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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Jun 21. 2024

좀 더 보여주면 그만큼 깊어진다…

(4)

한국 대기업을 한 3일만 다녀본 처자라면 이해할걸.

나는 분명히 을이고, 그러니까 이 기업 사람이 아니고, 게다가 사실 나는 이 기업의 브레인을 책임지는 기업 전산 프로젝트의 핵심 파트인데도 불구하고 희한하게 커피, 쥬스 또는 냅킨 준비등의 나의 전문분야와 동 떨어진 어떤 세계에 처박힐 때가 있단 것을… 단지. 나는… 여자라서.

그 *도 아닌 *이 없어서.

그렇다는 거다.


그래서 내가 이 기름회사 정식사원이자 나보다 더 많은 보너스를 받는 정식 출퇴근자 경리의 땜빵을 해야 하는 작금의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말이 되냐? 오늘 회의의 핵심인 상무의 프레젠테이션, 바로 그 프레젠테이션을 완성한 게 난데 그 대단하고 위대한 내가 그들이 마실 음료수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이런 썩을… 이놈의 지지배는 술을 얼마나 처먹었길래 할 일을 외주 직원인 나한테 떠넘기고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야.


“아니, 지금 김 대리가 그런 거 할 짠 밥인가? 김 대리는 PT 최종 화면 나랑 한 번 더 맞춰보지?”


웬일이래.

한 대리가 내 썩어가는 표정을 읽어냈다. 별로 맞춰볼 필요 없는 화면 핑계를 대면서 나를 냄새나는 본인 자리로 초대했다.


“아 그러게! 

김 대리가 왜 거길 올라가. 그러지 말어. 나 갑질한다고 김 대리네 부장한테 한 소리 들어.”


분명히 눈간(직장인이면 다들 깨치게 되는 상사 행간, 아니 눈간 의미)으로 네가 여기 유일한 여자 아니냐며 가서 여자만의 섬세한 서빙 실력을 발휘할 것을 은근히 푸시하던 안 부장이 갑자기 정신 차린 소리를 하고 있다. 살짝 말했지만 이 기름집 수뇌부는 말도 안 되는 퍼센티지의 서울대 출신들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또 주류는 상대 출신이다. 조금 어이없겠지만 그리하여 상대 경영 제대로 된 진골 출신인 한 대리 끗발이 화학과 출신으로 성골인 안 부장을 은근히 이기는 경우가 도출되는 것이다.


“이거 초기 화면, 최종 이걸로 하기로 한 것 맞지?”


자리에 앉지도 않았는데 괜히 소리 높여 ‘우리는 절대 쓸데없는 이바구를 떠는 것이 아니며 분명 아주 중요한 업무 이야기 중이다.’라는 것을 공표하고 있다. 


“그거 최종으로 하기로 컨펌 난 걸 뭐 하러 또 말해요.”


“아 그냥 일단 한 번 이렇게 내질러야 우리가 농땡이 친다 생각 안 하지.”


“저 농땡이 같이 칠 생각 없는데요?”


“어머, 왜 이래? 내가 방금 하녀직에서 구출해 줬잖아. 김 대리 그러고 나면 꾹 참고 있다가 다음번 회식 때 안 부장부터 해서 하나씩 쏴댈 거 아냐. 성차별이 어쩌고 하면서… 그래서 평화주의자인 내가 우리 부서의 남자들의 위신 문제와 또한 우리 고귀하신 김 대리님의 여권을 지금 지키려는 거 아녀.”


“… 뭐 음료수 나르는 거랑 지금 여기서 한 대리님 잡담 상대해 주는 거랑 어느 게 나은지 모르겠네요?”


“진짜 자꾸 이럴래. 쯧.

말해봐 봐. 내 사촌이랑 어디로 샜지? 어제?”


“아니거든요.”


“… 다시 안 볼 거야?”


“아니 왜요!”


이 남자가 왜 자꾸만 남의 연애사에 또 참견인지 모르겠다.


“내가 진짜로 할 말이 있어서 그러지.

그러니까 내 이종사촌 놈이랑 어쩔 건지부터 말해봐.”


“설마… 한 대리님 진짜 저 좋아하는 거에욧?”


“… 아니 뭘 그렇게 훅 들어와… 오늘 마치고… 아… 잠깐만.”


정신없는 한 대리는 타이밍 복도 지지리 없다. 뭔가 듣기 거북한 제안을 할 참인가 싶은데 어디선가 전화가 온다.


“여보세요…. 네?? 경찰서요?? 네??? 아… 알겠습니다. 네네… 아뇨, 그냥 직장 동료… 네?? 어쨌든 알겠습니다.”


경찰서라는 단어를 들은 이후로 귀가 요다처럼 솟는다. 뭔 경찰서?


“아… 진짜…!!

경미 씨 이 여자 이거. 얘 진짜 왜 이러냐? 북아현동 경찰서에서 전화 왔어. 와서 뭘 합의를 보고 데려가라는데?”


“네???”


“뭐예요. 어제 잘 데려다줬다면서?”


“몰라, 나도. 그녀가 거기서 엎어지면 본인 방 이라면서 됐다고 그러고 갔어.”


“아우. 내가 그 기집애 조심해야 한대도.”


경찰서란 말에 너무 놀래서인지 본심이 필터 없이 그냥 튀어나온다.


“내가 지금 가서 데리고 올게. 하여간, 김 대리. 오늘 끝나면 잠깐만 나 좀 보고 가. 나 꼭 할 말 있어.”


“저 바빠요. 마칠 때까지 안 오심 그냥 갈 거예요. 그런 줄 아세요.”


“아 안돼! 오늘 꼭 말해야 돼.

아우 진짜. 이 여자는 왜 보호자를 나로 대고 난리야.”


한 대리는 썩 내키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평소 경미 씨와의 친분 탓인지 주섬주섬 재킷을 챙기고 서둘러 나섰다.


“안 부장, 회의실 가지.

경미 씨 안 왔다며? 그럼 김 대리, 내 탄산수는 혹시 준비되어 있나?”


“네. 그럼요. 경미 씨가 어제 다 준비해 두고 가서 제가 챙겨 드렸어요.”


“오케이, 그라치에

(이태리 탄산수 팬이라고 이태리 말로 고맙단다.)”


직장을 다니다 보면 애매한 순간은 참 자주 있다.


예를 들면 지금도 그렇다. 이 토요일은 의무적으로 노동을 해야 하는 토요일이 아닌데도 일단 나왔으니까 퇴근은 정시에 해야 하는지, 

(내가 속한 본사는 미국 본사 룰을 따라 토요일은 근무를 하지 않지만 갑의 규칙대로 토요일에도 갑들 하는 대로 같이 나오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아니면 엑스트라 노동 헌납이니 가는 것만큼은 내 배짱대로 해도 되는지… 그렇지만 직장이라는 데를 한 일 년만 다녀보면 본능처럼 알게 된다. 일토 건 놀토 건 내가 지금 봉사 중이건 간에 상사가 엉덩에 떼는 시간이 퇴근 시간이라는 거다. 오랜만에 직장에서 채팅방을 열어본다. 정기적이지 않은 방 개설인데도 즉각적으로 열 명 정원이 채워진다. 역시 ‘오백 원만’을 갈구하는 이 땅의 불쌍한 직장인들은 토요일도 제기랄 나처럼 근무하거나 혹은 근무 안 해도 딱히 할 거 없어 방바닥 긁거나… 아니나 다를까, 방에 드러누워 천장의 벽지 모자이크로 ‘월리를 찾아라’ 중이었다던 인간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주제에 또 토요일에 사무실행인 나는 또 그렇게나 극진하게 동정한다. 어느 쪽이 딱히 나은 지는 모르겠는데 말이다.


 -영어는 안 들어오네? 영어, 백수라고 했던 거 같은데… 은근 바쁘네.


-원래 토요일은 백수들이 더 바빠. 걔네는 토요일이고 금요일이고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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