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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Jul 03. 2024

그 제주도의 푸르게 설레던 밤

(5)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좋은 일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잘 차려진 조식이 감흥 없는 잡지 사진쯤으로 보일 정도로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이유도 없이 가슴이 두근거린다.


“미안. 집에 일이 생겼어. 지금 가도 괜찮지? 서두르게 해서 미안.”


“아냐. 잠깐만… 금방 챙길게.”


남자가 프런트에 전화를 해서 차를 준비시키는 것 같았고, 갑작스럽게 왔던 거라 가지고 왔던 거라고 해 봤자 핸드백 하나가 다였지만 이 심각한 분위기 속에 내가 지금 저 남자가 아침에 죄다 새 걸로 사다 안긴 화장품들을 쓸어 담고 있으면 어떤 꼴일지가 심히 고민되기 시작했다. 욕실 앞에서 살짝 망설이고 있었는데…


초인종 소리가 나더니 잔머리 하나 없이 말끔하게 말아 올린 헤어스타일을 한 정갈한 여자 매니저가 종이 박스 하나를 가져와 민첩하게 내가 고민해 마지않았던 화장품들을 자로 잰 듯 깔끔하게 담는가 싶더니 쇼핑백에 안정적으로 넣어 살짝 숙인 목례와 함께 건넸다.


“이제 갈까? 설마 내가 처음 준 선물들을 놓고 갈 생각은 아니었지?”


여전히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지만 남자는 한껏 노력해서 웃어 보이려 했다. 


“나, 미안한데 말 좀 안 해도 되지?”


익숙하지 않은 질문을 받았다. 주로 ‘우리 얘기 좀 할까?’ ‘나 말 좀 할게…’이런 류는 들어봤다손 치더라도 ‘나 당분간 말 좀 안 할게.’라고 미리 선언하는 사람은 처음이다.


그럼에도 매우 이해가 가고, 그가 어떤 상태인지를 알겠다. 


“… 묻지 않을 테니까 말 안 해도 돼.”


“고마워.”


그 와중에도 예의를 차린 남자는 공항을 가는 차 안에서도, 비행기 안에서도 정말 말이 없었다. 희한한 건 그럼에도 불편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의 이유를 파악해 보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하지만 파도가 친다… 잔잔했던 호수가 갑자기 바다로 바뀐 양… 그렇게 마음속에 파도가 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모두 복잡하게 살고 있다. 우리는 각자의 보유한 문제와 또 이렇듯 갑자기 다가오는 문제들에 치여 살고 있다. 서로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해서 개별의 몇십 년을 갑자기 합해 놓아야 하는 그런 어거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직은 보여주고 싶은 것만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사실 이기적 이게도 나는 남자가 오히려 털어놓지 않아 고마웠다. 아직은 그만큼 알고 싶지 않다. 나도 곧 닥칠 밀레니엄 쇼크에 대비해 손봐야 하는 자식 같은 시스템만 여러 개인 중차대한 고난 기를 보내는 중이니까…


“여보세요.”


일요일 오전에 걸려오는 전화치고 반가운 경우는 없다. 막 김포에 도착해서 바깥으로 나오려는 참인데 전화가 걸려왔다.


“네, 한 대리님…. 무슨 배치를 돌렸다고요?(Batch file : 반복되는 명령어들을 프로그램화해서 간단하게 돌리는 프로그램) 

그걸 왜 돌렸는데요? 에러가 떴으면 로그파일을 뒤져야지 왜 남의 배치는 돌리고 난리예요! 

알았어요. 저 추워서 택시 타고 갈 거니까 전화하면 정문 앞에서 대기 타다가 택시비 내세요! 저 지금 김포공항이요! 아 남이사!!”


“데려다주고 갈게. 다시 회사 들어가야 하는 거지? 종로 들렀다가 터널 타면 되겠다.”


“아냐, 급한 거 같은데 오빠는 따로 가.”


갑자기 핏기가 없어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 안 되어서일까… 

낯 간지러워 안 나오던 오빠 소리가 다 나온다.


“가자.”


남자는 손을 잡고 가까이 있던 택시에 같이 올랐다. 


“형한테 전화하지 마. 어차피 난 이 택시 계속 타고 가야 하니까.”


그 말을 남긴 후 남자는 다시 상념에 빠져 들었다. 나 역시 이제 또 누군가가 헤집어 놓은 에러를 잡을 생각을 하느라 바빴다. 


기름집 앞에 택시가 섰다. 


“갈게. 말하고 싶어 지면 전화해.”


“곧 말하고 싶을 거야. 

일 너무 많이 하지 말고… 집에 갈 때 택시 타.”


남자는 그 와중에 또 뭔가를 쥐여 준다. 또 또 오백 원짜리다.


"이 와중에 이러고 싶냐?”


“인생이 쇼크 천지인데, 내가 정해서 할 수 있는 거 정도는 하고 싶어서… 내가 너 오백 원 주는 거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얼른 가.”


지금 오백 원으로 택시 타란 말이냐고 따질라는데 아직 안 건드린 택시 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 오백 원은 쓰라고 주는 거 아냐. 택시비 따로 줘?”


“아냐!”


“어쭈그리… 택시 문이 열렸는데도 둘이 아주 그냥 신났구만? 어떻게 된 거야! 왜 둘이 같이 택시에 들어 있어. 너네 둘이 어제 어디 간 거야?? 지금 이 시츄에이션, 이거 뭐야!”


“형이랑 상관없는 일이야. 일요일에 사람을 불러대고 그래? 갑이면 다냐? 우리 김 대리 너무 일 시키지 마. 나 좀 급해서 간다.”


여전히 막아서고 있는 한 대리를 밀치다시피 하고 겨우 장 선생을 보내고 나서야… 갑자기 떠올랐다… 장 선생이 들고 탔던 내 화장품 보따리…. 그러면서도 이로써 다시 만날 보험 하나는 생긴 셈이라는 생각에 은근히 안심이 되는 것은 얼마나 유치한가.


“저런 싸가지 하고는… 

뭔 일이 있길래 같이 밀월여행 다녀온 여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리 간대?”


“내 배치에 뭔 짓을 한 것인지나 어여 이실직고해요!”


“배치야 고치면 되는 거고… 둘이 어디 갔었냐니까? 제주도? 왜 김포공항에서 같이 택시를 타고 와? 어제 낮에 사라졌잖아.”


“아니 뭐 수사반장이에요? 아님, 우리 아빠예요, 뭐예요? 왜 이리 난리예요.”


“아 진짜. 내가 말했잖아. 나 김 대리랑 결혼하고 싶대도?”


“뭐예요. 일요일 해장술 드신 거예요? 아님 어제 술이 안 깬 거예요? 그거 한 대리님 주사잖아요.”


“아 참. 아니래도? 내 휘문 후배가 그랬잖아. 취중진담이라고. 몰라?”


“한 대리님. 평상적으로다가 이 엘리베이터가 꽤 빠른 편이거든요? 근데 한 대리님이 하도 쓸데없는 소리를 옆에서 해대니까 정신이 없어서 아주 그냥 몇만 년으로 느껴지네요?”


“자꾸 이런 식으로 피할래?”


“자꾸 이러시면 갑의 직위를 남용한 혼인 압박으로 엇다가 고소할래요.”


“아이고!! 김 대리야! 얼른 와봐. 좀 있다가 두바이 장 서면 원유값 받아 넣어 다시 돌려야 되는데 이기 지금 에러가 딱 떠서 움직이지를 않는다이. 마 덕분에 이 핑계로 에버랜드 끌려갈 건 피했지만 말이지. 흐흐흐”


저렇게 가족이랑 뭐 하는 거 싫고 싱글이 좋아 죽겠는데 뭐 하러 장가는 갔나 싶은 인간의 대표, 안 부장이 반색을 하며 다가오는 바람에 일단 한 대리와의 전쟁은 휴전상태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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