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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Jun 30. 2024

그 제주도의 푸르게 설레던 밤

(4)

관찰자 입장에서 수재들의 고뇌를 잠시 들여다보는 사이에 깜빡 잊었던 별 게 다 되는 룸서비스가 도착했다. 


“귀찮은 것들을 준비하라고 해서 죄송하게 되었어요.”


장 선생님은 언제나 예의 바르다. 시간 되면 한 번쯤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절도 있는 매너를 장착한 매니저와 또 한 명의 진지한 청년이 일사불란하게 테이블 위, 자그마한 일본식 화로에 숯을 깔고 불을 붙이는가 싶더니 열 가지도 넘는 쌈 채소를 미니 화물선 모양의 나무 접시에 예쁘게도 놓아 한쪽에 두고, 그냥 집어 먹어도 혀에서 그저 녹을 것 같은 화려한 마블링의 소고기들을 부위별로 잘 섞어서 또 한 접시, 여전히 보글보글 소리를 내면서 끓고 있는 전복 우렁 된장은 자그마한 뚝배기 두 개에 따로 담아 각자의 앞에 놓아주고, 맛을 보지 않아도 이미 향긋하고 삼삼할 것이 틀림없는 청각 무침이며 생미역 무침, 해파리냉채, 간장게장, 청각 전, 아직도 숨을 쉬고 있는 생소라, 해삼, 멍게, 전복, 개불 회 등이 끝도 없이 깔린다. 이쯤 되면 오늘 먹고 한 번 죽어보라는 건가… 


“간단하게… 고기나 몇 점… 굽자는 거… 아니…”


“간단하잖아. 이 정도면… 먹을 게 많아야 천천히 시간도 보내고 나를 다른 방으로 쫓아내지 않을 것 같아서…”


장 선생이 멋쩍은 듯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을 하는 사이에도 이번에는 샐러드와 다섯 가지 드레싱, 우럭 머리 튀김, 고기 먹을 건데 뜬금없는 날치알 마끼, 항상 ‘뜨겁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나와서 이름을 그걸로 해도 좋겠다 싶은 철판 위의 장어구이까지 마저 깔리고 당황스러운 축하주 샴페인까지 요란하게 뜯어 준 후에야 그들은 찰떡 호흡을 여전히 자랑하면서 절도 있고 신속하게 카트며 도움을 주었던 각종 장비들을 다시 고급스럽게 챙기고 있었다. 이제는 슬슬 장 선생의 행동을 파악할 수 있는 단계다. 예상한 대로 그들의 수고에 ‘티 나는 고마움’을 각자의 손에 손수 전달하자 시종일관 그린듯한 미소를 띠고 있었던 그들의 얼굴에 영혼이 깃들었다. 


“어떻게… 이 한 상은 마음에 드시는지요? 김 대리님?”


생긴 걸론 진품명품 쇼에서 가끔 본 것 같은 이조백자에 얌전하게 담긴 안동소주를 아주 쥐오줌만큼 따라주면서 남자가 또 그렇게 웃었다. 심장 떨리게…


“매우 흡족하오.”


이렇게 많이 먹다가 배가 터질 수도 있다는 경각심이 좀 들긴 하지만 언제나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 내일부터 굶으면… 이미 젓가락은 대체 어디부터 방문해야 좋을지 몰라 춤추고 있는 중인데 이 예측 불허인 남자가 또 훅 들어온다.


“자, 이제 곧 또 새해잖소. 내년 포부 한 번 들어봅시다.”


“아 뭐 그런 걸 물어. 내년에도 유니텔에 방 열심히 열고, 매일 밤 부장 뒷담화나 하는 그런 루저의 삶을 평화롭게 영위함과 동시에… 이건 내 계획이랑 별 상관이 없지만서도, 내년엔 제발 좀 널널한 프로젝트, 미남 밭 프로젝트에 떨어졌으면 합니다만…”


“에이… 생각보다 시시하네?

이제 남자 친구가 생겼는데… 그러한 지각변동이 하나 반영되지 않은 그런 심심한 포트폴리오야.”


가만 보면 분명히 서울 남자다. 낯 간지러운 거 엄청 밝히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아니 뭐 그런 세세한 계획까지 다 세워야 돼?? 내년에 장 선생이 계속 널널할지 혹은 다시 일선으로 돌아가 훌륭한 의원님으로 활동하여 더없이 바빠질지 알 게 뭐야… 그러니 난 불확실한 계획은 세우지 않아.”


삐진 와중에도 남자는 순간 어떤 것도 다 용서할 수 있을 듯 적절히 구이 된 채끝 한 점을 깔끔하게 내 양파절임 위에 올려준다. 딱 적당한 크기로 찢어진 씻은 묵은지도 함께…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변태라고 비웃어도 좋다만 이 순간 이 적절한 굽기의 채끝 한 점을 굵은소금 딱 세 알에 묵은지 시트를 올려 양파절임과 함께 권유하는 이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한 사람이다.


“… 오라버니만… 마뜩하시다면, 소녀 어떻게든 이 박복한 노비 샐러리맨 생활에 짬을 내어 자주 소녀 면상을 비추는 방향으로 해보겠나이다…”


“역시 좋은 채끝은 타고나지 않았던 애교와 상냥함도 꽃피워 내는 마법을 가지고 있구랴. 천만다행한 소식으로다가, 이 오라버니께서 내년에도 널널할 예정이라 하오.”


“흠… 그 오라버니 돈 걱정은 없어 봬서 크게 근심은 안 되오나 하는 일도 없이 늦잠이나 처자고 밥이나 먹고 똥이나 싸는 루저일까 봐 심히 저어 되는 바 없진 않소만…”


약간 까칠하게 돋을 때마다 남자는 끊임없이 입에서 녹는 한우 아이스크림을 조공했다. 


“… 더 필요하면 말해. 오빠야가 또 시켜줄게.”


나는 또한 남에게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이상한 버릇이 있는데, 19살부터 서울에 혼자 떨어져 살면서 생긴 버릇이다. 혼자 밥 먹을 일이 많아지면서 가끔 너무 먹기 싫은 것을 먹을 때라던지, 혼자 먹는 게 외로울 때면 상황을 상상하면서 먹곤 했다. 진짜 먹기 싫은데 먹을게 라면밖에 없을 때면, 어디 산사태 난 곳 같은데 한 5일 갇혀서 아무것도 못 먹었다가 이제 먹는 한 끼라는 상상을 한다던지, 맛있는 소고기 국밥을 실컷 끓였는데 혼자 먹자니 흥이 안 날 때면 사극 매니아답게 한양에서 급파된 암행어사로 빙의해 마을 주막에서 게걸스럽게 해치우는 소고기 국밥 한 그릇을 상상하곤 했다. 한 번 해 보면 알걸… 희한하게 훨씬 맛있어진다는 것을… 그 버릇이 발동되자 지금 거한 저녁을 두 번이나 먹이는 이 남자는 서울역에 며칠째 밥 못 먹고 버려진 나를 거둬 먹여주는 너무 착한 아저씨로 보인다. 


“더 들어갈 공간이 전혀 없어요…

아 뭔 놈의 의사가 이렇게 과식을 시켜!!”


사케와 알싸한 안동소주 한 잔의 기운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더 이상 우리는 알코올이 필요할 만큼 어색하지 않았다. 


“밥을 먹어보니까 더 마음에 드네?”


“왜? 잘 먹는 여자를 또 좋아할 테지? 물론 잘 먹으면서 살이 절대 안 찌는 여자.”


“아니? 잘 먹는 여자를 좋아한다 한 적 없는데?”


“음… 그럼 뭐지? 식성이 맞나?”


밥 같이 먹고 정 떨어졌다는 것보다는 기분이 좋다.


“아니, 편식해서 좋아.”


“…. 뭐래?”


“정확히 말하면… 편식하고 또 잘 먹어서 좋아.”


“저기요… 이과생인 거 충분히 이해하는데요, 말 좀 그래도 사람이 알아듣게 하시지요… 편식하고 잘 먹는 게 어떻게 같은 문장에 있을 수가 있어??”


“생략 구문을 잘 못 찾네…

그러니까… 가만 보니 꽤 편식을 하더라고? 먹는 건 잘 먹고, 안 먹는 건 아예 처음부터 눈길도 안 주더만. 사람이 먹는 스타일을 보면 대충 성격도 보이거든. 한 번 정하면 끝까지 가는 스타일이라 마음에 들고, 굳이 가진 것에 만족하는데도 다른 건 어떤가 넘어 볼 스타일 아니라서 좋고, 그리고 고기를 혼자 3인분이나 야무지게 드시는 걸 보니 좋아하는 건 올인하는 스타일이겠고… 여러모로 마음에 든다고… 내가 마음에 드는데 말 안 하고 꽁하고 있음 반칙이잖아. 그래서 알려주는 거야.”


“… 정보공유에 감사? 해야 하는 거지?”


대체 뭐 이런 얘기를 자꾸만 대놓고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같이 밥 먹는 것에 많이 예민하거든. 그래서 대부분 혼자 먹을 때가 많았어. 혼자 먹으면 평화롭거든, 좀 심심하긴 해도… 

어려서부터 거의 혼자 밥을 먹었고… 그게 익숙해. 그래서 내가 누군가를 사귀는 것의 첫 번째 조건은 ‘같이 밥을 먹기에 유쾌한 사람인가’거든. 예쁘면 좋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나한테는 밥이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와 밥을 먹고 싶다는 거니까… 


그런데 너는 밥을 같이 먹어볼수록 계속 같이 먹고 싶어. 부담스럽지 않게 배려하고, 티 나지 않게 알아서 많이 먹고, 그러면서도 상대가 잘 먹고 있는지 은근히 신경 써. 언제 말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얼마든지 먹을 수 있고 뭐든 소화할 수 있도록 편안하게 해 주니까. 그러니까, 이제는 단 둘이 먹는 밥은 나하고만 하자.”


내가 말했었나?

이 남자는 결코 미남은 아니라고… 그런데, 갑자기 의아해졌다… 미남의 기준이 뭐였더라… 됐고, 미남이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남자라면 이 남자는 미남이라 불러야겠다.


“… 그런데 이런 호텔방은 보통 꽤 비싸거든?”


“… 그래서…?”


합방하는 것도 아니고 각자 방 쓰니까 각자 방값은 따로 내자는 소리 할 건 아니겠지? 지금까지 대인 장 선생의 배포로 보아 그럴 것 같진 않지만 갑자기 방값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좀 찝찝했다.


“푸하하하하. 눈꼬리 각도 또 15도 올라가는 거 봐… 기름집 예산팀 프로젝트하더니 우리 김 대리님 금전관계에 굉장히 예민해지게 되었다 했었지?”


맞다.

99퍼센트 남자뿐인… 그것도 그중 80퍼센트 묵은 아저씨들 뿐인 이 프로젝트에서 어찌나 쌓이는 게 많은지 밤마다 열어댄 내 채팅방에서 나는 주로 그들의 뒷담화를 하거나 내 인생의 퍽퍽함을 토로하곤 했었지… 그걸 남자가 분명 다 기억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걱정 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보통 남자가 비싼 호텔값을 낼 때는 뭔가를 바라고 그런다는 것쯤은 알겠지? 대부분의 그들이 바라는 그것은 난 생각하고 있지 않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래도 재밌는 방장님을 여기까지 모시고 와서 따로 어차피 잠도 못 잘 밤을 뒤척이는 것보다는 같이 시간이라도 보내준다면 내가 좀 덜 억울할 것 같은데 말야…  원하지 않는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자, 여기.”


정말 피곤해서 미칠 것 같지만 남자 말대로 그렇다고 지금 침대에 눕는다 하여 바로 곯아떨어지기가 쉬울 것 같지도 않다. 게다가 납치당하다시피 날아온 제주도라 화장품 종류라곤 하나도 없으니 내일 아침 몰골이 슬슬 걱정되기 시작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 저 남자는 그 흔해빠진 남자들의 욕망 성취라는 목적도 없이 나랑 뭐 하면서 같이 밤을 새우자는 거지?


희한하게 이 남자가 하는 모든 말을 술술 믿게 된다는 것을 느끼면서 은근히 소름 끼치는 판인데 무작정 내민 남자의 손에는 주민등록증이 놓여 있다.


“뭡니까?? 지금 뭐 술값 외상 하는 것도 아니고 왜 나한테 민증을 까고 난리예요?”


“나의 젠틀맨쉽을 못 믿겠다면 이거라도 담보로…”


“됐어요. 거 함부로 자랑할만한 민증 사진도 아니구만. 접어두고… 어차피 잠 자기는 글렀으니 어여 그럼 안 쓸 나머지 방이나 물러요.”


“… 다음 주말에 나랑 빙어 낚시 갈래? 강원도로… 가끔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주는 느낌을 좀 느껴볼 필요가 있어…”


나는 등산을 싫어한다. 어차피 내려와야 할 것을 그리 기를 쓰고 힘들여 올라가는 이유를 모르겠기 때문이다. 나는 낚시를 싫어한다. 생선이 먹고 싶으면 얼마든지 사서 먹으면 될 것을 그거 한 점 먹겠다고 굳이 내 손으로 생물을 잡아서 죽여서 먹어야 하는지를 모르겠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추운 날씨에 굳이 야외에서 떠는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을 증오한다. 그저 나는 추운 것이 정말 싫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의 입은 다른 소리를 한다…


“가볼까? 설마 의사랑 같이 가는데… 감기 걸리면 알아서 고쳐주는 거지?”


분명 나는 그러한 사서 하는 고생들을 싫어하는데… 좋다고 대답하고 있다…


“여기 욕실이 아마 김 대리님 욕실보다 좋을걸? 잠은 안 자더라도 따뜻한 물에 씻는 건 꽤 피곤이 풀릴텐데?”


이 정도 상식이야 초딩도 아는 것일 테지만 희한하게 장 선생이 말하니 꼭 해야만 하는 건강지침이라도 되는 양 중요하게 느껴진다. 너 씻고 나오면 내가 좀 어찌해 보려고…라는 류의 뉘앙스는 단 한 톨도 묻지 않은 그의 말에 홀린 듯 욕실로 들어서다 절로 멈추게 된다. 내 욕실보다 좋다고? 내가 살고 있는 원룸보다 좋다. 여기다가 살림 차리고 살아라고 해도 살겠다는 생각이 얼핏 든다. 


남자의 말은 맞았다.

피로가 녹자 마음도 더 녹았다. 머리를 반쯤 말리다가… 만약 남자가 이미 자고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를 잠시 생각하게 되었다. 둘 다 말로는 피곤하지 않다고, 졸리지 않다 했지만 잠깐의 공백은 기절 숙면으로 이르는 지름길인 것을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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