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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Jun 28. 2024

그 제주도의 푸르게 설레던 밤

(3)

옆에 남자가 있다는 것도 잠시 잊고 추위에 정신이 반쯤 나간채 흔들리며 걷는데 역시 코 끝이 빨개진 남자가 바로 앞을 막아서고는 장갑 낀 손으로 내 언 볼을 감싸 쥐었다.


“이기..보.... 이거.. 아우.. 입이 얼러서 말도 안 나오네.”


“난 내일 집안 행사가 있으니까 아침 비행기만 탄다면 오케이인데 말야. 방을 두 개 잡는다면 일말의 염려도 깨끗이 치울 수 있겠죠? 김 대리님?”


그건 아니라고 말하기엔 진짜 춥다. 그리고 어차피 방을 따로 잡는다면 안 될 이유는 또 뭐겠나. 지금 공항을 서두르지 않고 가도 서울행 비행기는 수시로 있다는 것을 확인해서 알고 있지만 다 필요 없고, 정말 춥다. 


“그래스… 장 슨상님. 택시 언제 와유?”


“아… 

내가 아무리 택시 매니아지만, 일정이 확정되지 않았을 경우에 콜택시를 마구 불러대진 않소만…  그래도 제주도 겨우 두 번째인데 밤바다를 좀 거닐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게으름을 이기는 열정이 부족하구만.”


의사 겸 철학자인가.

이 남자는 툭 뱉는 소리에 진리를 잘도 담고 있다. 게으름을 이기는 단 한 가지 방법이 열정이라는 데에 갑자기 무릎을 탁 치고 싶은 심정이다.


콜택시를 부르고 방금 먹고 나온 횟집에서 약 300미터 떨어진 도로변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제기랄… 고작 300미터 다시 걸어서 횟집에 들어가 있을 열정도 없다. 


“지금 굉장히 내적 갈등 중인 것을 잠시 밝혀야겠다.”


이 남자와는 내내 떠들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느새 하나도 불편하지 않다. 택시를 기다리며 대체 어느 쪽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택시를 쫓아 눈이 바쁜 와중에 남자가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


“지금 안 움직이고 둘이서 택시만 기다리고 있자니까 무지하게 춥잖아? 원래 이런 경우엔 남자답게 내 윗도리 홱 벗어제껴서 처자 어깨 위에 어부바시켜 줘야 정답이겠지만서도, 솔직히 고백건대 나도 지금 오질라게 춥거든. 그러면 이런 경우엔 같이 뛰자고 제안해야 하나… 그저 택시가 좀 빨리 도착하기만을 빌어야 하나… 이런 내적 갈등 중이란 거지.”


정말 솔직하지 않은가. 이 남자가 귀엽다는 생각이 가끔 끼어드는 이유는 아마 이런 것이겠지.


“됐어. 댁도 추운데 무슨… 

근데 그런 이야기 있잖아. 서울대생이랑 추운 날 데이트하던 여자가 너무 춥다고 하니까 서울대생이 ‘나도 추워’라고 했다는거. 육사생이랑 데이트하니까 ‘추우면 뛰자’라고 했단거… 그래서 결국 정답대로 코트를 벗어 건넨 젠틀맨은 연대생이더라는 연대생이 지어낸 유치한 전설”


“역시! 

내가 찜한 방장님은 쿨했다니까. 사람 보는 눈이 있지 내가.”


벗어주지 못해 미안한 남자가 괜히 허풍스럽게 치켜세우는 사이에 신속 정확한 제주 콜택시가 도착하였다.


“밤바람이 제법 쌀쌀하죠? 어디로 모실까요?”


히터 빵빵한 택시 안에서 반팔로 운전하며 나타난 택시 아저씨는 기분도 봄바람이었다.


“s호텔로 가 주실까요?”


남자랑 딴 방 쓰더라도 숙박기관에 들어가는 것은 낯설다. 처음 보는 택시 기사 아저씨한테 남사스러워 환장할 지경이다. 굳이 저 아저씨한테 우리는 지금 호텔에 가고 있지만 그것은 너무도 추워 고생하기 싫어서 가는 것일 뿐 각방 쓸 예정이라고 말하는 것은 유치하다… 하지만 말하고 싶다… 평생 저 아저씨를 다시는 안 보더라도 이러한 사실을 밝히고 싶다… 하지만 말하면 너무 우스꽝스럽다… 이번엔 내가 내적 갈등을 하느라 입을 닫고 있다.


“왜 이래, 김 대리. 누가 보면 내가 납치하는 줄 알겠어. 

말 좀 해보시오.”


“잠시 뭐 좀 생각하느라…”


“어허… 이 아가씨 생각보다 간이 콩알만 하네… 내 약조하지 않았소. 두 방 잡겠다고!”


“아이고! 이 추운 날에 뭐하러 방을 두 개나 잡아요?? 것도 그렇게 비싼 호텔을!! 둘이 아주 그냥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것이 내가 보기에 그 방 하나는 버리는 거여.”


“오! 우리 아직 그런 사이 아니에요!”


내가 왜 이럴까 싶게 촌스럽지만, 또 당해보니까 드라마에서 딱히 이 대사 말곤 쓸게 없겠다 싶은 격한 공감이 올라온다.


“에이… 것 봐요. 아가씨도 ‘우리 아직!’이라고 했잖아.

그 말은 뭐여. 오늘은 아니더라도 가까운 후일엔 일어날 수도 있다. 이런 거잖아. 그날이 되면 오늘 버린 방값 무지 아까울걸? 그러니까 사람은 미리 현명할 수 있단 거지.”


희한하게 궤변이지만 설득력 있다.

그나저나 대한민국 택시기사 자격증에는 비밀스러운 권한이 하나 더 숨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오지랖’


“감사합니다!!

아주 그냥 누구보다 따순 밤 보내시고 아가씨는 그 내가 아까 슬쩍 조언한 미래에 속 뒤집어질 아까운 방값에 대한 고찰을 좀 더 해보시옹”


내 집이면 참 좋겠다 싶게 화려하고 우아한 조명이 잔뜩 켜진 최고급 호텔 앞에 택시가 미끄러지듯 멈췄다. 


사람이 참 그렇지?

어차피 뱃속 채우면 그게 라면이었던 비싼 5성급 호텔의 가리비 파스타였던 상관없는데 말이다. 그 채우는 기분이 매우 중요할 수도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동물이란 사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내실이 중요하다지만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도 80프로쯤은 된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뭐든 고급스러운 것이 당기는 것은 우리가 취향을 가진 유일한 동물,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어차피 속물스러운 나를 변호하는 입장에서 말해보자면, 까놓고 얘기해 추운 날 자기 겉옷 벗어 다정하게 감싸고 여관으로 안내하는 남자보다는 춥다고 윗도리는 양보할 수 없지만 따뜻하다 못해 더운 호텔로 데려가는 남자가 멋있어 보인다 하여 그것이 범죄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큰 메리트를 깡그리 무시할 만큼 강력한 사랑이 세상에 흔한 듯하여도 그렇지 않다. 보통은 본인 복이 이 정도다 하고 견딜 뿐… 알고 보면 여우와 신포도는 천지에 깔렸으니까…


“… 죄송합니다, 주말이라서요. 정말 죄송하지만 지금 빈 방이 하나도 없습니다.”


촌스럽다.

주말 중에서도 토요일에 제주도에서 제일 유명한 호텔 방이 두 개나 남았을 거라고 대책 없이 생각했다는 것이… 


“이걸로도 되는 방이 없나요?”


아직 공항을 갈 수 있으니까 어차피 희한하게 찝찝하던 차에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찰나인데 남자가 나는 본 적 없는 신기한 카드 하나를 프런트 직원에게 내밀었다. 위조인지 좀 자세히 보는 양도 하지 않고 직원이 카드 색을 보자마자 갑자기 열정을 담아 프런트 단말기 체크를 하는가 싶더니 제까닥 꼭대기 층 방 두 개를 내놓았다. 조선시대에 은밀하게 도깨비방망이가 횡행했다면 21세기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는 저 플라스틱 카드가 마술력 만인 셈이다.


“자, 약속 지켰습니다.”


마주 보는 방 두 개를 빌린 남자가 내 방이라고 지목한 방에 들어와서 일단 앉았다. 언제 추웠냐는 듯 봄바람 같은 미소를 가득 머금고…


“그러게요? 용 빼는 재주가 있지 뭡니까? 이 핫시즌 제주도 S 호텔 꼭대기 층에 있는 방을 두 개나 빼내다니요, 솔직히 말해 매력적이네요.”


“오… 방장님의 그런 시원시원한 솔직함을 사… 사… 사랑합니다.”


“유치하지만 나쁘지 않군요. 좀 추웠더니만 아까 먹은 매운탕이 한 일 년 전쯤으로 느껴지는데 통 큰 장 슨생님, 뭐 좀 골고루 시켜보죠?”


“그럽시다.

아까 회를 실컷 먹었으니까, 한우 채끝 구이에 안동 소주 어떻습니까?”


“… 이 아저씨가 굉장히 현실감각이 떨어지네? 내가 호텔을 들락거려 본 건 아니지만, 호텔에서 한우 채끝을 어떻게 굽는다는 거예요??”


“알고 보면 세상에 안 되는 게 그다지 많은 건 아니라고.”


장 선생님은 바로 코 앞에 입을 벌리고 있는 내선 전화 대신 핸드폰을 꺼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하는가 싶더니 그야말로 주문을 하고 앉았다.


“잘 지내셨죠? 만입니다. 저희 지금 탑에 있는데요, 채끝이랑 화로랑, 안동 소주 있으면 그것도 좀 내주십사 하고 전화드렸습니다…. 네… 연락 없이 갑자기 왔어요. 아닙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고맙습니다.”


이 20세기 도깨비는 여러 가지 마술을 부릴 줄 아는 것 같다.


“만입니다…. 는 무어래요? 아하하하. 굉장히 희한한 지칭이라는?”


“아, 집안사람들이 돌림자를 쓰니까 끝자만 말하면 누군지 알거든.”


뭬?? 집안사람?? 이 호텔이랑 집안사람??


“알수록 신기한 사람이네… 굳이 공부를 잘할 필요까지도 없었을 사람이 공부도 잘했네… 인생에 별로 궁금한 게 없었던 것이 이해가 간다라고나 할까.”


사실은 속으로 할 소리였는데 또 촌스럽게 입으로 흘러나와 버렸다.


“그게 사실은 엄청 아이러니한 건데… 사실은 그렇거든. 신경 쓸 게 없을수록 공부를 잘할 수밖에 없다는 거… 딱 그거 하나만 신경 쓰면 되니까. 그런데… 그것도 옛날이야기야. 지금은 좀 많이 재미가 없어졌거든. 그래서 이러고 있는 거기도 하고… 누가 나더러 지금 뭘 하는 중이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이 없어. 굳이 말하자면… 무얼 하면 좋을까 찾고 있는 중이라고나 할까…”


그런 거 있잖아. 

내가 굳이 인생에서 겪진 않았어도 들어보면 참 수긍이 가기도 하고 이해가 가기도 하고… 내가 또 그런 공감 능력은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이 남자랑 얘기를 할수록 세상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이 수두룩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남자의 인생이란 우리가 흔히 쉽게 정의해 ‘재수 없는’ 그런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듣다 보면 한 번 겪을 일도 없는 그런 세상에도 나름의 애로사항이 존재한다는 것에 희한하게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대체 공부를 얼마나 잘했길래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대학교 1학년 때 조인트 엠티를 갔다우? 아마 장소가 대성리였던 것 같은데… 뭐 어쨌건 맨 장흥, 대성리, 양평, 양수리, 가평… 이 정도 중의 하나였으니까… 상대 학교 과가 서울대 항공우주였는데 일단 과가부터가 정상적이지 않더라구요. ‘떴다 떴다 비행기…’ … 진실게임 시작했는데 보통은 진실게임이면 유치한 거 묻잖아… ‘마지막 키스는?’, ‘첫 키스는?’… 이런 거. 뭐 어차피 남의 키스 역사 기억할 것도 아니면서 빨리 불라고 난리 떨고, 당사자는 까짓 거 아무렇게나 말한다고 누가 조사할 거라고 그리도 진지한지… 그 유치한 게임 중에 그 비행기과 한 명이 그러더라고요? ‘제일 잘 받아본 등수는?’ … 좌중이 진짜 싸했다는 거 아냐… 서울대랑 이대랑… 쨉도 안 되는데 그런 허세스러운 질문을 한참 낮은 이대생 두고 할 말이냐고 그게… 그런데 이 단체로 눈치 팔아먹은 자들인 경쟁스럽게 손 들고 대답하기 시작하는 거야… 이미 룰은 깨졌어. 하나 같이 자랑 못해서 눈이 뻘건 상태니까… 

뭐 그래도 이해했다우? 얼마나 자랑스러워? 자랑스러울만하기도 하고… 나 자는 시간에 그 자들은 더 공부했으니까 나 보다 좋은 데 갔겠지… 그러니 그들의 자랑대회는 좀 봐주기로 한 거지… 그랬는데 한 명이 대답했어. ‘17등!’ 그러자 다음 수재께서 얼른, ‘9등!’ 다음은 ‘7등!’ 그제사 감이 오기 시작한 거야… 아 이 자들이 논하는 등수는 일개 고등학교 등수가 아니란 거… 그때쯤에 종결자가 외쳤어. ‘종로 1등 받고 또 동시 1등!’ 그러니까… 종로학원 1등이자 전국 1등 등장… 그 밤의 충격을 잊을 수 없는데… 새삼 떠오르게 하시네요, 장 선생님?”


"종로 1등? 박 수천?”


“… 네…네… 하도 충격적인 일이라 그 이름이 뇌리에서 한 50년은 저장될 예정인데 용케도 그 존함도 아시네요?”


“같은 고등학교. 후배. 특이한 놈이라서 기억하거든. 걔 삼수했잖아. 왜 했는지 알아? 매번 본인은 항공우주 가겠다고 하고 집에서는 의대가라고 해서 등록 안 하고 다시 재수, 삼수… 그런 거야. 결국 이겼지. 지금은 뭐 하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 종로학원 수재 박 수천 오빠가 생각난다. 그때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런 사정까지는 몰랐어도… 그가 진로 소주 2병에 벌겋게 숯불 같이 된 얼굴을 가누면서 자랑스럽게 ‘그래도 나는 서울대 간판 때문에 삼수나 한 건 아니다? 나는 진짜로 이 과에 오고 싶었어. 그래서 삼수한 거야.’라고 말할 때, 멋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당신은 정말 해보고 싶은 공부가 있었구나…라고…


‘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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