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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Nov 11. 2024

이별 보험

(6)

오십세주를 좀 들이킨다 싶던 여자가 상 한편에 엎드려 잠이 들어 버렸다. 몇 잔 전부터는 말릴걸 그랬나… 하다가 대만은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보험 상담을 할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니… 자고로 보험 상담은 일대일이 진리다.


“뭐 그런 이상한 질문을 하십니꺼. 남자 친구라고 막 그리 취조하시고 그러면 안되지예.”


넉살 좋은 선배 오빠가 드물게 살짝 얼굴을 굳힌다. 질문이 너무 도발적이었나…


“누구 좋아하는 건 대부분 본인은 잘 감춘다고 해도 티가 솔솔 나거든. 그렇잖아?”


“… 뭐 아끼는 후배지예. 의리 있는 여잡니더. 군대 있을 때 휴가 나오면 횟수 더할수록 가족이고 친구고 시큰둥하니 ‘또 기어 나왔나’ 이게 인산데, 나올 때마다 지는 쳐다도 안 보는 닭도 사주고, 복학하고 나니까 돈 궁한 선배 아쉬운 소리 전에 과외도 척척 연결시켜 주고… 뭐 그 과외비 반은 뭐 얻어먹는다고 벗겨 갖지만서도… 그런데 왜 그런 건 물어보고 그러십니꺼. 마, 진실이 알고 싶으시다면은 가까운 선배로써 보건대 이 정도로 남자를 진지하게 좋아하는 건 잘 없는 일 이지예. 뭐 그렇다고 장 선생님이 첫사랑 뭐 이런 건 아닐 테지만… 겁이 많은 편이라서 걸을 때도 어디 구멍에 빠질까 봐 땅만 보고 걷는 앤 데 사람 좋아하는 건 오죽하겠습니까.”


넉살 좋게 돌려 대답하는 와중에도 여자를 은근히 많이 아끼는 것은 자꾸만 티가 난다.


“… 어쨌건 강일 씨는 윤조랑 헤어질 사이도 아니고 오래오래 옆에 있어줄 수 있지?”


“아 진짜 이상한 행님이네.

본인이 남자 친구라고요. 제가 아니고예. 지는 그냥 흔해빠진 학교 선배라고요.”


“그러니까…

흔해 빠졌지만 후배를 끔찍이 아끼는 선배니까, 그러니까 옆에 오래 있을 거잖아.”


“뭐… 둘 중 하나가 등쳐먹고 도망가지 않는 이상은 뭐 지금처럼 싱겁게 시시한 걸로 싸워가면서 오래가겠지요…”


“다행이야, 좋은 사람들이 옆에 있어서…”


“아 진짜! 답답하네… 그냥 속 시원하게 털어보소. 남자가 찝찝하게 자꾸만 불안한 기운을 흘려대면 여자가 얼마나 속이 탈까… 맞습니더. 저 제 후배 진짜 아끼고 좋아합니다. 저 자식 울 일 만들 셈이면 단디 생각 잘하이소.”


이 경상도 남자는 무뚝뚝하지만 예의 바르고 넉살이 좋지만 함부로 선을 넘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면 적당한 상대다. 나와 아주 친한 사이도 아니고, 그녀를 아끼는 만큼이나 입도 무거운 사내니까…


“… 나는 점점 아플 예정이야.”


“네?? 오데가예… 그란데 예정이라는 건 또 무슨 소린지… 행님 신기 있습니꺼”


“… 난 강일 씨가 조금은 눈치챈 줄 알았는데…”


시치미를 떼지만 순간 강일의 얼굴이 살짝 당황해서 움찔하는 것을 대만이 놓치지 않았다.


“내년에 병원 복귀 안 하실지도 모른다는 소리는… 

제 고등학교 동기한테 건너 들었습니다… 제 동기가… 행님 병원 인턴이거든예…”


강일은 말을 멈추고 대만의 기색을 살폈다. 아마 아까 윤조에겐 왜 내년에 병원 복귀하는 것처럼 말했느냐고 묻는 눈을 하고…


“맞아… 나 며칠 전에 아예 병원 그만둔다고 했어… 아예 의사를 안 하려고…”


대만은 잠깐 건너편 상 위에 엎드려 수험생처럼 잠든 윤조를 살피면서 뜸을 들였다. 강일은 그 잠깐이 숨이 막혔다.


“아니 왜요! 그 좋은 직업을… 그거 될라고 그리 많이 참고 살았다 아입니꺼. 만화도 못 보고, 오락도 못 하고, 축구도 못 하고, 친구 안 사귀고… 그랬는데 우째 그라십니꺼. 실력도 진짜 끝내주는 수술의라고 하더만… 거 왜 명의, 천재 외과 의사… 이런 거. 행님 다시 생각하이소. 사람이 살다 보면 슬럼프도 오고 그란다데예. 마 푹 놀고 다시 좋은 명의가 되어 주이소.”


장 대만은 강일이 진짜 이유는 모르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기도 아니기도 했다.


“… 우리 집안은 좀 특이해.

우리 막내 고모를 빼고는 윗대부터 나까지 죄다 의원들이야. 왜 그런 것 같아?”


“흠… 지금 당연한 듯 가업으로 이어져 온 직업이 싫증이 났다 이깁니꺼? 그래서 뭐 마음이 점점 아파진다… 이거예요? 흠… 그래도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직업 인데예? 그라고 행님 의원질 말고 뭐 할 줄 아는 거나 있능교? 어설프게 사업, 장사 이런 거 공부머리만 특출 난 사람들이 시작하면 거덜 내는 거 한 순간이라예. 아시지요?”


“제대로 된 답이 아닌데?

왜 그렇게 죄다 의사인 것 같으냐고 물었는데… 왜 그럴까?”


의사 집안인 거 새삼 뽐내나… 

강일은 살짝 거슬렸지만 이내 진지하고도 텅 빈 대만의 눈을 마주하자 남자의 말에 이유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런 집안 많아예, 우동 집 사장은 우동 집 사장을 낳고요, 의사는 의사를 낳고, 운동선수는 운동선수를 낳고… 그래서 우리 속담은 참 알차지예. 콩 심은 데 콩 난다! 아입니꺼. 그 좋은 유전자가 어디를 가겠습니꺼. 그러니까 행님도 운명이다… 생각하고 마 마음 붙들어 매소. 쓰잘데기없는 소리 하시지 말고. 우리 엄마가 이럴 때 항상 하는 민간 속담이 있습니더. 호강에 받혀서 요강에 똥 싸는 소리 하고 있네. 요긴한 말이니까 잘 기억하이소.”


대만은 만지작 거리던 잔을 도로 내려놓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우리 강일 씨 참 똑똑한 사람이야. 답을 금방 맞히잖아.”


애매한 칭찬을 한 대만이 아까 놓았던 잔을 단숨에 들이켜고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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