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훗. 인간들은 웃기기도 하지. 거짓말의 정의도 잘 모르면서 신은 하지도 않았던 ‘거짓말을 하지말라’를 외쳐대니까. 사실 이건 여담인데, 신은 그따위 말을 한 적이 없어. 그가 한 말은 ‘너 자신을 속이지 말라’였다구. 그러니까 넌 방금 또 죄를 지은 셈. 어디에 있는지 알면서 일단 피하고 보자는 심보. 말한 것이 아니니 거짓말은 안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말야.
어쨌건 그 자살영은 골치아프게 되었어.
원래 자살영들이 제일 귀찮게 하곤 하는데, 뭐랄까... 원래 작업 목록에 없던 것들이 제멋대로 나타난거라... 우리에겐 초과업무거리지. 그런데 이것들은 재판 대기가 길어서 그 사이에 구천에서 오만짓을 하게 마련이야. 이 놈처럼 미친 놈은 잘 없지만. 재판을 받기 전이라 잡기를 부리고 다니는데 나쁜 짓을 할 수록 능력치가 커진단 말이야. 애시당초 가져야 하는 두려움은 잊게 되지. 하긴... 몇 겁을 끝도 없이 구천에서만 헤매느니 마음 먹고 지옥행을 타겠다고 정한 모양이지만... 놈은 그렇게 어느 정도 감내하고 나면 마침내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얼마나 있어야할지, 그리고 그 이후에 어떻게 될건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멍청한 놈...
검은 영 옆에 붙어 있는 인간이라... 이런건 내가 알 바 아니지만말야. 잘못 찾아온 것도 인연이니 한마디 하자면 넌 빨리 그 놈에게서 떨어지는게 좋을거야. 너까지 초과업무로 얹어지면 내가 아주 화가 많이 날 것 같거든. 제발 착실하게 원래 정해준대로 살다 가도록 하자. 알겠냐?”
그래서 한주는 어떻게 된단 말이냐고 물으려는데 털끝하나 움직일 수가 없다. 그렇게 그대로 침대에 못박힌듯 손가락도 움직이지 못하고 천장만 바라보는데 동이 터 오기 시작했다.
“웬일이야? 지각하면 오 석수 아니었나? 이렇게 일찍 학교 담벼락에 서서 뭐하는거야?”
추워질수록 해는 게으르다. 어두운 학교길 담벼락에 우두커니 기대 선 긴 그림자는 확실히 석수의 그것이었다. 윤조는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모르고 있는 석수 옆에 붙어서서 말을 건넸다. 그가 과연 ‘미나의 죽음’을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어 윤조는 긴장된듯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입김을 연신 뿜으며 옆에 선 윤조에게 석수는 한동안 눈길을 주지 않았다.
“양아치한테 돈은 줬어? 이젠 미나 안 괴롭히겠대?...”
해야 할 질문을 하다 말고 윤조는 입을 닫아 버렸다. 어쨌건 곧 미나는 죽은 사람으로 분류되어 세상에 알려질테니까... 수연의 몸을 빌어 살게 될 미나를 만나면 과연 어떻게 해야하는 지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한 윤조는 어느새 옆의 석수를 잊고 한참을 함께 담벼락에 기대어 있었다. 오늘 당장은 아니더라도 결국은 수연의 몸을 쓰는 미나를 만나게 된다. 기분이 묘하다. 어째서인지 온통 마음을 쓰던 아이를 대하는데 하필이면 꼴도 보기 싫었던 아이의 얼굴을 부러 들여다보게 생겼다. 것보다 미나는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다 기억하는 상태면서 수연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 도대체 뭐가 뭔지 종잡을 수 없는데다 간밤에 있었던 일로 등교도 하기전부터 온 몸에 진이 빠지는 느낌이다. ‘후…’ 초조함과 불안함에 100미터 달리기라도 한 모양 헐떡대는 심장을 달래보려 나즈막히 한숨을 내뱉다 흘끗 옆의 석수를 쳐다보니 여전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새다.
“죽는 게 힘들까, 사는 게 힘들까?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인 것은 맞을까?”
아마도 석수는 관심이 다른 곳에 있어 보인다.
“.으... 응?”
“… 그냥… 되는게 없어서. 내가 지금 누굴 신경 쓸 입장이 아니란 걸 깨달았거든. 알바도 짤렸고, 엄마도 다쳤는데 집세도 밀렸달까… 하…”
“어쩌면 … 그렇게 한꺼번에…”
대체 뭐라고 위로를 건네야 할지 난감한 순간이다. 이 아이들의 부모는 얼마나 심하게 망했길래 두 아이 모두 이렇게 절망스러운건지… 잔혹한 세상을 겪기엔 아직 어린데 말이다.
“… 아침부터 괜한 소리했다. 미안하다. 답 해 줄 수 없는 소리 늘어놓으면 속이 답답한 법인데 말야. 들어가자. 닥치는대로 구해봐야지. 새 알바…”
모르고 있다.
그리고 내가 안다는 것을 말하기도 애매하다. 미나의 시체는 아직도 그 습습한 반지하방 바닥에 그대로 쓰러져 있다… 정말 미나는 수연의 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수연의 소식을 알기 전에는 사실 그게 진짜 이루어질 수 있는지 조차 믿기가 힘들다.
“미나하고 수연이 둘 다 결석이야? 둘이 친하나? 아니지? 그냥 각각 결석인거지?”
담임은 1교시가 지나고도 비어 있는 두 책상을 확인하더니 의아하단 듯 살짝 갸우뚱거릴뿐 별 말 없이 출석부에 체크만 했다. 나서서 가정방문을 권할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국 조용히 며칠을 기다려 볼 밖에 없다고 윤조는 체념했다.
“야, 하 윤조. 대호가 피아노 지원자가 생각보다 많아서 이번 달 마지막 토요일 오후에 예선 한 번 한단다. 지정곡이고 차이코프스키 중에 하나 고를건데 정하면 따로 알려준대.”
아 맞다…
정신 없는 일이 하도 많아 잊고 있었다. 피아노… 잘 되었다. 속도 시끄러운데 이제 별관가서 연습도 할 겸 시간을 가지는 편이 낫겠다. 3학년 첼로파트 용재가 전달하는 말에 윤조는 그제사 잠시 잊고 있었던 오케스트라 피아노 자리 경합이 떠올랐다. 수능 끝나고 있을 결선까지 이제 한 달 하고 반 정도 남았다. 잠깐… 수능 끝나고 결선을 할 때 쯤이면… 이 한주가 죽은지 백 일 이 거의 다되어간다… 누가 그랬었는데… 자살령은 죽은 지 백 일을 넘으면 끝도 없이 구천을 헤매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