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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쌓아두고 골라가며 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 6시. 실연이 업무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을 증명하는 논문이라도 쓸까 보다…
“김 대리. 여섯 시 지났어. 일 고만 해. 밥 믁으러 가자.”
효도 신발을 즐겨 신는 본사 사장이 발소리도 없이 어느새 다가와 서 있었다. 이런 식으로 귀신처럼 나타나 직원들을 놀래키는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서 직원들은 저 놈의 귀신 신발 좀 누가 안 갖다 버리냐고 하고 사장은 미국 본사 출장 갈 때마다 몇 켤레씩 깔 별로 또 구입해 오곤 한다.
“아! 사장님, 벌써 오셨어요?”
“벌써라이… 여섯 시면 퇴근시간이지. 여의도에서 여섯 시 넘어 나올라하면 잘하면 내일 도착할 수도 있어. 연말이라 어찌나 막히는지… 상무님 안에 계시나?”
대답도 하기 전에 성질 급한 사장이 휘적거리면서 상무실로 이미 걸음을 옮겼다.
“아이고! 깜짝아!! 거 신발 그거 뭔데? 스폰지로 만들었나, 우예 소리라곤 안 나노. 간 떨어질 뻔했네!”
같은 경상도 출신에 동년배, 사장은 공대 상무는 상대 출신이지만 그들의 학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결속력 높은 서울대. 첫 회식 이후 둘은 이미 성만 다른 형제로 거듭난 사이다.
“우째, 담번에 미시간 들어갈 일 있으면 한 켤레 사다 드릴까예, 행님?”
“아 됐어. 소리도 안 나고 생긴 것도 마 얄궂구만.”
“무신 소리. 한 번 신어 보시면 다른 신발은 못 신습니더. 어찌나 편한지… 거의 맨발이라예.”
“그라믄 그냥 맨발로 다니도 개안켔네. 으하하”
아저씨 둘이 만나니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남의 눈치 안 봐도 되는 대빵 둘이 만나 그렇다.
“날도 춥고 어두운데, 뭐 하러 기다립니꺼. 어여 가십시다. 회식.”
“그라까? 어이 뭣들 하노. 오늘 서 사장이 회식 쏘는 거 알제? 팀원들 이제 같이 내려가지?”
을이 대접하는 회식은 직접적 연관이 있는 사원들만 참석하는 게 일반이다.
“김 대리, 같이 가자.”
하루 종일 평소와 다르게 말 한 번 제대로 안 걸던 한 대리였다.
“대리님 오늘 이상하시네요? 오늘 아침에 잠깐 얘기한 거 말고는 오늘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안 거시더니…”
“아… 그랬나? 뭐 그런 날도 있어야지… 알지? 나랑 오늘 약속한 거?”
“네, 알아요. 봐서 2차쯤 옮길 때 빠지시죠?”
“그러자고. 내가 적당히 핑계 대고 먼저 빠지면 김 대리가 아프다고 하고 한 5분쯤 있다가 나와. 건물 바로 앞에 있으면 걸리니까 내가 그 옆 건물 편의점에 있을게. 알았지?”
“네… 그럴게요.”
드디어… 한 대리가 오늘 중요한 이야기를 해 줄 모양이다. 어쩌면 장 선생의 말을 전할 수도 있겠고, 아니면 그 인간이 새 여자를 사귀게 되었다던가… 하는 나쁜 소식을 전할 테지. 이미 포장을 까 보기도 전에 풍기는 분위기는 스포일러가 된다.
원래 추운 날 뜨거운 술은 금방 취하게 한다. 뒷 약속이 있어 마시는 척만 하고 두는 중인데 저 놈의 한 대리는 나와 한 약속을 잊었나 사장, 상무보다 더 빨리 사케잔을 들었다 놓았다 분주했다. 이십 분쯤 지나자 컨설팅 쪽 업무라인 다섯 명도 마저 다 들어선다. 깔끔하게 머리를 넘긴 오 선임도 보인다.
“잘 지냈어? 이제 내년부터는 매일 보겠네?”
“강남에서 오느라 고생했겠네요.”
“막히니까 오랜만에 다들 지하철 탔지 뭐. 지하철에도 사람 엄청 많아. 다들 연말이면 무조건 나가야 한다 생각하는 건지…”
언제나처럼 오 선임은 딱 떨어지는 정장에 먼지 한 톨 없는 구두를 신고 넉살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옆에 자연스럽게 앉는다.
“그 괴짜 남자 친구는 잘 있고?”
뭐 예상했던 안부인사고…
“오 선임님 잘 지내셨어요? 거 왜 궁금하지도 않은 남의 남자 친구 안부를 먼저 묻고 그러세요? 물을려면 제 안부를 물어야죠. 아무래도 저랑 더 가깝지 않나요?”
“아 그렇지. 당연히… 윤조는 잘 지냈어?”
더 가까운 척을 하고 싶은지 오 정훈은 부러 이름을 불렀다.
“잘 지내는 기준이 밥 먹고, 숨 쉬는 거라면… 잘 지냅니다.”
깊은 뜻이 담겼다고 생각지 않는 오 정훈은 또 은근히 까칠하게 대화를 단절시키려는 윤조의 꼼수 정도라고 생각하고 살짝 토라진 듯 한 대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한 대리님, 오늘은 예산 쪽 현업분들만 참석하셨나 봅니다. 전체 송년회 한 번 해야지요. 내년 프로젝트 TF 팀 미리 좀 친해질 겸 해서 저희 쪽에서 한번 어렌지 해 보지요. 그나저나 우리 김 대리는 조금 더 까칠해졌네요? 아무래도… 연말이고 이제 곧 진짜 밀레니엄 시대니까 막바지 버그 체크에 정신이 없어서겠죠?”
안부를 묻는 척 사실은 내 연애사 진행이 궁금한 게 뻔한 오 선임의 넘겨짚는 질문에 한 대리는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 사실 한 대리는 오늘 내내 유체이탈이라도 한 듯 껍데기만 있는 기분이다.
을이 주도하는 회식은 간혹 있다. 주로 프로젝트 수주가 확실해졌을 때 잘 부탁한다고 한 번, 본격적으로 프로젝트 시작되는 킥 오프 때 한 번, 프로젝트 기간 중에 격려차 혹은 좀 더 프로젝트 확장을 위한 로비성 회식, 종료되어 갈 때쯤 다음 프로젝트를 기약하며 혹은 유지보수 계약을 공고히 하기 위한 회식… 그중 중요한 첫 오프닝 회식과 클로징 회식에는 을의 사장과 갑의 임원급이 함께 참석하고 깐깐한 갑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초반에 을들이 빠른 잔 회전 전략을 쓰기 때문에 일차에서부터 다들 교포 발음을 구사해 간다.
이번도 예외는 아니다. 본인만 빼고 세상 사람 모두가 아는 술 약한 사장이 여의도 집으로 귀가할 때 이코노미석을 끊어야 하나 비즈니스 석을 끊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장이 장고 끝에 ‘가까우니까 이코노미 끊지 뭐’라는 헛소리를 할 때쯤이면 연기처럼 사라져도 괜찮다. 어차피 그쯤이면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 마저 잊은 단계이기 때문이다.
“김 대리, 슬슬 빠져도 될 것 같은데… 나 먼저 나갈게. 좀 있다가 옆 건물 일층에 편의점으로 와.”
“…네…”
한 대리가 자연스럽게 화장실을 가는 척 자리를 떴다. 가끔 남자들은 가방이 없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괜찮다. 언제든 티 안 나게 회식 자리에서 증발할 수 있도록 평소 회식할 때도 화장실을 갈 때마다 화장을 고치러 가는 양 일부러 가방을 챙겨 들고 갔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치밀하다는 것은 하루 이틀간의 계획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한 대리가 자리를 뜬 후 잠시 사장의 상태를 지켜보았다. 그것은 중요하다. 이 프로젝트에 회사를 대표해 파견되어 있는 담당자가 나 하나라 한 대리만큼 쉽게 증발하는 데에는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 일 년 내내 옆에서 본 바로 상무는 지금 내가 사라져도 내일 아침에 기억할 리 없는 상태이고, 사장의 상태가 아직은 약간 애매하다.
“김 대리야!! 우째 마무리는 완벽하게 되어가고 있재? 예산 프로그램에 밀레니엄 버그 끼면 우리나라 기름통이 휘청 하는 기다. 알고 있제? 니 단디 해야 된다이.”
아뿔싸…
덜 취했다. 분명히 어이없는 이코노미석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은 데 갔던 정신이 마포대교를 타고 돌아왔나… 갑자기 다시 프로젝트 이야기를 멀쩡하게 꺼내다니…
“그럼요, 사장님 걱정하시지 않게 잘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다가 기름처럼 찰랑거리게 담은 제 사케 한 잔…”
다시 이코노미석을 태워야 한다. 오늘 한 대리한테 은밀하게 들을 이야기가 좋지 않다는 것은 이미 감지했지만 그래도 꼭 들어야 한다. 이 지리하게 애만 타는 연애를 접을 때 접더라도 꼭 그 이유는 알아야겠다. 그러지 않고 그냥 흐지부지 세계에 존재하는 비공식적인 몇 만 번째 불가사의로 등록시켰다간 궁금증으로 먼저 죽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므로 정성을 담은 사케 잔을 거푸 사장에게 수청 들고 있다. 추운 날 더운 술은 다행히 그를 다시 이코노미석으로 초대할 것이다. 누군가가 정신 들게시리 추운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 담배를 피우자고 권하지만 않는다면…
“그래, 그래. 우리 김 대리 꼼꼼하고 근성 있는 거야 내가 첫눈에 알아봤다이가. 걱정 안 해! 걱정 안 해도 되는 우리 김 대리니까!! 그나저나 나 여의도 갈 때 이코노미석 끊어야 되는데… 자리 있긋제?”
“그럼요, 사장님. 걱정 마세요. 제가 예약해 두겠습니다!”
“그래, 그래. 오늘 신 비서를 일찍 퇴근시켰더만 영 불편하네. 김 대리한테 부탁 좀 하자.”
“저 화장실 다녀와서 바로 예약하겠습니다.”
세상에 여러 주사가 있지만 남을 웃겨주는 주사는 귀하다. 우리 사장은 그런 귀한 재주를 보유한 경상도 출신의 MIT 조기졸업에 빛나는 수재다.
사장이 여의도로 이코노미석 타고 떠나시는 것은 차마 배웅을 못 하겠다. 잠시 화장실에 들러 상태를 점검하고 조용히 로바타야끼를 빠져나온다. 한 때 같은 집안 친척이 되어 회식 자리가 아닌 명절 고스톱 판에서 어울리고 싶었던 한 대리를 만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