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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Jun 17. 2024

좀 더 보여주면 그만큼 깊어진다…

(2)

“채팅.”


“미쳤나. 모르는 사람을 막 만나나.”


“… 야. 그라면… 니랑 내랑은 태어날 때부터 알았나?”


“또 또 비약하고 있네. 대충 하고 빨리 집에 가라.”


“니는 빨리 계산대로 가라. 저기 막 흔들거리는 양반, 그냥 나갈라 하네.”


“… 어! 우씨. 아저씨!!”


취하면 더 양심이 불량이 되는 종족들이 가끔 있다. 계산대가 빈 것 같으니까 두리번거리다가 살포시 나가려는 양복족 하나를 검거하러 충호가 출동하자 장 선생이 찰떡 같이 추천작을 찾아 자리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나도 공부에 손 놓고 살았던 인생은 아니지만 만화가 뭔지, 만화방이 어떻게 돌아가는 공간인지 쯤은 알고 살았거든? 그런데 어쩜 그렇게 오빠야는 무식하노?”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전국 몇 등 안에 들고 이런 인간들만 읽은 책은 교과서고 감명 깊은 책은 참고서, 취미생활은 해법… 이런 거 아니었나?”


“내가 그 몇 등인가 보지.”


남자는 어제 아침에 삼겹살을 맛 나게 한 세 근 구워 먹었다는 가십 정도를 지껄이듯 아무렇지 않게 말하더니 만화를 펼쳐 들었다.


“근데… 만화방에서 이리 떠들어도 되오, 처자?”


시종일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그러고 보니 참으로 조심스럽다.


“뭐 소리 지를 필요까진 없지만 여기가 뭐 도서관이오??”


“아… 그렇구나. 꽤나 융통성이 통하는 공간이네? 마음에 든다.”


그런가…?

그러고 보니 만화방에 뭐 형식적으로 ‘정숙’이라는 푯말이 가끔 붙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그런 경고 없이도 자발적으로 조용한 편이다. 뭐랄까… 루저들에게도 숨은 집중력이란 것이 있다는 것, 누구나 포텐셜은 있다는 여실한 산증거라고나 할까…


이후로 각자 만화에 빠져 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 변태스러운 그림으로 칠갑되어 있는 ‘이나중 탁구부’를 계속 읽어댔고 장 선생은 내 추천작을 심각한 표정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만화책 저렇게 진지하게 외울 기세로 읽는 사람 처음이다. 너무 심하게 집중하고 있어서 만화방 같이 오기의 묘미인 ‘서로 보는 페이지 공유하면서 함께 낄낄대기’ 따위는 기대하기 힘들다. 뭐 괜찮다. 꼭 끊임없이 서로 대화를 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앗 깜짝아!”


갑자기 발목 근처에 따뜻한 뭔가가 느껴져 공중 부양할 뻔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뭔가 따스한 것이 살아 있었고, 살아 있는 것은 쥐?! 


“아 진짜 깜짝아. 왜 이리 소리를 질러욧!”


“아 왜 갑자기 남의 발목을 잡아요!”


“힐이 너무 불편해 보이니까. 좀 편하게 벗고 있으라고…”


“아 말로 하지!”


“말로 하려다가… 너무 진지해 보여서…”


“벗을 수 없소… 이 시간쯤이면 그다지 냄새가 안 좋을 것이오.”


“그러지 말고 좀 편하게 있어. 그래야 갑자기 이제 집에 가야겠다는 둥 안 하지…”


“… 그래… 어차피 너무 늦었으니까… 그래도 한 시간 정도만 더 있다가 가야 돼… 나 내일 출근이거든…”


“아… 내일부로 관두는 건 어때?”


“만화 보더니 머리가 만화같이 되었냐? 읽던 거나 계속 보시오… 그나저나 아직도 1권 반도 못 봤어??”


“아니, 세 번째 다시 보는 건데?”


“아니 꼴랑 두 권 밖에 없는데… 다 봤으면 다른 만화책을 보지 왜 또 복습해?”


“꽤 재미있었거든. 그래서 몇 번 더 보려고… 분명히 이 만화가가 내게 알려주고자 한 것 중 놓친 것들이 아직도 남았을 거야.”


“만화를… 무슨… 시험대비하듯이… 이 아저씨 혹시 운전면허 필기도 만점 받고 전광판에 뜨고 그런 창피하기 그지없는 그런 사람 아냐?” (내가 운전면허를 따던 2000년 초까지만 해도 필기 매 차 수석은 전광판에 뜨는 쓸데없이 창피스러운 세리모니가 있었는데 참고로 나도 거기 뜬 적 있음)


“응. 맞아.”


남자는 이젠 놀랍지도 않은 덤덤한 수긍을 더하며 다시 만화에 코를 박았다.


“… 내일 몇 시에 끝나?”


“한… 12시쯤?”


“점심은 또 그 거머리들이랑 먹어야 하는 거야?”


“아니, 토요일이니까 그렇진 않아.”


“요즘 제일 먹고 싶었던 거 있어?”


“음… 금액과 상관없다면… 회. 자연산 전복회. 으흐흐…”


“왜 그렇게 웃어?”


“대빵 비싼 게 먹고 싶다는 게 괜히 혼자 찔린다고나 할까… 사실 서울에선 구하기도 힘들고 구할 수 있는 데는 엄청 고급 일식집인데 월급쟁이가 좀 땡긴다고 막 가기엔 심적으로다가 너무 멀지. 아 말 고만시켜. 침 고여! 내 닉네임이 인어인 이유가 있어… 난 바다에서 나는 모든 것을 좋아하거든. 어쨌거나 만화나 보시게.”


“자연산 전복회 좋지. 좋은 음식을 잘 아네. 마음에 든다.”


남자는 더 이상 만화책을 들여다보지 않고 빤히 내 옆얼굴을 보고 있었다.


“뭐야, 내 입맛에 감동받았나?”


“아니. 이제 데려다줄게. 전복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갑자기 지금 집에 가야겠단 생각이 든다. 내일 출근도 해야 하는데… 월급쟁이로 살기 참 어렵네. 하긴 병원도 마찬가지지만… 가자.”


남자가 보던 만화책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먼저 일어나서 손을 내밀었다. 그 정도는 모르는 척 잡아 주어도 좋았을 것이다.


“그렇게 엉덩이 무겁지 않거든? 일어날 수 있어.”


카운터에 내가 꽂은 낙하산 알바가 밴댕이 눈을 하고 째려보고 있어서였을 수도 있다.


“집에 가나? 좀 기다리라, 십분 정도 있으면 대준이 와서 교대한다. 내가 데려다줄게.”


“됐다. 내 발로 잘 갈 수 있다.”


“안 된다. 지금 이 시간이 제일 또라이들 많은 시간인데… 신촌 한 복판에 살면서 …”


“그래서 이 오빠가 데려다준다.”


충호가 가격을 말하기도 전에 정확한 계산을 이미 끝낸 장 선생이 금액만큼의 돈을 계산대 위에 가지런히 놓고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오늘 만난 사이 아이가? 니 내한테 한 번도 말 안 했다이가. 그라면 뉴 페이스란 소린데, 이 시간에 집을 가르쳐 준다고?? 누나 니 기다리라.”


가만 보면 이 자식은 옛날부터 왜 이리 내 걱정이 심한가 모를 일이다. 


“내 집에 들어가면 전화할게. 됐지. 작작 좀 해라 자슥아. 그리고 오늘 첨 본거 아니다. 두 번째다.”


“한 번이나, 두 번이나! 열 번을 만나도 아리까리 한 게 인간인데! 

동문 아이가. 선배는 후배가 지킨다 아이가. 집에 가면 바로 전화해라!”


“와… 저게 바로 경상도 싸나이의 순정이구마.”


“아무 소리도 하지 맙시다. 한 소리 더 하면 내 다시 만화방으로 컴백한다.”


“그렇잖아. 멋있다. 좀 많이 돌아가는 경향이 있지만 뭐 경상도 가시나는 알아듣겠지 뭐.”


“….”


“알았어, 안 할게… 그나저나 이렇게 번화가에 사는 이유는?”


“오히려 덜 위험해. 내가 전에는 좀 한적한 저쪽 편에 살았거든. 거기 밑에 고시원이 있었는데, 밤늦게 과외 마치고 오다가 변태한테 걸릴 뻔한 적이 있어서 그 이후로는 무조건 북적대는데 살아…”


“이제부턴 늦으면 전화해. 갈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날아가서 데려다줄게.  음.. 일산이나 분당까지도 콜. 난 당분간 백수니까. 알았지? 만화방 부르지 말고…”


“오… 지금 만화방 꼬맹이 견제하는 거?”


“뭐 조금 신경이 쓰이지만… 에 또… 그러니까 생긴 것도 나쁘지 않고 체격도 있고… 그렇지만 꽤 오랜 세월 같이 했나 보던데 댁이 전혀 신경을 안 쓰는 걸 보면 가장 견제하지 않아도 되는 대상이 아닐까 싶기도 한…”


“그런데… 왜 견제를 하는데요?”


피식 웃다가 보니…그 근본이 궁금했다. 멈춰 서서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고 물었다. 나는 흐리멍덩한 것, 대충 슬그머니 편승하는 것 별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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