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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Nov 20. 2024

앞에 두고서 떼는 뒷걸음

(3)

이미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점심 회식이 시작되었다. 사실상 연말이 되면 이것저것 이유를 많이도 붙여서 ‘올해 마지막 교육 기념’ 또는 ‘올해 마지막 단합회’ , ’ 20세기 마지막 등산대회’ 등등…  그렇게나 일 년 내내 술을 마시고 또 마시고, 이유를 붙이다 붙이다 떨어질 때쯤에는 고맙게도 연말이라는 당당한 이유가 도래하니 연말 술독에 빠졌다가 살아날 때쯤이면 이제 또 산뜻한 새해라는 이유가 반갑게 새 술독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점심 회식에는 술을 곁들이지 않는 게 일반이다.


“여기 점심 특선이 두 종류였지? 나는 오향장육 들어가는 걸로…”


“저도 그걸로 하겠습니다.”


“저도…”


단체로 뭘 시킬 때의 불문율은 또 있다. 우선 먼저 정하지 않는다. 무리의 두목이 시키는 것을 예의 주시한다. 도저히 내가 먹을 수 없는 음식이 아니면 무난하게 두목의 선택에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이 정석이고 정 먹을 수 없는 음식이라면 ‘중요한 두 번째 규칙’을 따라야 한다. 두목이 시킨 메뉴와 동일한 가격대, 혹은 오히려 좀 더 저렴한 것을 골라 입맛이 달라 송구함을 조용히 표현한다. 음식이 나오기 시작하면 당연히 가장 먼저 나온 것을 두목에게 전달되게 유도한다. 그리고 사람의 본능에는 먹고, 자고, 싸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정도 기본 규칙을 배움 없이 깨치는 것 또한 정상적인 사회인에게는 본능에 속한다.


그러한 본능이 잘 발달되어 있는 회사원들이 너도 나도 누구보다 털털하고 고분고분하다는 것을 부각하고자 ‘저도 같은 걸로 하겠습니다’를 복창할 때였다. 누군가가 궁금하지 않은 본인의 식성을 천명한 것이…


“어머, 저는 그 구성에 못 먹는 게 많아요… 아무래도 다른 세트를 시켜야겠어요. 호호호.”


그렇게 그녀는 메뉴판을 꼼꼼히 본 게 맞는지 의심스러운 가격 10만 원짜리 점심 특선이 아닌 일반 세트를 시켰다. 살다 보면 희한한 데서 시간이 멈추는 경험을 하곤 한다. 그녀가 10만 원짜리 세트를 혼자 따로 주문하는 순간 좌중은 그냥 멈췄다… 점심 특선은 가짓수를 줄여 네 가지 정도의 요리가 나오고 마무리로 볶음밥이나 짬뽕, 짜장면 중 하나를 고르는 순서인데 일반 코스는 요리가 무려 일곱 가지가 나온다. 점심 특선에는 당연히 포함 안 된 산라탕을 선두로 정아 씨의 화려한 첫 호텔 회식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중간중간 정아 씨만을 위한 음식이 단독으로 나올 때마다 상무는 한 소리를 곁들였다.


“지 주머니 오백 원은 절대 안 꺼내 놓을라는 자들이 주로 지 주머니에서 돈 나오는 거 아니면 막 오백만 원도 별거 아닌 거여.”


“많이 무거, 정아 씨. 아주 많이 드시고 회사 돈으로 드신 그 밥값은 최고의 노동으로 갚으소서.”


“뭐 우리 잘못이지. 다음 회식부터는 상한가 정해놓고 시키는 걸로 하자고.”


이미 혼자만 다른 세트를 시키는 것에 빈정이 상했던 상무는 설마 혼자만 고급 세트를 시켰으리라고 까지는 생각지 못했다가 뒤늦게 나오는 가짓수를 보고야 사태 파악을 했던 것이었다. 


“사람이 기본적으로 눈치가 굉장히 부족한 스타일이야. 막 대놓고 찔러야 겨우 알아먹는 스타일이랄까. 남자 친구가 헤어지자고 할 때도 빙빙 둘러말하면 절대 못 알아듣겠어.”


체할 듯 불편했던 점심 회식이 끝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상무가 끊임없이 불평을 하는 것을 듣다 보니 갑자기 직장생활도, 학교생활도, 사회생활도, 연애도… 눈치가 없으면 망하는 거 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내 연애에 있어 눈치가 살아 있는 편인가…


오전 내내 연락이 없던 장 선생은 오후 늦게 신촌 만화방에서 강일과 헤어진 후 돌아가는 길이라며 친절하지만 알맹이 없는 짧은 연락을 해 왔다. 그리고 그는 보고 싶다거나, 만나자는 건설적인 내용 없이 굿 나잇만을 목적으로 한 또 다른 짧은 통화를 한 번 더 했다. 그러고 보니 그다음 날은 점심 잘 먹으라고 짧디 짧은 문자가 다였다.


사흘째다.

대체 그전 연속으로 보여줬던 확신과 달달함이 그냥 내 환상이었나 할 정도로 내게는 길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다. 우선은 얼굴을 봐야겠는데 이틀째 남자는 대놓고 얼굴 좀 보자는 내게 바쁘다고 어물쩍 퇴짜를 놓았었다. 그러더니 사흘째인 오늘은 짧은 문자 하나 없다…


“예전에는 그만 기다리라고나 했지… 이제는 안 받는 전화 그만 좀 애닳게 하라고 해야 하니… 원… 우리 김 대리 진짜 왜 이러실까.”


워낙 자주 전화를 끼고 다니니 보다 못 한 한 대리가 핀잔을 준다.


“대리님 사촌 진짜 이상한 거 알죠? 싸운 것도 아니고 아무 문제도 없이 잘 헤어졌는데 연락을 그냥 안 하잖아요. 안 이상해요?”


“뭘 그리 이상하다 해… 그런 건 그냥 이상한 게 아니라… 에휴… 그냥 남자가 싫증 난 거라고…”


아픈 말을 해야 해서라기보다는 한 대리는 마치 꼭 무언가를 아는 사람마냥 불편한 기색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돌린 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렇대요? 싫증 났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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