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 두고서 떼는 뒷걸음

(8)

by Hazelle

묵묵히 계속 고기를 굽던 강일은 몇 년 전, 자신이 실연으로 힘들어할 때도 윤조가 옆에서 똑같이 해 준 것을 기억했다. 했던 소리 또 하고 또 하고… 실연한 당사자도 지겨워질 만큼 똑같은 레퍼토리를 읊어도 슬픈 것도 배는 채워 가며 해야 한다며 굳이 밥을 사 먹이고 주말마다 심심하다며 억지로 불러내고 어디서 유행한다는 시시한 농담을 잔뜩 주워와서는 정신 사납게 메들리로 떠들어 대던 그 착하고 마음 깊은 후배다. 덕분에 치료가 되었더니 부작용으로 오히려 그녀를 많이 의지하다가 마음도 저절로 많이 부었다. 그래서 딱 한 번 고백했지만 미안한 기색도 없이 그녀는 단칼에 거절했다. ‘나는 오빠랑은 잘 안 되면 헤어지고, 평생 다시는 못 보는 그런 사이 안 하고 싶다.’라는 게 이유였고 강일도 깊게 동의했다. 사실 우리 사이는 참 좋다. 불안하지 않고, 헤어지지 않아 좋다. 다만… 이렇게… 그녀가 다른 이 때문에 많이 아픈 것을 옆에서 무기력하게 견뎌야 하는 것을 빼고는…


“어! 눈 오네? 나도 낭만적으로다가 눈 오는 밤 데이트 실컷 하나 했는데… 올해도 여전히 눈은 질척대고 더럽고… 몸에 달라붙어 녹으니 춥네…”


“겨울이면 흔해 빠진 게 눈인데 올해 유독 눈, 눈 거리네. 원래 눈이고 비고 딱 질색이라며.”


“어. 비 오는 것도 싫고, 눈도 싫은데… 그래도 그런 거 오는 날 같은 우산 밑에서 어쩔 수 없이 가까이 붙어 걸으면서 심장 소리 신경 쓰이는 거… 그런 거 해 보고 싶었다고!”


“그래? 우산이 없는데… 어떻게 저기 바이더웨이 가서 하나 사와? 하나 사서 나눠 쓰면 어떻게 심장 신경 쓰이고 뭐 그런 거 비스무리하게 가능하겠나?”


“됐다. 거 편의점 우산, 쓰레기 같은 게 막 삼천 원인데 그걸 왜 사. 그거 같이 뒤집어써도 혼자 있나 싶게 오빠한테는 뭐 하나 신경 쓰이는 게 없는데…”


“쳇. 피차일반이야. 왜 이래. 니 하고 붙어 있으면 하도 심장이 고요해서 내가 지금 죽은 건가 싶을 정도라니…”


사이가 고만고만하면 둘 다 어른이라도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초등 고학년 수준인 법이다.


“오빠야, 지겹제… 내가 요즘 맨날 징징대서… “


“아니 다행이네. 그런 경향이 없지 않지… 뭐 개안타. 니도 내한테 그래 줬잖아. 나 그때 니한테 말은 못 했지만 진짜 고마웠다. 지금 갚는 중이니까 개안타. 원래 친한 사이는 여러 가지로 품앗이 같은 거 한다이가.”


“아!! 맞다. 내가 뿌려놓은 게 있었지. 맞다, 그때 민 강일이 세상 찌질했다이가. 아하하하하. 죽겠다고 설치지를 않나, 곡기도 끊고… 옛날 사람들 상사병으로 죽기도 했다던데 내 그때 은근히 쫄았었다. 초상 칠까 봐…


그래… 맞다…

근데 오빠 니 안 죽더라.

금방은 아니었지만… 결국엔 멀쩡해지더라. 그래서 내가 얼마나 기뻤다고.


그렇네… 나도 그렇겠네… 결국 나도… 그렇게 다시 멀쩡해지겠네. 다행이다…


근데 오빠… 나 지금은 너무너무너무 힘들어… 흑…”


결국 그녀가 울었다.

참새 같이 얇은 어깨를 떨면서… 어떤 말도 도움이 안 되는 걸 잘 아는 강일이 그냥 말없이 우는 그녀를 가만히 안아준다. 눈에 젖는 걸 싫어하는 여자를 최대한 감싸면서… 지금 그녀의 마음엔 내가 한 방울도 들어 있지 않은 걸 알지만 그녀 마음 없이 내 마음 만으로도 충분하다. 내 마음이란, 이 가볍게 차가운 눈 한 조각도 작은 몸 어디 한 군데 적시지 못하게 하고 싶은 정도이다.


“내 우는 거 아니다… 이거 눈물 아니고, 눈, 물이다… 알제?”


고개는 여전히 못 들면서 끝까지 센 척은 해보고 있다.


“안다, 안다. 그거 눈물 아니다. 우리 김 대리가 얼마나 독한데… 시시한 연애 한 번에 울겠나.”


밤이 늦어지자 기온이 더 떨어져 취객들도 걸음을 더욱 빨리 하고 있는데 정 붙일 곳 없는 객지 생활 선후배는 한참을 그렇게 얼어붙은 듯 붙어 서 있었다. 내가 걸리면 불치병이고 남이 걸린 걸 보면 가벼운 감기쯤으로 보이는 이상한 병… 사랑병이다. 그래도 걸려본 이는 안다. 그 이상한 병이 얼마나 사람을 힘 빠지게 만드는지… 그래서 강일은 겨울 추위보다 이 고향 후배가 더 춥다.


한참을 울어 눈이 퉁퉁 부은 윤조를 집에 올려 보내고 강일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행님. 접니더.

네… 많이 힘들어하지예… 오래가겠는데예… 오데라고예? 아… 알았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강일은 전화를 끊고 오던 길을 거슬러 신촌 기차역을 못 미처 있는 지하의 작은 카페로 향했다.


여전히 말쑥해 보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상갓집에서 밤이라도 새운 사람 모양 여기저기 잔 구김이 간 자켓이며 퀭한 눈이며 요란하지 않은 마음고생 중인 것이 분명한 장 선생이 힘없는 미소로 강일을 맞았다.


“하나는 눈 밑에 호주머니 달고 다니고, 이 분은 눈이 우물처럼 푹 꺼졌고… 참 천생연분 들이네예.”


인사를 생략한 강일의 첫마디는 곱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대만이 멀쩡해 보였다면 정말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고 잠깐 생각했다.


“아니, 왜… 김 대리 어디 아파?”


“뭐라카노 이 행님이… 뭔 단기 기억 상실증 이런 거 아니지예? 당연히 아프지예. 속을 끓이다가 끓이다가 아주 그냥 닳아 없어질 판이라예.”


“… 그렇구나. 어떡하겠어… 강일 씨가 좀 도와줘. 혼자 두지 말고…”


“그라고 있긴 한데예. 그냥 사라지는 걸로 마무리는 할 생각 마소. 그라면 저 자식 성격에 진짜 오래 앓을 거라예. 적당하게 이유를 찾던가, 아니면 모질게 싫증 났다고 대놓고 말하던가… 절대 진짜 이유는 말하지 말고요. 그 이유는 말하면 절대 못 헤어집니더. 저도 아무리 생각해도 행님이 옳다고 생각하는데예… 제가 무식해서… 딱 한 번만 마지막으로 물어봅니다… 진짜 예외는 없어예?”


“… 여자인 경우는 반반이야. 그렇지만 우리 집은 또 대대로 여자가 귀했어. 남자인 경우엔 다들 오십 전에 떠났어. 그리고 혹은 예외가 있다 하더라도… 어느 순간부터는 하루하루 불안하게 살아야 해. 내가 과연 운명을 비켜 갈 재수를 타고났는지를 궁금해하면서… 그런 인생에 초대하고 싶지 않아. 내가 초대만 하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되는 길이니까… 우리 김 대리한테 비극의 여주인공은 안 어울리잖아, 안 그래? 코믹 만화 여주인공이 딱인 사람한테 평생 마음 졸이다 결국은 울리는 스토리를 줄 순 없어.”


강일은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해 잠긴 목을 몇 번 풀었다.


“… 그라믄… 무슨 이유를 대실 건데예. 갸가 절대 뒤도 안 돌아볼 이유라고 한 거 중에 바람도 있는데… 뭐 초잡스럽지만 그거 보편적이고 간단하겠네예. 새 여자의 등장으로 니는 팽 당했다… 뭐 이런…”


대만은 강일의 뻔한 시나리오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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