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시면 사무실에서 실비가 내 오는 에스프레소를 들고 창 밖으로 보이는 아직 잠든 애비뉴 몽테뉴(*파리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명품거리. 단독 프로덕션을 운영하던 시절 그녀는 애비뉴 몽테뉴의 발렌티노 매장 2층에 사무실을 갖고 있었다.) 를 내려다 보는 것은 내 습관이다.
어느 날 부터 아침이면 꽃과 마카롱 혹은 초콜렛, 케익 배달이 온다. 남이 대신 쓴 디노의 목소리를 담아서...딱히 민망함에 볼을 달구는 어줍잖은 사랑 글귀나 고백 따위는 없고 늘 한 줄 정도로 ‘오늘 하루도 신선하기를...’, ‘지금은 네팔에 있소. 파리는 더울텐데 이 만년설을 그대에게 보내주지 못 해 안타깝소.’ , ‘ 테이블을 한 번 더 닦기보단 본인 몸을 먼저 챙기기를 바라오 ‘ 등의 간단한 문장이 쓰여 있다. 몇 달 째 아침마다 배달되는 그의 아침 선물과 글귀는 그저 배달만 할 뿐인 실비에게는 ‘Happy pill(우울증 약을 부르는 말)’ 이요, 나에겐 은근한 설레임이 되어갔다.
그런데 문득 이렇게 누군가의 마음을 즐기기만 해서 될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는 분명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고 나도 그가 좋지만 그가 바라는 관계와 내가 머무르고 싶은 관계 사이엔 괴리감이 있기 때문이다.
“ 물론 그 사람이 무턱대고 시작한 감정이라 하더라도 그걸 받는 입장에서 희망이 없다면 멈춰 주는 정도의 배려는 해야하는 것 아니야? 아니면, 정말 그에게 여지가 있는거라면... 더 이상 주저말고 받아주는 것이 낫겠어. 기다리는 사람에게 한 시간은 체감적으론 일 년 일 수도 있다는 것 쯤은 우린 아는 나이잖아. “
오랜지기 조슬린의 말은 옳다.
나...?
나는 아직 내 마음을 알지 못하겠다. 우습고 어리석지만 사실이다. 한 번의 큰 실패가 나를 이토록 소심한 토끼로 만든 것도 있지만 가족 상관 않고 내 감정에만 충실했던 20대의 나는 더 이상 없다. 누군가와 다시 시작하기엔 너무 복잡해져 버린 내 상황이란 한숨이 나올 정도로 원망스럽지만 무시하기엔 무겁다.
마침 티벳에 머무르고 있다는 그에게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진부한 말이지만 밤을 새워 어떻게 하면 세련되게, 어떻게 하면 덜 상처를 주고,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덜 나쁜 여자로써 거절을 할까 고민했지만 적당한 말을 고르지 못해 결국 동이 트는 아침에 새 와인을 한 병 따고서야 간단한 글을 마쳤다. 아무리 포장을 해도 의미는 변하지 않는 법이란 것을 밤을 새고야 알았다.
“이기적이지만 친구로 남아주세요. 그게 좋겠어요.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내겐 분홍빛 솜사탕의 가벼움이 아닌 무거운 떡갈나무의 깊은 그늘입니다. 당신은 좋은 분이니 이해해 주시겠지요. 이 또한 나의 이기적인 망상일수도 있겠으나 그러리라 나는 믿을께요. 나를 다시 보는 것이 역겨워 친구마저 거절하신다 해도 이해합니다. 당신은 행복해야 하는 사람이니 나는 당신을 위해 기도할께요.”
사무실 근처에 있는 우체국을 몇 번을 들락거렸는지 모른다. 여전히 편지는 손에 쥔 채로... 이 가벼운 종이가 내 손을 떠나면 이제 영영 그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가슴을 갈갈이 찢어 놓았다. 그렇다고 그를 잡을만한 용기도 없다는 것이 나란 여자의 한심함이기도 한 것을 깨달으니 헛웃음이 난다.
이상한 병이 있다.
한 번 결심을 했더라도 그것이 아닌 것 같으면 수정을 하는 융통성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한다. 결정은 쉽사리 못 하지만 한 번 내린 결정은 그대로 밀어부치고야 만다.
그 날 나는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누군가 떠민 양 그 편지를 급하게 부쳤다.
생김새가 다르고 크기가 다른 토끼야 여럿 있겠지만, 고기를 먹는 토끼는 없는 법이다. 큰 본질은 벗어나기가 힘들다는 얘기다.
그가 과연 내가 한참을 망설이다 부친 그 편지를 잘 받았는지는 이내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업무에 관련해서는 그의 현지 비서가 꾸준히 연락을 취해 오고 있었지만, 어느 날 부터 아침 선물 배달은 사라졌다. 다행히 나와 오래 일 해 과묵해도 눈치는 빠른 실비도 언급하지 않았고 나는... 예상했던 바인데도 어이없게 상실감에 빠져들었다.
“마음이 편하면서도 불편하고, 홀가분하면서도 무거운... 그런 기분 알아? 답을 할 수 없는 편지를 보내놓고 답장을 기다리는 이상한 심리... 울리지 않을 전화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것. 기다릴만한 여지를 남겨두지 않은 건 나 자신이면서 또 한번 상대방에게 미루는... 그런 이기심이 이해가 가니?”
또 조슈아와 점심을 했다. 그녀는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한참을 나를 바라보다가 본인의 양파 수프에 집중하는가 싶더니 숟가락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답을 몰라 물어보는 건 아닐테고... 너는 자식들 때문에 새로운 관계를 피하는거라 합리화 하겠지.
내가 보기에 너는... 뭐랄까 아직도 본인이 유부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다 극복했다고 하지만 그건 네 자존심이 내는 소리고, 사실은 아직도 전 남편의 굴레에서 못 벗어났다는거야. 그래서 새로 누군가와 시작하기엔 이상한 죄책감이 드는거지...
아니라고 해. 내 눈엔 진실이 보이니까.”
식사를 하다 말고 불쾌해져 그녀에게 싫은 소리를 하고 자리를 떴지만 하루종일 그녀의 아픈 말이 나를 괴롭혔다. 진실은 늘 아픈법이다.
테라피스트가 그랬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을 멈추면 힘이 빠져 쓰러질까 두려우냐고... 그렇지 않다고. 사랑보다 더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감정이 바로 미움이라고 했다.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는데 그의 사랑이 멈춰 버린것을 원망할 수 있겠지만 그도 그만두라 했다. 나와 그의 사랑의 유효기간이 다른 것을 계속 원망할 수는 없다 했다. 분명히 그도 당신을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으니 그의 사랑이 먼저 끝난것은 안타깝지만 그저 사랑은 양방향일때만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라 했다. 그녀의 말은 정말 상처난 내 마음을 다독거리고 치유했지만 그에 대한 원망이 걷히고 분노가 사그라 들면서 내 깊은 감정의 독 안에는 아직도 그에 대한 사랑이 침전물로 남아 있음을 알게 된 것이 또 다른 부작용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편지를 부친 이후 사실 나는 아랄도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하루를 안정되지 못하게 보내고 사무실에선 흔한 업무 전화에 깜짝 깜짝 놀래고, 늦게 집에 돌아와서도 간혹 전화벨이 울리면 누구보다 먼저 앞 서 가 전화를 받게 되는 것이다.
전혀 티내지 않고 있다 생각했는데 좀 전에 컬럼때문에 마리옹이 건 전화를 한달음에 달려가 받고 있는 나를 보더니 맥스가 지적했다.
“ 엄마, 뭔가를 무척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가장 적극적인 기다림은 사실 먼저 연락하는 것이라는 걸 모르나봐?”
일 때문이라 둘러대지도 않고 대꾸 없이 꽂꽂이를 펼쳐두었던 식탁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틴에이저 남자애들이란 ‘아주 예의 없는 어른’이라고 보면 된다. 그들은 이미 우리만큼 다 알고 있지만 아직 사람의 기분따위를 살피는 배려는 갖추지 못 해 어른들에게 비수를 꽂곤 한다.
기계적으로 장미대의 키를 맞추고 있는데 또 전화가 울린다. 또 다급히 뛰어가 받자니 아들놈의 눈치가 보인다.(사실 왜 눈치를 보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영리한 아들놈도 내가 이번엔 달려갈 수 없는 상황인걸 아니까 본인이 전화기 쪽으로 걸어가고 있지만 내 마음과는 다른 놈의 느릿한 발걸음에 욕이 나오려는 참이다.
다섯 번 째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영원히 울렸던 것처럼 느껴지고 있다. 전화가 끊기기라도 하면 내 오늘 너를 단단히 혼을 낼 것이라 벼르고 있는데 다행히 끊기기 전에 놈이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