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예전에 강일 씨가 힌트를 줬었어.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좋은 기억으로 남기는 어려울 테니까… 강일 씨가 그랬잖아. 아름다운 이별은 개뿔, 그런 건 헛소리라고. 이별은 더러울수록 미련도 안 남고 후유증도 없다고 했잖아. 그래 보지 뭐.”
강일은 자신이 준 힌트를 사용하겠다는 대만의 말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비겁하게 잠수를 영원히 타지는 않을 모양이니 다행이다.
“그래도…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내게는 이것이 이별이 아니야. 이별은 사랑이 끝나 마음도 정리되는 거니까… 헤어지지 못하는 이 마음일 때 멈춰야 영영 이별하지 않을 테니까…
형진이 형한테 좀 부탁해야겠어.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아마 도와줄 거야. 김 대리를 많이 아끼기도 하고…”
남자 둘은 이내 말이 없어졌다.
각자의 마음이 바빠 말하는 것도 마시는 것도 잊어버린 듯, 잔뜩 식어 버린 미지근한 커피를 하릴없이 젓고 있었다.
대만과 헤어져 여전히 싸리눈이 소금처럼 내리는 신촌 한복판에서 강일은 생각했다. 이별인데 이별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저 둘은 각자 같은 소리를 서로는 모르게 하고 있다. 하나는 내 마음이 끝나지 않았으니 절대 헤어질 수 없다 하고, 다른 하나는 그 마음을 지켜야 하므로 지금 멈춰야 한단다. 당사자만 모르는 이별… 그리고 그 이별을 준비하는 이별 조작단들… 이 지겨운 눈이 녹고 얼고를 몇 번이고 반복하다 결국 새로운 천년이 밝으면 이 이별도 점점 묻히겠지… 아니… 그랬으면 한다…
몸이 좀 아프다고 마음이 같이 아파지는 건 아니지만 마음이 아프면 몸은 따라 아플 때가 많다. 뇌가 생각하는 걸 힘들어하니까 몸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좀 늦겠다고 전화했더니 안 부장이 아예 하루 쉬라고 몇 번을 권했지만 결국 연말에 일 많은 거 쌓아두고 누워 있자니 더 속만 복잡할 것 같아 조금 늦게 출근하는 참이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정아 씨가 뭐가 그리 신나는지 싱글벙글 인사를 건넨다.
“어머, 김 대리님 아프시다면서요. 쉬시지 않고…
그래도 잘 나오셨어요. 오늘…”
“오늘 또 회식이라고요?”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정아 씨가 기분이 좋으니까요…”
“맞아요. 전 회식이 회사생활의 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상무님이 뭐 먹고 싶냐고 물으면 오늘은 회 먹는 거 어떠냐고 은근히 추천 좀 해주세요. 히히”
이 사무실에… 내가 심란한 걸 모르는 인간도 있다는 것이 순간 섬찟할 지경이다.
“안녕하세요, 대리님.”
“어… 어. 김 대리, 좀 괜찮아? 유자차라도 한 잔 뽑아다 줘?”
“괜찮아요.”
“있어 봐. 얼른 뽑아 올게.”
괜찮다는데 굳이 가져다주겠다며 사라지는 한 대리는 오늘 살짝 좀 다르다. 얼굴을 제대로 못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몰골이 그 정도로 심한가…
무심코 서랍을 열었더니 경미 씨가 주고 간 손거울이 있어 꺼내서 몰골을 살피는데 그새 한 대리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유자차를 손에 들고 섰다.
“잘 먹을게요.”
“응?”
“저 주려고 뽑아 온 거 아니에요? 그 유자차?”
“아! 맞지, 맞아. 김 대리 줄라고… “
한 대리는 확실히 오늘 아침에 이상하다. 이렇게 할 말을 못 찾아 더듬대는 것도 낯설고 반쯤 정신이 딴 데 팔린 사람 같은데 뭔가 할 말은 있는 듯이 근처를 못 떠나고 미적댄다.
“대리님. 뭐예요? 저한테 뭐 할 말 있죠? 휴게실로 가요?”
“어? 아냐 아냐. 딴 게 아니고… 오늘 회식 후에 잠깐만 나 좀 따로 볼 수 있어?”
거절할 수 없는 어떤 기운이 느껴진다.
“그럼요, 저 안 바빠요. 회식 마치고 봬요.”
“아, 오케이… 그러면 나중에 봐.”
한 대리는 막상 흔쾌히 응하니까 오히려 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급하게 자리로 걸음을 돌렸다. 적당히 유들유들하고 머리도 좋아 말을 더듬거나 행동이 부자연스러운 적을 거의 못 보았는데… 그러니까… 저 남자, 오늘은 같은 프로젝트 팀원이라기보다 오래 알고 지낸 동네 오빠가 하기 껄끄러운 이야기를 해야 해서 안절부절 중인 그런 느낌이다. 그와 나 사이에… 저럴 일이… 좋지 않은 느낌이 드는 것이야 당연했지만 한 편 마음 한켠은 또 담담했다. 지나고 보면 그렇다. 신기가 뛰어난 무당은 바로 코 앞에 닥칠 일은 잘도 맞춘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아주 조금 후 일어날 일 정도는 스스로가 대충 감지하게 되는 편이다. 그날 나는 달이 한참 차오르는 시간쯤에, 한 대리가 비보를 전할 것쯤은 알고 있었다고나 할까…
연말 회식은 명분만 바꾸어서 데자뷔처럼 또 하고 또 하고… 이번 회식의 타이틀은 무엇인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김 대리! 오늘 무슨 회식인지 알고 있제? 몸이 안 좋다면서? 그래도 오늘 회식은 김 대리 빠지면 안 되는데 우짜지?”
“아니에요, 이제 많이 나았어요. 그런데 무슨 회식이길래 제가 꼭…”
“오늘 김 대리네 사장이 쏘는 회식 아이가. 저기 뭐꼬, 알고리즘 짜는 컨설팅 회사… 맥켄지였나? 그짝 컨설턴트 몇 명이랑 해서 올해 보내는 겸, 내년 새 프로젝트 으샤 으샤 하는 그런 회식이잖아. 아! 어제 김 대리 퇴근하고 나서 늦게 잡혔었네. 어쨌건 그리 알고 있고, 오늘 회식은 건너편 현대 건물 밑에 로바다야끼다.”
“정아 씨한테 예약하라고 할게요.”
“어, 대충 한 열댓 명 간다고 해.”
“아, 부서 다 가는 거 아니고요?”
“우리가 쏘는 것도 아니고, 김 대리네 회사에서 책임지는 건데 어중이떠중이 다 가면 민폐지. 현업이랑 관리자만 참석하는 걸로.”
“네.”
정아 씨가 닭 쫓던 개 지붕 보는 순간이 찾아왔다…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하지만 우리 사장이 쏘는 비싼 회식에 경리까지 끼면 돌려 말하는 법 따위 모르는 우리 사장은 대놓고 면박을 줄게 뻔하다.
“아, 열다섯 명 정도… 부서 전체 가는 거 아닌가 봐요?”
여전히 발랄한 목소리… 전체가 다 안 간다는 걸 알면 우선 본인부터 제외라는 것을 알 법도 한데 말이다. 점심 회식 후에 차 안에서 상무가 ‘어떤 인간들은 딱 대놓고 찔러줘야 겨우 알아먹는다…’라고 했던 주옥같은 말이 생각난다.
“음… 이 회식 우리 본사 사장이 쏘는 거예요.
그래서 상무님, 부장님, 현업 대리, 사원, 우리 회사 쪽 기술 팀장, 차장, 그리고 컨설팅 업체에서 또 몇 분 이렇게 오거든요. 최소한의 인원인데 거기에 정아 씨가 낄 이유는 없어요. 오늘 일찍 퇴근할 절호의 찬스. 연말인데 친구들 만나고 그럼 되겠네요.”
결국… 찔러 말했다…
“아… 네… 전… 친구 없어서 회식이 더 좋은데… 할 일 없으면 저도 참석해도 되겠죠? 열여섯 명으로 그럼 예약을…”
“정아 씨. 정아 씨 빼고 열다섯 명. 딱 그렇게 예약하라고. 사람이 좋게 말하면 그때가 마지막 찬스야. 부끄럽지 않게 물러서는 마지막 찬스!”
결국 건너편에서 보고 있던 안 부장이 언짢은 목소리를 냈다.
어쨌거나 사태는 정리가 되었으므로 자리로 돌아오는데 또 이 상관없는 상황에 그런 생각이 불쑥 든다. 나도… 누가 봐도… 끝났는데 혼자 다시 껴 달라고 조르고 있는 건가… 사랑은 얄궂다. 넘치게 받을 때는 세상 든든한 믿는 구석이 되어 가져 보지 못한 극대의 자신감을 갖게 하다가, 잃는 순간부터는 세상에서 제일 초라한 거지가 된 듯한 느낌을 던져 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