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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Jun 17. 2024

좀 더 보여주면 그만큼 깊어진다…

(1)

7층 웨스턴 바와 5층 만화방 사이에 있는 6층 비디오방을 지나는데 술 취한 남녀 커플이 줄을 지어 들어가는 게 보인다. 원래 비디오방 가는 커플들을 할매 같은 삐딱한 시선을 장착하고 ‘요즘 젊은것들이란…’ 하며 속으로 혀를 차며 경멸했었지만 오늘은 희한하게 살짝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데를 드나들 정도면 얼마나 친한 걸까… 잠시 들었던 음침한 생각을 술 탓이라 애써 흔들어 치우며 목적지인 만화방 문 앞에 무사히 당도한 후 치밀하게 뒤를 밟는 자가 없는지 다시 한번 뒤를 돌아 점검했다.



 5층은 내 단골 만화방이고 그래서 내가 이 건물을 꿰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24시간 하는 만화방은 백수 시절부터 드나들었다. 나는 언제나 한 곳을 정하면 우물을 파는 단골 파고, 그래서 항상 아줌마들의 총애를 받았는데 이 만화방도 예외는 아니라서 주인아줌마가 신작 나오면 비닐 뜯는 영광을 꼭 내게 안겨 주곤 했다.


“하이!”


단골답게 모든 시간대의 알바생과도 안면이 있다. 


“오! 누나, 이 시간에 웬일. 지금 자리 꽉 찼는데…”


“하나 내놔봐.”


“진짜 없어. 금요일 밤이잖아.”


“이럴래?”


“아… 진짜… 깡패가… 있어봐라.”


이 만화방 야간 알바 충호도 내 후배로써 한 달 전에 알바 구할 때 아줌마한테 내가 낙하산으로 부탁했다. 야간은 꼬장 부리는 인간이 많아서 든든한 인간이 필요하다길래 연대 체육과에 재학 중인 복학생 후배를 꽂아 두었다. 고박사 냉면 근처의 요지 빌딩 황금층인 이 만화방에 아무리 붐벼도 항상 나만을 위한 자리는 있는 이유라고나 할까…


“누구 오나, 아니면 누나 니 혼자가.”


“누구 온다.”


“누구… 진경이 누나?”


“아니… 남자.”


“오올… “


“좀 있다가 오면 쓸데없이 아는 척하지 말고 짜지도록…”


“예썰! 나도 모른 척하고 싶다. 괜히 요 앞에 노란 머리 아줌마 떡볶이 사 오라는 둥 그런 거 시키지 마라. 오늘 연수 안 와서 내 계산대 못 비운다.”


“알았다.”


저번에 보다 만 ‘이나중 탁구부’ 만화책 다음 편 다섯 권을 충호가 갖다 쌓아준다. 내 위치가 대충 이렇다. 만화방 실세, 만화방의 최순실, 만화방의 배후. 


“이양아, 맥심도 한 잔 타봐라.”


“누나! 이양이라 부르지 말랬재!”


투덜대면서도 믹스커피를 찾으러 가는 충호는 참 좋은 놈이다. 사실 얘는 내 고향 고등학교 한 해 후배인데 고 3 때 멀리뛰기를 죽어라 못 하는 나를 보다 못해 일주일간 따로 과외를 해주던 인연으로 내 꼬봉으로 살고 있다. (혹시 그 과외의 결과가 궁금하다면… 슬프게도 별 효과가 없었다고…)


“물은 적당히 부어주세요 충호 씨, 플리즈”


“뭘 다시 말해!”


“?? 뭔 소리야.”


“다시 말하라며, 플리즈. 내가 그것도 모를 줄 아나.”


“…. 충호야… 그건 팔든(pardon)이겠지…”


충호는 멋있었고, 의리도 있고, 잘생겼고 학벌도 연대지만 영어를 잘 못했다. 그랬다고…


이미 만화책을 집어 드니까 갑자기 빠져든다. 내가 학창 시절에 들인 시간에 비해 성적은 그나마 볼만했던 이유가 이거다. 집중력이 내가 생각해도 엄청나다. 한 번 빠지면 세상이 하나도 안 들리고 안 보인다. 한 권을 깔깔대면서 끝내고 생각해 보니까 5분 만에 뒤따라 오기로 했던 그 남자가 아직도 안 왔다. 전화를 해야 하나… 아 참… 나 아직도 그 남자 전화번호 모르지… 우와. 갑자기 짜증 난다. 이 남자가 또 사라진 건가? 이번에 또 그런 거라면 넌 이제 정말 끝이다. 


“뭐꼬, 바람맞았나. 왜 남자 안 오노.”


“쥐포 안 묵을끼다.”


“왜? 쥐포 없다 하면 노량진 가서 사 오라고 난리 떨 때는 언제고…”


“냄새난다.”


“… 니 그 남자 안 온다. 모르나. 내 한 네 마리 구워 올게. 내하고 묵자.”


바람맞은 고향 누나 불쌍해 보였나, 안 쓰던 선심을 쓰고 있다.


“진짜 이 인간이 사람을 뭘로 보고…”


나도 모르게 속에 있던 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러게… 이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를 모르고… 간이 배 밖에 나왔네. 천백 배 피의 복수, 알고 보면 북조선 스피릿 아이가. 우리 누나.”


“일해라. 낙하산이라고 빈둥대지 말고. 내 그래 봤자 이 집 아줌마랑 피 한 방울 안 섞였다. 니 낙하산 줄 그다지 안 튼튼하다.”


“넵!”


고향 후배 보기 창피하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내일은 몇 시간만 오전에 개기면 퇴근이니까 오늘 밤은 이 만화방에서 새야겠다. 다음 권을 반쯤 보았나…


“… 잘 보이겠다는 생각이 요만큼도 없구만? 너무 편하게 쥐포를 뜯고 있는 거 아냐?”


진심으로 만화 속에 빠져들었는데 갑자기 희미하게 낯설지만 들어본 목소리가 들려온다. 남자가 약간 발그스름한 볼을 하고 더운 듯 코트를 벗으면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예요. 5분 만에 나오래니까. 지금이 몇 시예요!”


“말처럼 그렇게 쉬운 줄 알아요, 방장님? 내 사촌 형이지만 진짜 그 자식은 미쳤어. 인어(내 아이디) 나가고 나서 딱 4분 만에 갑자기 자리로 돌아오더니 김 대리 튀었다고… 수색 들어갔다니까. 나도 찾는 척해야 해서 온 신촌 일대 뒤지고…. 너무 화장실 가고 싶다고 거짓말하고 돌아서 다시 여기로 오느라고 …  그래도 내 생각에 저들이 우리가 다시 이 건물 안에 있을 거라곤 생각 안 할거 같애. 휴… 나 이제 앉아도 돼요? 김 대리님?”


“앉게나. 수고했네. 뭐 곧 집에 가야 하게 생겼지만…”


“뭔 소리야. 가긴 어딜 가. 제발 쓸데없는 소리는 피차 맙시다.”


남자는 단호하게 말하더니 코트를 옆에 놓고 바로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왜 앞에 안 앉고 옆에 앉아요??”


“조명이 저쪽에 앉음 피곤할 각이야. 내가 의사치고 눈이 진짜 좋은 편인데 내 눈 나빠지면 책임질 거야?”


참 이상하게 설득력 있다. 그리고 사실은… 그렇게 싫지 않았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더니 내가 보고 있는 만화들을 넘겨 보았다.


“참 그림이 괴기, 엽기스럽구만. 뭐 놀랍지도 않다. 이제. 참… 

특이한 여자야.”


“남의 취향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맙시다. 예술작이요.”


“나 사실… 만화방 처음 와봐. 근데 좋다.”


남자는 실제로 만화방을 여기저기 둘러보느라 바빴다. 대한민국, 산골도 아닌 서울 출신이 만화방을 만 29세에 처음 와본다고? 말이 된다고?


“지금 범생이었다고 자랑하는 거? 

그런 건 꽉 막힌 거라고 보는데…”


사실 살짝 실망스럽기도 했다.


“아니, 아예 관심이 없었거든. 와 보니 좋네. 이런 건 꼭 서둘러 와봐야 하는 건 아닌 거 같아서 미뤘을 뿐이지 폄하하거나 싫어하는 건 아니야. 아예 몰랐을 뿐이야.”


나의 비아냥에도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만화방 내부를 둘러보고 있다.


“그냥 시간을 때우러 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좋아해서 오는 것이라면 꽤 괜찮은 은신처네.”


“은신처? 뭐 숨어야 하는 그런…? 헉!! 혹시 의료사고?”


“… 상상력 하고는… 은신처. 그냥 아무도 아닌 혹은 누구나가 되는 그런 곳. 그러면서도 잠깐 벗어나는 곳. 그런 의미야. 가끔 숨고 싶으니까. 너무 내달리기만 하는 생활에서…”


“티켓 안 받으셨죠.”


충호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어느새 옆에 서 있었다. 


“여기는 요금제가 어떻게 됩니까?”


“야간에는 한 시간 이천 원입니다. 나가실 때 정산하시면 되고요.”


“그럼 한 시간 동안 몇 권이건 읽어도 됩니까?”


“네, 권당 아니고 시간당입니다.”


“오, 좋네요. 아예 하루치는 얼만가요?”


“하루치는 없고요, 여섯 시간은 만원요.”


“그러면 책은 아무꺼나 뽑아서 보면 되나요?”


“네, 다 보시면 제자리에 꽂아주시면 감사하구요, 뭐 귀찮으면 테이블에 두세요. 제가 합니다.”


“니 왜 이리 틱틱대는데…”


“내가 뭐.”


아무리 봐도 우리 장 선생한테 너무 까칠한 충호가 눈에 보여서 한 마디 한다.


“둘이 아는 사이?”


장 선생도 눈썹을 약간 꿈틀거린다.


“고향 후배.”


“흥. 그냥 고향 후배 아니잖아. ‘각별한’ 고향 후배.”


“뭐 어쨌건 고향 후배? 남자 친구 아니고? 사겼던 것도 아니고?”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고향 후배.”


“누나를 특별히 항상 걱정하는 고향 후배.”


“니… 야밤에 알바하니까 짜증 나재. 그래서 지금 만만한 고향 누나한테 시비 걸재?”


“마 즐거운 시간 되이소.”


이유를 알 수 없이 화가 잔뜩 난 고향 후배 알바생이 사라지자 대만 씨가 갑자기 바짝 가까이 얼굴을 들이민다.


“아 뭐예요!”


“아… 놀래면 존댓말을 하는구나? 지금 저 후배가 너를 좋아하는 거 같은데… 모르나?”


“… 그게 중요하나?”


“…?”


남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짧은 순간이지만 이 남자는 어쩌면 진짜 미국에서 살다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행동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그게 중요하냐고… 나를 좋아하던 아니던 내 마음이 변할게 아니라면 아는 척을 하는 건 책임도 지겠다는 의미라 난 알아도 모를 텐데… 그러니까 그게 중요하냐고…”


“… 무서운 여자네.”


만화방에서 뽀뽀하면 풍기문란인가… 잠시 생각했어야 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던 남자가 다행히 몸을 세우더니 알듯 말듯한 미소를 띠면서 혼잣말을 했다.


“자, 그럼 어디 만화라는 걸 한 번 읽어볼까? 나 엄청 다독할 텐데 나 같은 인간이 그다지 드물지 않을 것이므로 내가 볼 때 만화방이 시간제인 건 별로 수지맞는 장사는 아닌 것 같아.”


남자는 정말 만화방을 처음 와 보는 듯 꽤나 신이 나 보인다. 아는 게 저렇게 없으면 앞으로 살 날이 어쩌면 많이 신기하고 신날지도 모르겠다. 좋겠다.


“자! 어디 한 번… 우리 김 대리님의 취향을 한 번 볼까? 추천작!”


“내 취향대로? 아니면 그쪽 취향대로?”


“내 취향을 알기엔 우린 아직 멀었으니까 본인 취향대로. 난 타인의 취향을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거든. 그 사람의 취향을 보면 그 사람을 대충은 다 파악할 수 있지.”


“… 내 취향은 그다지 일관되진 않지만… 순수한 연애 한 번 못 해 보고 공부만 한 장 대만 씨의 수준을 고려하여 가장 정제되고 아름다운 만화를 한 번 추천해 보리다. 가서 강 모림 선생의 ‘여왕님, 여왕님’을 찾아오도록 하시오.”


“제목이 여왕님, 여왕님이야?”


남자는 평범하고 임팩트 없는 제목에 약간 실망한 듯 눈썹을 한쪽만 살짝 움직여 보이더니 엉거주춤 일어섰다. 뭐가 뭔지, 책장 정리는 어떤 분류로 되어 있는지… 이런 것들에 주눅이 들 법도 한데, 역시 공부 잘 한 우등생이라 도서관, 책장 이런 것에 능숙한 듯 여유롭게 둘러보기 시작했다.


“뭔데, 어떻게 아는 사인데.”


“뭔데, 왜 신경 쓰는데.”


충호가 대체 왜인지 모르겠지만 잔뜩 뿔이 나서는 할 것도 없는 책 정리를 하는 척하면서 말을 쏘아붙였다.


“세상이 위험하니까 그렇제. 어떻게 만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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