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zelle Jun 24. 2024

좀 더 보여주면 그만큼 깊어진다…

(6)

“왜 이렇게 놀래. 오늘 안에 곱게 서울로 돌려놔 드릴 테니 걱정 마. 전복회가 그리 드시고 싶으시다면서요.”


“… 그래서… 지금 전복회 먹으러 비행기를 타자는 겁니까?”


“그러합니다만…”


“오호!! 차원이 다르게 로맨틱하네 그려유! 진짜 멋지다! 아가씨 남자 친구 잘 뒀소 그래. 이게 돈만 있다고 이런 깜짝 놀랠 짓을 막 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 인간이 갖기 힘든 것 중 2등이 돈! 1등이 사람 맴!”


택시 아저씨의 갑작스러운 응원에 남자는 살짝 쑥스러워하더니 그 와중에 조용히 브이를 펴 눈 앞에 내밀어댄다. 순간 잠깐 귀엽다는 생각을 했지만 제정신으로 돌아와도 이게 지금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태어나 제주도, 대학 졸업여행으로 딱 한 번 가 본 나는 제주도행 비행기가 그리도 자주 있는지 몰랐다. 오늘 안에 돌려놔 놓겠다던 남자의 말이 허풍은 아니겠다는 안도가 살짝 든다. 뭐 그렇다고 내가 혼전 순결주의 이런 거라는 거창한 소리는 못하겠지만 나름 보수적이고 마음이 충분히 담가진 다음에 몸이 순서를 하는 것이 맞다 믿는 편이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이 남자와 밤을 같이 한 방에서 지낼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게 내 거창한 인생 두 번째 제주행 비행이었다. 겨우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비행시간이지만 내내 하늘을 볼 생각에 두근거린다. 잠시 옆의 남자를 잊었다.


“어제 거의 못 자고 오늘 출근까지 해서 힘들 텐데 비행기 안에서 얼른 좀 자.”


회 먹는데 무슨 힘이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구만 남자가 자라고 자꾸 권한다.


“싫어. 나 두 번째 비행기 타는 건데… 나는 밖을 좀 내다볼 테요.”


“… 하하하하하”


“… 그게… 그다지도 웃긴 말이었는지…?”


“아니, 웃긴 게 아니라 왠지 너를 좀 더 알겠어서… 그래서 기쁨의 웃음이랄까.”


“제대로 설명하라우!”


“뭐 다 그런 건 아니더라도 그런 여자들을 많이 봤거든. 뭐랄까… 그냥 방금 네가 한 것처럼 나 이게 두 번째 비행기 타 보는 거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을 못하는 여자들. 혹시 촌스러워 보일까, 없어 보일까… 그런 거 신경 쓰는 그런 부류에 전혀 속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리고 그게 마음에 들어서. 그래서 웃었어.”


뭐 그 정도로 장황하게 설명을 하란 건 아니었는데 남자는 괜히 정성스레 설명을 늘어놓는다.


"내 방 방제가 뭐지?”


“오백 원만.”


“오케이. 거기까지.

그런 방 방장인 내가 뭘 부끄러워하겠어.”


“… 좀 천천히 알아가도 좋겠다 생각했었는데… 희한하게 알면 알수록 더 많이 더 빨리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천천히 알아가. 원래 뚝배기가 느리게 오르고 느리고 식는 거야.”


“…. 그래, 아주 아주 천천히 식어갔으면 좋겠다.

… 그건 그렇고, 제주에 가면 오분자기 뚝배기를 제대로 하는 집이 있어. 거기도 갈 시간이 되면 좋으련만…”








    그 제주도의 푸르게 설레던 밤




 역시 남자는 미식가임에 틀림없다. 전국 방방곡곡 맛집을 꿰고 있는 숨은 내 이상형일지도 모른다. 남자 친구가 있는 친구들이 어떤 이벤트를 받았노라 열을 올려 자랑하는 것을 자주 들어도 뭐 하나 솔깃한 것 없었지만 언젠가 누군가가 신촌 맛 지도를 받았다고 했을 때는 아주 부러웠었다. 그리하여 나도 모르던 나의 이상형은 전국 방방곡곡의 맛집을 두루 꿰고 있는 자라고 공표하고 다니게 된 것이다.


천천히 알아가고 천천히 식어가는 연애를 해 보자고 합의 아닌 합의를 본 남녀는 아이러니하게도 내 친구 지현이가 3년이나 사귀고도 아직도 안 가봤다는 제주도를 세 번째 만남에 같이 밟고 섰다.


역시나 택시 매니아 장 선생이 익숙하게 제주 택시도 잘 부린다.

마치 동네 식당 하나를 스스럼없이 데리고 가듯 내겐 낯선 제주의 한 횟집을 불쑥 데리고 들어섰다.


“아이고, 선생님. 오랜만이야. 대체 이게 얼마만 이래. 어머나, 이 아가씨는 누구래? 여자랑 온 건 또 처음이구만? 맨날 소독약 냄새 폴폴 나는 고만고만한 어린 선생들이랑만 오더니… 오늘 전복이 유달리 좋아. 얼른 저기 바다 보이는 지정석으로 앉으시쇼.”


여기도 장 선생을 무척 반기는 아지매가 한 분 계신다. 이젠 놀랍지도 않다. 장 선생 역시 특별히 아줌마들을 상대할 때 더욱 업그레이드해서 내놓는 ‘아이고 착해라’ 미소를 선보이고 있다.


설명할 필요 없이 분명 오늘 해녀가 앞바다에서 따 온 것이 분명한 전복은 싱싱하다 못해 내가 여지껏 몰랐던 전복의 비밀을 하나 알려주기까지 한다. 너무 싱싱한 전복은…. 하나도 안 질기다…


“세상에… 전복이 하나도 안 딱딱해. 뭐지?”


“그건… 너만 알고 있어.

그건 바로 그 만나기 어렵다는… 자연산 싱싱한 전복.”


“아하하하하”


사랑에 빠지면 어쩌고 저쩌고 구구절절 많은 증상들이 있지만 그중 기본 중 기본은 하나도 안 웃긴데 지들 둘이 웃겨 숨넘어가기 직전인 증상이 으뜸이다.


“사장님, 혹시 숨겨두신 그거 있을까요?”


싱싱한 회의 쥴리엣, 소주 양은 대체 언제 모셔올 참인지가 슬슬 궁금하지만 먼저 말 꺼냈다가 술고래로 찍힐까 봐 망설이는 참인데 남자가 은밀하게 아줌마를 부른다.


“아이, 있지. 우리 손님들이야 뭐 다들 회라 하면 소맥, 청하, 백세주 이런 것만 찾으시니까. 장 선생용은 고대로 있습니다아.”


술 찾으러 가신 것치곤 좀 걸린다 싶더니만 아줌마가 잘 데워진 도꾸리를 쟁반에 받쳐 가지고 나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사케. 싱싱한 회에 향이 좋은 사케를 별 준비도 없이 내놓는 남자를 무매력이라고 말할 여자는 몇 안 될 것이다.


“좋은 회에는 좋은 술을. 좋은 사람이랑 마시는 이 좋은 시간은 내 인생에서 책갈피를 끼워둬야 하는 부분인걸.”


“뜨거운 술이 들어가면 시조를 읊는 경향이?”


남자는 대답 없이 들여다보기만 하다가 씩 웃었다.


“결혼하자고 조르지 않을 거라면 나랑 사랑합시다.”


아무리 싱싱하고 말랑해도 전복이 목구멍에 걸리면 체할 수 있는데… 이 남자가 예고 없는 공격을 날린다.


“… 그쪽이나 마음 바꿔서 결혼하자고 하지 말기요. 난 아직 너무 어리니까…”


“뭐 스물다섯이 그다지 어린것 같진 않지만. 결혼 생각이 없다니 희망적인걸.”


누가 너랑 사랑한대요? 혹은 이제 세 번 만났는데 아직 그런 말은 좀 이르지 않냐는 둥 여러 ‘나를 좀 더 소중하게 포장할’ ‘진심 없는 거절’을 해 볼 수도 있었지만 어느새 이미 그 단계는 넘어 희한한 소리를 하고 있다.


남자 친구도 없었던 주제이므로 대상도 없이 급할 것 없는 나이에 결혼을 떠올려 본 적 없으니 그것은 나와 멀고도 상관없는 주제일 수밖에 없었지만 막상 남자의 연애 조건이 ‘결혼 없음’ 이라니 그건 또 좀 거슬린다. 그렇지만 또 급하게 대체 결혼은 왜 그토록 반대하는지를 묻기엔 아닌 것 같다.


“누가 그랬는데,

사랑이 성공하면 호적에 남고 실패하면 노래방 가사에 남는대…”


“그래? 누가 그런 통찰력 깊은 소리를 했대?”


“… 고등학교 선배가.”


“만화방을 같이 다니던 남자 친구겠지?”


“뭐 나에게 만화방이라는 곳의 문을 열어준 문지기라고나 할까?”


“어쨌건… 그 말이 맞지. 살다가 동사무소를 갈 일보다는 노래방을 갈 일이 더 많을걸. 그러니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 더 기억되는 법이야.”


“이루어진 사랑은 기억할 필요도 없잖아. 늘 옆에 있으니까…”


내 말이 마음에 안 드는지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루어졌다면 그렇겠지. 이루어진 줄 알았는데 혼자 남게 되는 경우는 어때? 그리고 상대가 남기고 간 또 다른 인생이 옆에 대신 남는다면? 혼자 남게 한 그 남자를 잊을 수 조차 없게 된다면? 그래도 어쨌건 결혼은 했으니 이루어진 사랑인가?”


살다가 변심하여 사랑이 바랜 경우를 말하는 것일까… 어쨌건 남자는 무슨 이유인지 결혼에 대해 추호의 타협도 없다는 듯 부정적이었다. 미국이 아니라 어디 유럽 비혼 주의 지역에서 살다 왔나…

이전 24화 좀 더 보여주면 그만큼 깊어진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