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이런 잡년을 봐라. 어디서 패악을 떨고 지랄이야. 이래서 집에는 가장! 애비가 있어야 하는거라고. 딸년은 부모 발바닥 때 만큼도 안 여기는 호로잡종이고, 마누라란 년은 서방을 콩밥 먹이는 화냥년이고... 어느 년부터 죽여줄까?”
피가 나는 양 시뻘건 눈을 부라리며 덕수는 두껍디 두꺼운 손으로 닥치는대로 수연을 패기 시작했다. 혼이 나간듯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경실이 달려들어 말리자 덕수는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경실을 연신 밟으면서도 여전히 수연을 향해 사정없이 손찌검을 해대고 있었다. 좁은 방안에서 피할 곳도 없어 우왕좌왕하던 수연은 덕수가 경실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주먹질을 하자 그새 다 떨어진 슬리퍼를 발에 걸치고 미친 듯 거리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기억이 나는 어린시절부터 줄곧 맞아왔다. 그토록 머리를 얻어 맞고도 곧잘 공부를 한 것이 신기할 만큼 모진 매질로 이어진 세월이다. 아주 어렸을 땐 엄마를 동정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수연은 덕수보다 경실을 더 원망하고 저주하게 되었다.
“병신.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살거야. 저렇게 두드려 맞고도 살아 있는게 신기하지. 바보같은 년.”
친엄마에게 거리낌없이 욕설을 퍼부으며 수연은 행선지도 정하지 않고 무작정 내달릴 참이었다.
하지만...
분식집을 나와 횡단보도를 채 건너기도 전에 그녀는 그녀가 거침없이 말했던 거지 같은 팔자 경실보다 먼저 허망하게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차에 부딪혔군...
아파...
그래도 평생 그 개새끼한테 두드려 맞던 것 보단 덜 아파...
...
훗. 결국 난 원하는 대학 따윈 가보지도 못하는 더러운 팔자였는데...
이럴줄 알았음 성국이가 저저번주에 영화 보러 가자할 때 그거라도 따라가 볼걸 그랬지... 난 태어나 영화관에서 영화 한 번 본 적이 없는데... 단체관람하는 날도 난 분식집에서 만두를 쪄야 했는데... 그럴걸 그랬지...
아... 마음이 편해졌어.
진작 죽을걸... 어차피 더 살아봤자 더 좋은 날도 없었을거야. 어차피 더 많이 맞고... 성에 안 차는 대학을 장학금 때문에 갔어야 할테고... 죽어라 돈 벌어 미친 애비놈한테 뜯겼을거고... 그 미친 놈이 죽기 전엔 제대로 시집도 못가고 지옥처럼 살아야 했을거야.... 그러니 참 잘되었어...’
수연은 손가락을 움직여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육신은 제것이 아닌양 생소하다. 어느새 수연은 피를 흘리며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아프게 누워 있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슬프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참으로 담담하게 비쩍 말라 비틀어진 자신의 몸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는 참이었다. 아직 숨이 남았는지 영혼이 빠져나간 육신은 그래도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느새 수연의 영혼은 차가운 밤하늘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이상하게 낯설어 보이는 18년을 보냈던 육신이 점점 작게 사라져간다.
“빙고!
학생말이 다 맞아.
더 살아봤자 좀 전에 학생이 말했던 그 시나리오 있지? 뭐랬더라. 성에 안 차는 대학에, 새빠지게 일해서 개같은 애비 노름 밑천이나 대주고, 그 새끼 죽기 전까진 시집도 못 가고... 어쩜 그리 잘 아는지... 게다가 좋은 소식 하나 더 말해줄까? 그 개같은 자식은 보자... 장부가... 이런거 천기누설이라 발설하면 안되는데 말야, 내 학생이 애처로와서 가르쳐 준다. 보자... 이거 봐 이거봐... 아흔 넘어서 치매로 똥칠 오년하다가 죽는걸로 되어 있네. 좀 좋은 소식은 이 새끼 논두렁에 처박혀서 죽는데 아무도 발견 못해서 저절로 혼자 썩음. 으로 되어 있다야. 그런데 이건 첫번째 팔자고, 갑자기 내일 죽을지도 모를 일이야. 요즘 이쪽 바닥도 워낙 변수가 많아져서 말야. 밀입국한 괴상한 영들이 많아서... 이것들은 아주 막가파라 사람 목숨을 건드리면 안 되는 불문율을 자꾸 깨고 있거든. 어쨌건 그런 말은 해봤자 못 알아들을테고... 학생은 억울할 것 없이 딱 죽기로 되어 있던 오늘 깔끔하게 오셨으니까... 내가 풀코스로 모시면 되겠어. 뭐 내가 재판관은 아니지만... 뭐 그닥 좋은데로 떨어질 것 같진 않네. 자네도 더 살아봤자 자네 아부지처럼 독종이 되었겠어. 꽤나 심보가 못됐었구만. 남 해꼬지도 많이 하고... 쯧쯧. 좀 잘 살지. 그래야 다음 번엔 저런 히마리 없는 에미나 말종 애비는 피할텐데.. .어쨌건 갑시다.”
이상하리 만치 긴 얼굴에 커다란 구멍이 셋 나 있는 괴이한 모습을 한 저승사자는 수연이 대꾸를 하건 말건 상관없이 하고 싶은 말을 주저리 늘어놓는가 싶더니 긴 도포자락안에서 호리병 하나를 꺼내 다짜고짜 수연의 혼을 담아 넣었다.
손을 덜덜 떨어대던 윤조가 겨우 비단봉투의 입을 열어 미나의 혼을 떨구어내자 한주는 한 손에 미나의 혼을 구겨서 쥐고, 윤조를 윤조의 방으로 데려다 놓은 후 다시 분식집 처마 밑에 숨을 죽이고 앉았다. 곧 예상한대로 사자가 와 수연의 혼을 집어갔다. 사자와 수연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다가 영영 사라지자 쥐고 있던 미나의 영을 조 여사가 흔들어대고 있는 수연의 곁으로 다가가 열린 입에 흘려 넣었다.
“멍청한 사자... 공무원들은 딱 시키는 일 밖엔 할 줄을 모른다니까. 혼이 빠져 나가고 난 몸을 잠궈버리는 것 따위는 귀찮을테지. 뭐 어차피 하루에 백 건도 넘게 죽은 인간들 영 주워 모으려면 업무외 일은 알고싶지도 않겠지. 오버타임해도 수당도 없다는데 참 심각한 일이야. 그러니 서비스가 개선이 될리가 있겠어.”
미나의 영이 잘 들어갔는지 확인하느라 한주는 조 여사와 수연의 몸 사이에 끼어들어 심장소리를 듣고 있었다.
“된 것 같군. 깨어나서 헛소리 하기 전에 다시 와야겠어. 그런데... 이 아줌마는 왠지 꽤 구린 냄새가 나는군… 웬만한 귀신들보다 더 무서운 여자인것 같은데... 미나. 건투를 빈다.”
한주는 잠시 조 여사의 얼굴을 잡아먹을듯 찬찬히 들여다 보다 다시 내림굿이 한참인 청계산으로 발길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