤히 뚫린 멋진 수트를 입고 활보하는 것만큼이나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이별법이기도 하다.
같은 남자가 봐도 충분히 멋지고 매력적인 장 선생이 제발 그런 수치스러운 증발만큼은 고르지 않았으면 하는 이유다. 생각해 볼수록 장 선생의 결정은 옳았다고 밖에 결론이 나질 않는다. 훗날 생각하지 말고 연애하라고 권하기엔 강일은 윤조를 많이 아꼈다. 어차피 시작해서 아플 수밖에 없다면 덜 익었을 때 그만두어야 덜 아픈 게 맞다. 마음이 약해져 오늘 대충 털어놓을까 하던 것을 강일은 그만 두기로 다잡았다. 사랑에 마취된 후배는 사정을 듣고 나면 하루를 살아도 온전히 사랑하고 싶다는 헛소리를 해대며 질척거리다가 혼자 열녀문을 세울 게 뻔하기 때문이다.
“와중에 생갈비 고르는 거 보니까 마, 멀쩡하네.”
“이왕 얻어먹는 거 5천 원 더 비싼 거 얻어먹을란다. 왜!”
“누가 뭐라 하나. 많이 먹어. 막 먹어. 한 5인분 먹어도 돼.”
“과외비 다 쏘게?”
“내가 공사판에서 시멘트를 져서라도 우리 자매님 괴기는 배불리 사드리야지.”
“맨날 가난한 복학생이라더만… 아부지랑 사이라도 좋아졌나. 왜 막 쏘는데.”
“날도 추운데 마음도 추운 우리 후배님, 뱃가죽이라도 뜨시야 견딜만하지 싶어서… 그 연락도 없는 놈 접어삐라.”
“… 안 접는다고. 못 접는다고!!
아 진짜, 사무실에서도 다 접으라 하고, 오빠 니도 그라고… 나는 이렇게는 못 끝낸다고! 미친놈이야, 뭐야. 심장을 마음대로 주물러 놓고는 지금 하는 이 작태가 이해가 도저히 안 가잖아. 나는 대체 그 미친 이유가 뭔지 알기 전에는 못 끝내. 있어봐. 전화 생각난 김에 또 해봐야지. 사무실에서는 하도 눈치를 줘서 맘대로 해보지도 못해…… 이거 봐. 제일 희한한 게 뭔지 아나? 전화기를 안 꺼놨다는 거 아이가. 그 말인즉슨 뭐꼬. 지금 내 전화 일부러 피한다는 거 아이가. 맞제.”
“잘 아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다 관두라는 거 아이가. 그냥 진짜 비겁한 새끼네… 하고 제껴라 그만…”
“아니! 사람 마음 갖고 장난한 거 맞는지 꼭 알아야겠다.
꼴을 보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거 말고는 딱히 이유가 없어.”
“그러게 말이다. 어디 감히 이리 매력 넘치는 우리 김 대리를 고무신 취급하고 말이야… 익었네. 한 쌈 일단 입에 넣어 봐.”
쌈을 먹기 전에 소주잔을 터는 윤조를 보던 강일은 불안했다.
“에헤이… 술 천천히 마셔. 그거 처 마시고 또 무한 재다이얼 할 참이제.”
“뭐 어떻노. 이러나저러나 안 받을 건데. 그라고 어차피 싫증 난 거면 부재중 전화 몇 백번에 더 떨어질 정도 없어.”
이판사판이다.
초반에 며칠은 그래… 몇 번이나 전화를 했었나를 세어가며 조심스레 통화 버튼을 눌렀었다. 분명 이유가 있어 연락이 없는 것이라 믿었으므로 상대가 가능할 때 전화기를 찾다가 무심코 몇십 번의 부재중 전화를 보면 섬찟할 것이라는 계산까지 했기 때문에… 그러다가 많이 걸건 적게 걸건 여전히 묵묵부답인 지금은 보고 놀래서 전화기를 아예 떨어뜨릴 만큼 부재중 전화 흔적을 남겨도 아무렇지 않다. 슬프게도 점점 마음이 ‘끝날 때 끝나더라도’를 자꾸만 서두로 달고 있는 것이다…
“오빠야, 내가 너무 슬퍼서 술 먹고 죽으면 그 나쁜 놈한테 꼭 연락해라. 내 그놈 땜에 맘 썩다가 죽었다고…”
“어, 그라께. 근데 오늘은 고급 고기를 많이 먹어서 안 죽을 예정이니까 걱정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