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밥을 같이 먹으면 친해진다.
술을 같이 먹으면 속을 보이게 된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하면 믿는 구석이 생긴다.
믿는 구석이 생기고부터는 조금 더 당당하게 요구하게 된다.
이미 나를 향해 품고 있는 사랑을 더 표현해 보라고…
“요새 들어 핸드폰을 아주 신줏단지 모시듯 한단 말야? 보니까 거의 맨날 만나더만 그러고도 또 님 목소리가 그리 그리워?”
“그러게 말입니다. 거 바쁘지도 않은 남자 친구 사귀면서 연통은 조선시대만큼이나 어려운지 맨날 아주 안타까워 죽어요. 저쪽 산에 봉화가 올랐느냐!… 앗… 그만해야겠다…”
저 둘은 어찌나 합이 잘 맞는지 육각수 같은 남성듀오 하나 결성해 어느 날 갑자기 놀부 타령을 신곡으로 발표해도 놀랍지 않을 판이다.
“아 진짜 왜 이리 남의 회사 직원 사생활에 관심들이세요!”
“그 남의 회사 직원이 우리한테 무지 중요한 선생님이니까 그렇제. 오늘 올해 마지막 교육 있는 거 아시지예, 김 대리님? 오늘 클라이언트에 이미그레이션 하는 거 배우고 나면 내년 1월까지는 현업만 해야 하니까예, 내년 1월 새 수업 시작 전까지 잘 기억 남도록 명 강의 부탁드릴라 하는데예… 선생이 낭군한테 빠져서 정신이 없으니까네, 마 부장 된 자로써 또 신경이 쓰이잖아.”
“교육 준비는 이미 몇 달 전부터 잘 되어 있습니다. 학생님, 10시 반부터 교육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아이고, 그럼. 그럼. 우리 김 대리 프로인 거야 내가 왜 몰라. 그냥 놀려본 거여. 그나저나 그 의원 양반 아직도 그리 애를 먹이나? 아니면 그야말로 불이 붙은 건가…
아! 이 말한다는 걸 깜빡했네, 오늘 올해 마지막 교육이라고 점심은 상무님이 쏜다. 오랜만에 남산에서… 오케이?”
“네, 네…”
손가락은 여전히 통화 버튼에 올린 채 건성으로 부장의 긴 말에 짧게 맺음을 했다. 괜히 얼쩡거리면서 커피를 마시는 동안 남의 통화 엿들을 심산이었던 아저씨 둘이 너네가 사라지기 전엔 이 버튼을 누르지 않겠다는 의지를 잘 전달받았는지 세상에서 제일 느린 걸음으로 밉살스럽게 휴게실을 느릿느릿 빠져나가고 있다.
벨이 몇 번 울리나 싶더니 이내 저쪽에서 인기척이 난다.
“오빠! 어제 민 강일이 잘 데려다 준거야?”
이 남자가 방금 일어났나… 수화기 너머로 목 푸는 둔탁한 헛기침 소리만 두어 번 난다.
“뭐냐 너! 선배도 오빠도 아니고… 이제 오빠라 못 부른다고 막 선배 이름을 성까지 붙여서 민 강일 이래 쌌지?”
“엇… 왜 남의 전화를 받고 난리야!”
“또 또 전화 안 받는다고 우리 김 대리 업무에 차질 있을까 봐 내 또 친절한 사람이라 마음이 쓰여서 받았지. 네 낭군님은 잠깐 요 앞 상가에 채소 사러 가셨다. 보니까, 핸드폰을 핸디 하게 가지고 다니는 스타일이 아니시네. 이럴 거면 집 전화로 연락하나 핸드폰이나 마찬가지겠어.”
“근데… 왜 남의 집에서 아침부터 전화를 받아?”
“어제 너무 늦어서 행님이 자고 가라 했다. 왜! 지금은 해장국 해주신다고 없는 채소 구하러 가시고… “
“오빠는 술 안 먹었잖아.”
“그건 파주에서 안 먹은 거고, 이 행님 집에서 또 마셨지. 이 행님 억수로 술 쎼네.”
“알았어… 난 지금 교육하러 들어가야 하니까… 내 님이 오거든 오후에 연통 좀 달라고 전해줘.”
“알았다. 뭐 근데 전화 한 통에 너무 일희일비하지 마라잉. 일 할 때는 일에만 집중해라.”
“뭔데, 니가 우리 사장이가. 끊는다.”
교육장을 향하는 발걸음에 힘이 들어간다. 기분이 그냥 좋다. 그렇게나 어디로 날아갈까 불안했는데 내년에 병원 복귀할 예정이라니 다 이해가 되고 이해가 가니 마음도 편하고 마음껏 사랑만 하면 되겠다 싶어 지니 세상이 온통 총천연색인 것이다.
“어머나, 대리님도 그것 때문에 기분이 좋으시구나?”
뽑고 나서야 눈치가 조금 모자라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 상무와 부장이 하루에도 여러 번 회한의 한숨을 몰아쉬게 만드는 새 경리 정아 씨다.
“네??”
내가 너무 내 연애에 몰두해 있나… 뭔가 복음을 내가 놓쳤나 보다.
“오늘 부서 회식하잖아요. 하이얏트에서! 저 하이얏트 처음 가보거든요. 대리님은 가보셨어요? 이 부서는 그런 데서 회식 종종 한다죠? 전 진짜 이번에 운이 너무 좋았던 거 같아요! 상무님이 중식당으로 예약하라더라고요,
저는 프랑스 식당이 더 궁금했는데… 하기사 호텔 중식당은 아예 다른 분위기겠죠? 아 저 너무너무 기대돼요!”
“아하하… 이 부서는 종종 그런 데서 하니까… 정아 씨 앞으로도 계속 신나겠어요. 저는 그럼 교육장 들어가 봐야 해서…”
맛있는 거 당연히 싫어하는 사람 없지만 그게 회식이면 살짝 기분이 다른 법인데 이 아가씨는 진심으로 신이 나 있다. 회사 오는 낙이 회식이라면 타고난 회사원 체질이 맞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교육장 앞. 문을 열기 전에 미리 창문으로 살짝 들여다보니 서울대 출신 모범생들도 본성은 비슷한 모양 미리 교육 시간에 하려고 맞고 게임을 띄운 자가 여럿 보인다. 그러나 뛰는 자 위에 나는 자, 꼼수 부리는 학생 위에 그 속을 다 들여다보고 있는 선생이 있는 법이다.
“자, 지금부터 외부 인터넷 끄고 사내 네트워크만 살릴게요!”
그들의 쓸데없는 준비성을 패대기치는 것으로 밀레니엄 시대를 맞기 위한 마지막 수업이 진행되었다. 마치기 20분 전에는 테스트를 보겠댔더니 세상에서 가장 똘똘한 아저씨들로 변신한 왕년 범생이들이 귀엽기까지 할 판이다. 자고로 가진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데는 숙제와 시험이 최고인 법.
“차 몇 대 나눠서 가지? 누구누구 차 움직일 건가 정해봐 봐. 그라고 저기 자재실은 밑에 경비 있어도 우리 다 비울 때는 잠가야 되는 거 알지? 키 누가 갖고 있노, 정아 씨 오데 갔노.”
“이미 차 누구누구 가져갈 건지 정해놨습니다. 상무님 쪼매 있다가 일층 내려가시면 됩니다. 한 대리 차 올라올 때 연락하기로 했습니더.”
“모하러… 슬슬 지금 내려가서 시원하게 바깥공기 쐬면서 가면 되지. 김 대리, 같이 가자. 이리 온나. 그라고 새 경리 오데 갔노, 사무실 전화 돌리고 문단속하고 해야 같이 떠나지.”
“아… 정아 씨… 한 대리랑 같이 간다고 신나서 지하 주차장 따라갔는데…”
“뭐?? 본인이 할 일을 모르나? 어허… 참…”
“먼저 내려가십시오. 제가 제대로 하고 나머지 사원들 데리고 따라가겠습니다.”
결국 구관이 명관이라는 소리 할까 겁나는지 재무팀 김 과장이 얼른 총대를 맸다.
“흠… 경력이 있던 거 아니었어?”
“맞습니다. 경력 있어요. 저기 어디 증권회사에서 근무했던데…”
“거 전 직장에서 눈치 없어 잘린 거 아이가?”
“눈치가 없다고 막 자르는 그런 회사가 있을까예? 잘라도 다른 이유 갖다 붙이겠지예.”
핵심 면접관이었던 상무와 부장은 꽤 착잡해 보였다. 이렇게 남자들만 득실대는 사무실에서 여직원은 사실 아주 잘해야 본전이라는 억울한 규칙이 있다. 얼굴 예쁘면 조금 수월한 것 맞다. 그렇지만 얼굴도 예쁘고 행동도 예쁘고 마음씨도 예뻐야 편한 회사 생활이 도래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속으로 쌓이는 사리는 한 톤 급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